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상 패자의 발자취가 온전히 남아 있는 경우는 흔치 않다. 종교 또한 여기서 자유롭지 못하다. 백제의 경우도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현재 남아 있는 유물만으로 당시의 불교신앙을 짐작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 그만큼 전해지는 기록이 미미하기 때문이다.백화산 중턱 태안 마애삼존불바닷길 오가는 사람들 다독여‘백제의 미소’ 서산 마애삼존불순례단 얼굴에 절로 미소 번져터만 남은 옛 절 보원사지는이제껏 못 본 백제 보물창고얼굴 잃은 사방불 안타까움은수덕사의 법화행자 혜현 스님행적에 씻고 불자로서 삶 다짐그럼에도 학자들이 일부 유물과 기록을 근거로
역사는 인류 사회의 발전과 관련된 의미 있는 과거 사실들을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어떤 일이나 현상이 진행되거나 존재해 온 과정을 비롯해 자연 현상의 변화 등 인류 사회의 변천을 담고 있다. 하지만 그 역사도 누가 어느 시점에서 기록하는가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다. 특히 정권이 바뀌었을 때 앞선 정권의 일들을 기록으로 남기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다. 정권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이전 정권의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고, 심지어 그 기록을 말살하기까지 한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말하는 이유다.부국강병 꿈꾸며 세운 정림사백제 멸망
“나라 안의 명산 중에서도 이곳이 가장 좋은 곳이니 불법(佛法)이 길이 번창할 곳이다.”옛사람들이 명산 중 명산이요불법 길이 번창할 곳이라 감탄자장 스님이 불사리 봉안하고신라 보천·효명 왕자 수행하며문수보살 친견하고 예경·공양본찰 월정사에서 상원사 거쳐보궁 수호 사자암·적멸보궁까지산중 전체가 성지이자 문화재옛사람들은 이곳의 산세와 지리를 보고 이처럼 감탄했다. 강원도 평창군과 홍천군, 그리고 강릉시에 걸쳐 있는 오대산. 높이 1563m의 비로봉을 중심으로 호령봉, 상왕봉, 두로봉, 동대산 등의 고봉들이 한 뼘 두 뼘 높이를 달리한
범일(梵日) 스님이 당나라 명주 개국사에 이르자 왼쪽 귀가 없는 한 사미가 “저도 신라 사람입니다. 제 집은 명주의 경내인 익령현 덕기방에 있으니 조사께서 후일 본국에 돌아가시거든 반드시 제 집을 지어 주십시오”라고 간곡히 청했다. 이후 귀국해 굴산사를 세우고 가르침을 전하던 어느 날 꿈에 그 사미가 나타나 “약속한 것을 실천하라”고 재촉하자, 범일 스님은 전에 사미가 일렀던 곳으로 찾아가 낙산 아랫마을에서 덕기라는 이름을 가진 여인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여인의 아이가 함께 놀았다는 금빛 나는 친구를 찾고서는 놀라지 않을
“절과 절이 별처럼 벌여 있고, 탑과 탑들은 기러기 행렬인 양 늘어섰다. 법당을 세우고 범종을 매어다니 용상 같은 승려의 무리가 세상의 복전이 되고, 대소승의 불법이 서울의 자비로운 구름이 되었다.”불교미술 보고인 남산 오르며보리사터 미륵곡 부처님 만나자애로운 미소에 환희심 느껴바위 하나에 35개 조각 새긴10m 탑곡 마애불상군에서는부처님 모습 찾으며 원 세워삼릉계선 선각육존불상 참배친근한 미소로 순례단 맞이해‘삼국유사’는 불교가 공인되면서 변화한 신라 서라벌을 이렇게 묘사했다. ‘절이 하늘의 별처럼 펼쳐져 있고 탑이 기러기 행렬처
문수보살로부터 법을 부촉 받았음에도 신라 왕족의 일원으로서 나라의 안위를 걱정할 수밖에 없었던 자장 스님. 어느날 그 앞에 나타나 황룡사 호법룡이 자신의 맏아들이라고 밝힌 신인은 “황룡사 안에 9층탑을 이룩하면 왕업이 길이 편안해질 것이며, 탑을 세운 후에 팔관회를 베풀고 죄인을 사면하면 외적이 침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황룡사 9층 목탑 건립은 이렇듯 자장 스님의 신이로운 경험에서 시작됐다.신라의 화려한 불교문화 총체황룡사지서 옛 모습 그려보고분황사선 원효 화쟁사상 새겨불굴사지의 석조사면불상과이차돈 유물 출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