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일은 필요치 않고 오직 사마타와 위빠사나 같은 수행만 열심히 닦으면 깨달음을 완성 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사마타와 위빠사나만을 실천해 가지고는 깨달음에 이를 수 없습니다. 지난 일입니다만 일전에 자신을 대학 교수라고 소개한 분이 찾아왔는데 불단에 모셔진 부처님을 보고도 예를 갖추지 않기에 왜 절을 올리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자신은 어떤 특정 종교에 소속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면서 내가 본래 부처임을 깨닫는 게 불교인데 예배가 크게 중요하냐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이분처럼 불교를 명상만의 종교로 오해하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불교는 마음을 깨닫는 종교이니까 참선만 하면 될 뿐 다른 수행은 필요치 않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부처님에 대한 믿음도 없고 공경도 없이 이곳저곳 찾아다니며 자신에
저는 불교를 오래 믿었으면서도 수행을 잘 모릅니다. 이제라도 수행을 하고 싶은데 제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불교는 중생들에게 현재의 삶의 구조를 근본적으로 되돌아보고 새로운 삶으로 바뀔 것을 가르칩니다. 말하자면 어둡고 답답하고 괴로운 삶의 현실을 바로 보고 바로 알아 이로부터 해탈할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피 신앙이나 영험신앙은 불자들을 이끄는 임시적 방편은 될지 몰라도 불자들의 삶의 방향을 근원적으로 바뀌게 하는 방편으로는 옳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에 대해 불만을 같고 비판을 하는 이들이 있겠지만 그렇게 말해도 할 수 없습니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반발하는 사람 스스로가 부끄러워하고 불자들을 바르게 이끌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
수행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올바른 스승이나 선지식을 만나야 된다고 했는데, 저희들로써는 올바른 선지식이 누구인지 가늠할 길이 없습니다. 어떤 분을 의지해서 구도의 길을 가야 합니까. 세간의 모든 학문과 기술도 그러하겠지만 구도의 길에 있어서 선지식을 만나는 일은 필수적입니다. 부처님은 구도에 있어 올바른 선지식을 만나는 일은 도의 전체를 이룰 만큼 중요하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간혹 혼자서 경을 보고 혼자 수행법을 택하여 수행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태도는 수행의 발전을 이룰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칫, 오류에 빠질 수 있으므로 즉시 생각을 달리하여 참된 스승을 찾아가 가르침을 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재 우리나라의 불교 현실에서 정법을 찾고 올바른 스승을 찾기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저는 선도 수련을 하다가 불교에 들어 온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쪽에서도 수련을 통해 부처님과 같은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과연 그러한지 알고 싶습니다. 제가 선도 수련을 직접적으로 해보지 않아 그 경지가 어떠한지는 단정적으로 말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러한 단체에서 체험 되는 수련의 경지는 부처님이 가르치시는 깨달음과는 거리가 멉니다. 모든 단체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대부분의 선도 수행 단체에서는 사람들에게 몸과 마음을 함께 닦아야 한다고 하면서 단학 수련이나 기공수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수련을 하면 몸도 건강해지고 집중력도 높아져 능률이 향상되고 삶에 활력이 생긴다고 말합니다. 또한 수련이 완성되면 소우주로서의 인간이 대우주가 되어 자유를 얻을 뿐만 아니라
중생의 마음이 그대로 부처라는 말씀을 많이 듣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우리 중생들의 마음은 여러 가지로 뒤틀려 있으면서 장애를 받습니다. 왜 그런지 설명 해 주십시오. 이와 같은 질문을 만약 과거의 선사들께 드렸다면 한마디로 대답하셨을 겁니다. ‘그렇게 묻고 있는 그대의 혓바닥에게 물어라’라고 말입니다. 본래 우리들의 마음은 여러 가지 기능을 지니고 있습니다. 대상에 대해 분별을 한다든가 감정을 일으킨다든가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를 예측 한다든가 하는 등의 기능 등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마음의 기능을 잘 살펴보면 또 다른 측면에서 크게 두 가지의 성질을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마음이 지닌 창조성이고 또 하나는 자유성과 속박성입니다. 먼저 창조성이란 만물에 이름을 붙이고 개념을 만
앞서 법사님은 흐르는 마음이 알아 채 질 때까지 하나의 방편을 택하여 삼매를 닦으라고 하셨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좀 더 구체적인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제가 말하는 이 공부법은 여러분이 알고 있는 근본불교의 위빠사나와는 얼마간 차이가 있다는 점을 말씀드립니다. 이는 순전히 마음관찰에만 중심을 두고 하는 설명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한꺼번에 두 가지 생각이 일어 날 수는 없습니다. 반드시 한 생각이 일어나고 사라진 다음에라야 다른 한 생각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삼매는 바로 이점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망상 번뇌가 일어 날 때 재빨리 다른 망상이나 번뇌가 뒤이어 일어나지 않도록 어떤 수행 주제, 즉 방편을 마음에 밀어 넣습니다. 그런 다음에는 방편이 앉아서 좌선 할 때는 물론이거니와 일상
마음을 관찰하는 공부가 불교 수행의 핵심이라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저는 마음을 관찰하려고 해도 관찰이 잘 되지를 않습니다. 어떻게 해야 되는지 그 방법과 과정을 말씀해 주십시오. 마음은 모든 법의 주체입니다. 마음이 없다면 일체의 선법과 악법도 있을 수 없고 번뇌 법과 열반 법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마음은 온갖 법의 근본이 되므로 마음을 관찰 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겠는데 질문 하신 분의 말처럼 이게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아예 근본불교의 위빠싸나 수행처럼 호흡을 관찰하라거나 걷는 행위를 관찰하라고 하면 좀 쉽겠는데 마음을 관찰 하라고 하면 말은 받아들이겠는데 실천이 결코 쉽지를 않습니다. 왜 그러냐하면 그 이유가 마음은 호흡이나 걸음걸이처럼 대상으로 나
저는 다라니나 진언에 대한 의미를 잘 알지 못한 채 관세음보살 육자대명왕진언인 옴마니 반메훔을 외우는 수행을 해 왔습니다. 다라니나 진언의 의미는 무엇이며 이 방법으로도 선정을 이룰 수 있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부처님이 말씀 하신 경전들을 접하다보면 초기 경전에서는 다라니나 진언을 찾아 볼 수 없고 대승경전에서 여러 가지 다라니와 진언들이 나오는 것이 눈에 띕니다. 대승경전에서는 다라니와 진언이 지니고 있는 성격과 함께 그 다라니나 진언을 받아 지니고 암송하게 될 경우 얻게 되는 공덕에 대해 설하고 있습니다. 특이한 것은 천수 다라니나 수능엄주 반야심경 등에서도 보듯이 다라니를 설하고 있는 경전 마다에서는 어떠한 다른 다라니보다도 그 경에서 설하고 있는 다라니가 최상이라고 하면서 적극적으로 신봉 할 것을
관세음보살은 일반 불자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신앙의 대상입니다. 경전에서도 누구든지 관세음보살을 염하면 소원을 성취한다고 설해져 있고, 또 불자들도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법사님은 관세음보살에 대한 해석을 다른 각도로 하는 것을 종종 들었습니다. 그에 대한 설명을 다시 한 번 부탁드립니다. 교리 공부를 조금이라도 해본 분들은 익히 알고 있을 터이지만 관세음보살은 ‘관자재’ 혹은 ‘관세자재’라고도 불리는 분으로 세상의 소리를 관찰해 중생들을 제도하는 보살입니다. 질문하신대로 특히 『법화경』「관세음보살보문품」에서는 어떤 중생이건 관세음보살을 정성껏 염하면 그 앞에 나타나 일체의 괴로움을 없애 준다고 했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사찰의 모든 법당에서는 지금도 관세음보살을 소리 높여 부르며 소원을 이루려는
중국에서 꽃을 피워 우리나라에 까지 영향을 미친 달마선법의 특징은 무엇보다 문자를 세우지 않고 사람의 마음을 곧바로 깨닫게 한다는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화두를 참구하는 간화선도 여기에 해당하는지 알고 싶습니다. 질문한 분의 말대로 달마선법의 특징은 불립문자 직지인심 견성성불에 있습니다. 문자를 빌려 마음을 깨닫게 하지 않고 곧바로 수행자의 마음을 보도록 하여 부처를 이루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알아 두어야 할 점은 불립문자라고 할 때의 문자는 단순히 글귀나 언어가 아닌 경전에서 가리키고 있는 수행법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부처님과는 달리 조사들은 법을 묻는 수행자들에게 말로써 설득을 시키려하거나 깨닫는 방법으로써의 어떤 특별한 수행법을 일러주지 않았습니다. 한마디 말로써 단박에 수행자의 마음을 찔
불가에서 참선이라 하면 대부분이 화두를 참구하는 간화선을 떠올립니다. 그런데 예로부터 이 간화선과 더불어 묵조선도 수행법에 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 왔다고 합니다. 묵조선이란 무엇이며 어떤 수행법인지 궁금합니다. 중국 선종의 임제종과 조동종은 송대 이후에 임제종은 간화선으로 발전하게 되고 조동종은 묵조선으로 발전 됩니다. 이 가운데 특히 오가 칠종 때에 동산 양개선사와 조산선사에 의해 세워진 조동종에서 10세 진헐청료선사에 이르러 묵조적인 선풍이 일어납니다. 진헐 선사는 현성공안을 주창한 분입니다. 현성공안은 간화선의 공안과는 달리 무언가를 의심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마음과 더불어 일체만법 그대로가 본증, 즉 본래 성불임을 그대로 믿고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후 묵조선이라는 말이 본격적으로 나오게
선가에서 견성성불을 말하는데, 어떤 분들은 견성이 곧 성불이라고 하고 어떤 분들은 견성이 성불이 아니라고 합니다. 법사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오래전, 거의 삼십년은 되었지 싶습니다. 성도재일 날 큰 스님의 법문을 듣기 위해 어느 법회에 참석 한 적이 있습니다. 법상에 오르신 큰스님은 한동안 양구를 하시었습니다. 양구란 입을 닫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사부대중이 조용히 큰스님의 법문을 기다리고 있는데 큰스님이 주장자를 높이 들어 법상을 치셨습니다. 그리고 말문을 열기를 ‘오늘은 인간 석가모니가 무상대도를 깨달아 부처를 이룬 날입니다. 경을 보면 부처님은 보리수 하에서 새벽에 떠오르는 샛별을 보고 성도를 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소승은 그렇게 생각 하지 않습니다. 부처님은 샛별을 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