어떤 노거사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이제 얼마 후면 귀신이 잡으러 올 텐데, 어떻게 대비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공부가 간절해지지가 않아요.” “마지막 숨을 몰아쉴 때, 귀신이 잡으러 오는 게 아니라, 이미 와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나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문제는 그 귀신을 바로 볼 줄 모르는 것이지요. 바로만 보면, 분심이 솟구쳐 간절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귀신을 보실 수 있겠습니까? 바로 앞에 있는데요.” “.......” 안타깝게도 그 분은 제 말을 알아들으시지 못했습니다. 이런 경우 아무리 간곡히 지적해드려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대통령이 TV에 나와서 사과했습니다. “도둑이 들려면 개도 안 짖는다.” 야당이 비판합니다. “도둑이 주인이면 개가 안 짖는다.” 산 법문들입니다
풀 뽑는 울력을 하는데, 큰스님 방 앞에는 풀도 적더라. 고개 들어 언덕을 보니, 거기는 풀투성이인데 뽑고 싶기는커녕 보기 좋기만 하다. 마당과 야산만 구별하지 않으면, 풀 없는 것도 상관 않고 풀 있는 것도 상관 않을 텐데. 번뇌 즉 보리. 그래도 나는 마당에 있으니, 풀을 뽑는다. 그러다 잠시 멈춘다. 다 뽑아버리면, 큰스님이 얼마나 심심할꼬.
길을 걸으면서 마음은 늘 목적지에 가있곤 했습니다. 목적을 위해 현재를 희생하곤 했습니다. 이제 이쯤에서 길 위의 자신을 돌아봅니다. 그렇게도 오랜 기간 걸어왔는데, 왜 아직도 길은 계속 이어지기만 하는 걸까요? 이젠 압니다. 이 길은 끝이 없다는 것을. 걸으면 걸을수록 목적지는 그만큼 멀어진다는 것을. 이제 목적에 대한 강박관념을 내려놓습니다. 더 이상 ‘목적이 이끄는 삶’이라는 말에 속지 않습니다. 삶은 밖의 무엇에 의해 이끌어지는 게 아니라, 안에서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이미 도착해 있는 것입니다
발은 땅과 친합니다. 붙어삽니다. 간혹 뛸 때도, 떨어졌다가 얼른 돌아갑니다. 발은 땅을 철석같이 믿습니다. 땅 외에는 모릅니다. 땅이 받쳐주므로, 항상 낮은 곳에 있을 수가 있습니다. 사실 아무리 도망가고 싶어도, 도망갈 수 없습니다. 땅 덕분에 가끔 발은 춤을 추기도 합니다. 땅을 차면, 반동으로 공중제비를 돌 수도 있습니다. 땅 덕분에 마음껏 재주를 부립니다. 지옥이든 정토든 어디를 가나 땅이 있어서, 발은 걱정 하지 않습니다. 어디를 가나 땅을 디디니, 늘 수처작주(隨處作主)입니다. 한결같이 디딤돌이 되어주므로, 발에게는 땅이 곧 극락입니다. 입처개진(立處皆眞)입니다. 마음발도 그렇습니다.
차가 마시고 싶으면, 손은 잔을 쥡니다. 마시고 나면 놓습니다. 놓고 난 뒤에는, 기억하지도 않습니다. 뭐든 필요할 때 쥐고는 얼른 놓습니다. 하나를 고집하면, 다른 것을 쥘 수가 없습니다. 쥘 땐 쥐고 빌 땐 비므로, 있고 없고에 상관하지 않습니다. 금덩이라도 계속 쥐고 있으면, 괜히 무겁고 번거롭습니다. 모든 것을 제 자리에 두고, 필요하면 알맞게 갖다 쓰면 됩니다. 수많은 물건이 손을 거쳐 갔지만, 전혀 흔적이 없습니다. 소유 의식도 없습니다. 빈손은 뭐든지 쥘 수 있습니다. 마음손도 그렇습니다.
으스름이 걷혀가는 경내에는 범종 소리가, 마음속에는 “문종성 번뇌단…”이 간절하게 울려 퍼집니다. 낮고 느린 중성음이 마음 밖과 안에 그려나가는 간곡한 동심원의 물결. 굵고 낮은 매듭을 지으며 웅웅 커졌다 작아졌다 뛰는 맥놀이. 일호의 사심이라도 남김없이 무장해제 시키는 맑으면서도 자비로운 긴 여운. 종소리를 듣고 제 마음속의 비천들도 모두 깨어나, 수공후 피리 장구 비파 생황 아쟁 등을 들고 한바탕 춤추며 야단법석을 피웁니다. 환희로운 제 마음은 당초 덩굴에 둘러싸인 비천이 되어, 화관과 팔찌를 끼고 부드러운 비단망사 천의를 휘날리며 연화좌에 무릎 꿇어 연꽃 공양을 올리며 부처님의 진리를 찬탄해 봅니다.
“네 눈앞의 찰간대를 꺾어버리고 오너라!” 부처님 사후 불경을 기록할 때, 다문제일의 아난은 가섭의 이 모진 한 마디와 함께 쫓겨났다고 합니다. 아무리 법문을 많이 듣고 또 기억력이 뛰어나다 할지라도, 깨달음을 얻지 못한 사람은 참석할 자격이 없습니다.깨친 사람들끼리는 이심전심으로 그 뜻이 같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사견을 섞어 넣기에 경전이 오염되기 때문입니다. 이에 분발하여 아난은 절벽 위에서 새처럼 한 다리를 들고 정진한 끝에 마침내 깨달음을 얻습니다. “나는 이렇게 들었다.”고 하는 위대한 한 마디는 이렇게 탄생했습니다. 자기 생각을 섞지 않는 것, 이것이 마음공부의 요체인 것 같습니다.
가까웠던 분이 돌아가시고 나면, 결국 하나의 이미지로 기억됩니다. 일본 광륭사의 목조 미륵보살반가사유상에서 ‘인간다운 얼굴 이미지’를 보고 가슴 떨렸습니다. 일본 국보 1호라는 이 불상은 재료가 신라의 적송이라고 합니다. 어느 신라인이 표현한 이상적 인간의 이미지. 이를 보고 철학자 야스퍼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철학자로서, 인간존재를 최고로 표현한 여러 예술품을 접해왔습니다. 그런데, 이 반가사유상에는 진실로 완전무결한 인간 존재 최고의 이념이 남김없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지상에 있어서 모든 한시적인 속박을 초월하여 달성해낸 인간 존재의 가장 청정하고 원만하며 영원한 모습의 심볼이라고 생각합니다.”
가파른 산길을 올라 산꼭대기 후미진 곳에 위치한 선방을 찾았습니다. 마침 해제철이라 비어있었기 때문에, 양해를 얻어 선방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좌복을 깔고 앉아보았습니다. 마침 전면 벽에 써 붙여놓은 ‘입승’이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선방을 통솔하는 소임을 맡은 스님의 자리를 표시한 것이겠지요. 순간 ‘노끈을 세운다’는 뜻이 이해되면서, 이 자리를 거쳐 간 많은 선덕들의 정신이 짜릿하게 전해져 왔습니다. 비록 그분들은 떠나고 없지만, 법의 등불만은 온전히 전해져오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우리 눈앞에는 어떤 정신의 노끈이 꼿꼿이 서서 만세에 걸쳐 끊어지지 않고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정자는 기둥만 있고, 벽이 없는 최소한의 건물입니다. 마음을 비운 그 모습이 마치 한 송이 연꽃을 떠올립니다. 연꽃은 불교뿐만 아니라 유교 선비들도 매우 좋아했습니다. 성리학의 선구자 염계 선생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나는 유독 연꽃을 사랑한다. 진흙에서 자라지만 더럽지 않고, 맑은 물에 씻기지만 요염하지 않고, 속은 텅 비었지만 겉은 꼿꼿하고, 덩굴과 줄기가 어지럽지 아니하고, 향기는 멀수록 더욱 짙다.” 정자의 이미지에 연꽃의 모습이 겹쳐집니다.
추사고택의 주련에서, ‘차를 반쯤 마셨는데, 향은 처음 그대로’라는 글귀와 마주쳤습니다. ‘선심초심禪心初心’이란 말이 떠올랐습니다. 차를 마셔도 향기는 처음 그대로인 것처럼, 이렇게 너절해진 우리의 마음에도 ‘처음 그대로의 향기를 내는 마음’이 있습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우리 안에는 그 무엇에도 물들지 않는 마음이 있으니까요. 세월이 흘러도, 마음은 처음 그대로 순수한 사람, 마음이 때 묻지 않은 사람, 항상 초심으로 살아가는 사람. 무색무취의 ‘첫 마음’이 뿜어내는 향기가 흘러나옵니다. 아무리 쓰고 써도 다 쓰지 못하고, 아무리 도망치고 싶어도 계속 흘러나오는 새 마음! 죽는 순간조차, ‘첫 마음’으로 죽고 싶습니다.
깊은 산 암자에 올랐더니, 법당 앞 작은 마당이 앙증맞은 손바닥 같았습니다. 좁은 툇마루에 앉아 물끄러미 앞을 바라보느라니, 건너편 산봉우리가 시야에 가득 차면서 호연지기가 느껴졌습니다. 한참을 앉아있어도, 마음이 너무나 편안했습니다. 문득 마당을 둘러친 담장의 아름다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 장면에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딱 그만큼의 높이! 그냥 두자니 너무 허하고, 담을 둘러치자니 천하의 절경을 가리게 되고. 무릎 보다 낮은 담장. 당신과 나 사이도 꼭 요 만큼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