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몽상은 꿈처럼 뒤바뀐 헛된 생각이라는 의미이다. 부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갖가지 가르침을 베푸신 것은 모두 중생들의 전도몽상의 어리석음을 깨뜨리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많은 불자들이 전도몽상을 깨뜨리기 위한 방향으로 가기는커녕 불법 안에서 전도몽상을 일으켜 더욱 헤매고 있다. 실상 ‘불법 내 외도’들이 판을 치고 있는 것이다.부처님은 재세 시에 불교 밖의 외도들을 향해 신랄한 비판을 가하셨는가 하면 안으로도 제자들을 향한 비판을 서슴지 않으셨다. 비판이 없이는 정법을 세울 수 없고 비판 자체로써 정법을 삼는 것이 불교인 것이다.
1980년대 중반이라 생각된다. 어느 날 나보다 연배도 많고 불교 활동도 오래한 김래동 법사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급히 함께 해야 할 일이 있으니 빨리 조계사로 나오라는 것이었다. 그분의 다급한 목소리에 나는 다른 일은 제쳐놓고 전철을 타고 조계사로 향했다. 김 법사님을 만난 나는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는 “오늘 저녁에 영등포 모 교회에서 불교 비방집회가 있는데 청년불자들을 동원해 그 집회를 막을 생각이다. 그러니 당신도 청년불자들과 함께 교회에 잠입해 집회 때 행동을 함께 하자”고 말했다. 나는 법사님의 말에 십분 공감했기에
오랜 세월 포교와 전법을 함께 해온 동료 법사님을 만났다. 평소 구도의지가 강하고 불교를 걱정하는 마음도 남다른 분이다.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다 보니 이야기는 평소의 만남처럼 불교의 앞날을 걱정하는 쪽으로 흘렀다. 그러다가 기복불교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그는 우리 한국불교가 이렇게 퇴보하게 된 이유의 하나로 신도들이 기복으로만 치우쳐왔기 때문이라고 성토했다. 그런데 나는 법사님의 지적에 동의할 수 없었다. 오히려 나는 한국불교는 기복성 때문이 아니라 기복성이 약화되고부터 문제가 커지기 시작했다고 반론했다.하지만 그는 이해할 수
간화선은 공안을 참구해 마음의 본성을 깨달아 부처를 이루는 수행법이다. 내가 간화선을 처음 접한 것은 40여년 전 수선회(修禪會)를 통해서다. 수선회는 지금도 간화선 정진에 매진하는 재가수행단체로 생명력을 잃지 않고 있다. 당시 나는 현 수선회 지도법사인 현담 스님을 인연으로 간화선을 접했는데, 현담 스님은 큰스님들과 인연이 깊어 회원들에게 그분들의 가르침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자주 만들어주었다. 수선회는 현재 조계사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지만 과거에는 자리를 마련하지 못해 선학원을 도량으로 삼아 활동했다. 선학원은 지금과는 사뭇
며칠 전 뜻밖의 전화 한통이 걸려왔다. 과거에 같은 스승을 모시고 공부하다 출가한 스님이었다. 스님은 법보신문 연재를 보고 전화했다. 내가 글에서 ‘모든 종교는 결국 하나의 근본을 찾는 것이라는 민족종교인의 주장을 불교에선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견해와, ‘불교는 자신과 세계의 근원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믿는 종교가 아니다’라는 지적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스님은 이왕 통화된 김에 간단히라도 할 말을 하고 끊겠다고 했다. 내가 어떤 거냐고 묻자 스님은 말을 꺼냈다.“법사님, 우주 만물의 근본이 곧 나의 근본이고, 나의 근본이 바
종교토론회가 있었다. 토론 주제는 ‘각 종교에서 말하는 선과 악’이었다. 나는 불교 측 입장에서 선악 문제를 다루고 타종교 견해가 불교와 어떻게 다른지를 밝히기 위해 참석했다. 각 종교마다 주제발표가 있고 다음으로 자유토론과 질의응답이 이어졌다. 각자 자신의 종교입장에서 타종교의 주장을 비판 수용하는 가운데 민족종교 발표자가 갑자기 토론 주제와 벗어나는 주장을 했다.“각 종교의 형태는 달라도 그 뿌리는 같습니다. 결국은 하나의 근본을 말하는 것이고, 그 근본을 가르치는 방법이 다를 뿐입니다. 기독교의 하나님, 불교의 법, 유교의 도
불자들의 관심사는 심오한 불교지식보다는 자신의 생활과 밀접하고 쉬운 가르침을 선호한다. 불자들이 유독 관심을 보이는 불교의 내용들이 업, 천도재, 윤회, 가피 등으로 교리보다는 신앙 성격을 띤 것들이 많다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그중 업은 불자들의 빼놓을 수 없는 관심사이다. 마치 기독교의 원죄설이 기독교인들의 마음을 지배하듯 불교의 업설은 불자들의 마음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많은 불자들은 현재의 삶은 전생에 지은 업의 영향을 받으며 그로 인해 행복하거나 불행하다고 믿는다. 내가 짓고 내가 받는다는 ‘자업자득 자작자수(自業自得 自
한 선원에서 경전강의 부탁을 받고 법회에 갔을 때 일이다. 그곳은 교계에서 제법 여법한 단체로 알려졌고 선원장 스님도 남다른 원력과 수행력으로 모범이 될 만한 분이었다. 그 선원에서는 내게 1년간 매주 한차례 ‘화엄경’ 해설을 요청했다. 경전 분량이 방대하고 의미도 깊은 ‘화엄경’을 충분한 시간을 갖고 소신껏 풀이해 보았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던 차였다.나는 시간에 맞춰 선원에 도착해 공부하는 불자들 안내를 받아 법당에 들어섰다. 그런데 법당에 들어서는 순간 경전을 강의하고 싶은 생각이 사라졌다. 경전 강의를 위해 급조된 법좌가
내 고향은 충청남도 아산이다. 동네 뒤에는 나지막한 산이 있고 동구 밖에는 시냇물이 흐르는 아늑하고 평온한 마을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열두 살까지 살았고 이후에는 부모님을 따라 약간 도회지 분위기가 느껴지는 면소재지에서 살았다. 그런데 나는 고향에서 사는 동안 아주 심한 부스럼을 몸에 안고 살다 시피 했다. 종기는 배, 등, 다리, 팔을 비롯해 온몸에 쉴 사이 없이 생겨났고 이로 인해 적지 않은 곤혹을 겪었다. 약이라고 해야 기껏 마을 어귀 점포에서 파는 고약이 전부였고 어쩌다 병원에서 치료라고 했지만 별 효과를 보지 못했다. 지금
일전에 한 여성불자의 섬뜩한 천도재 이야기를 소개했었다. 그는 내가 40년이 넘도록 불교활동을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불자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불자님이 불교를 믿으면서 원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때 그는 “원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고 다만 죽기 전에 내가 무엇인지 알고 싶다”고 대답했다.이후 그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충실했고 확고한 신심과 함께 바른 견해를 지키고자 부단히 노력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는 건강에 이상이 생겼는지 얼굴빛이 초췌했고 행동도 활발치 못했다. 나와 회원들은 그의 건강상태가 염
아버지는 할머니가 스님 되신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스님에게 특별한 일이 아니면 찾아뵙지 않았고 신심도 없었다. 스님 역시 속가에는 들르지 않으셨고, 나 외에 다른 가족들과 만나는 일도 없었다.내게 할머니 명덕 스님이 보여주신 불가사의한 사건들 가운데는 아버지와 관련된 것도 있다. 당시 나는 21살이었고 그해 군에 입대했기에 어느 사건보다 기억이 또렷하다. 어느 날 아버지는 내게 할머니를 뵈러 절엘 가야겠다고 하셨다. 면사무소에서 스님의 일로 연락이 왔다며 자전거를 타고서 집을 나섰다. 집에서 절까지는 자전거로 약 1시간
할머니 스님은 살생을 아주 싫어하셨다. 살아있는 목숨을 절대 죽이지 말고 불쌍한 생명을 보거든 보호하라고 늘 말씀하셨다. 그 때문에 나는 친구들과 그 흔한 고기잡이도 하지 않았다. 스님은 육식도 전혀 않으셨다. 더구나 불공쌀로 지은 밥을 고기와 먹는 일은 죄짓는 행동이라 하여 철저히 금하셨다. 법당에는 죽은 짐승을 보아도 그날은 출입하지 말라고 하였다. 육식과 관계된 스님의 두 가지 사건이 있다. 하나는 스님의 상좌스님과 관련해서다.내가 초등학교 6학년쯤 됐을 때 스님에게는 상좌스님이 한 사람 있었다. 어느 날 상좌스님은 심부름을
나의 할머니께서는 스님이셨다. 오늘날 내가 부처님의 길을 가게 된 동기도 순전히 할머니 명덕 스님의 공덕에 의지해서이다. 스님께서는 나를 무척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셨다. 어린 시절 방학 때면 스님이 계신 암자에서 지냈다.스님은 도를 깨치신 분은 아니었지만 부처님을 향한 신심과 정성은 극진하셨다. 신도들이 절에 올때 생선도 못 먹게 하셨고 부부간에 잠자리도 금하셨다. 부처님께 바칠 공양미를 가져올 때에는 도중에 땅에 내려놓지 못하게 했고 불공 전에 가져온 음식을 먼저 먹지 말라 하셨다.믿기 어렵겠지만 이런 스님에게는 신통력이 있으셨다
요즘 내가 강의하는 책이 ‘명추회요’다. 송나라 때 고승인 영명연수 선사가 저술한 ‘종경록’ 가운데 요체가 되는 내용들을 제자 회당조심 스님이 선별해 엮은 책이다.얼마 전 ‘명추회요’를 설명하고 있었다. 내용은 ‘과거의 마음과 현재의 마음과 미래의 마음은 볼 수도 없고 얻을 수도 없다. 부처도 하물며 이렇게 마음을 볼 수 없고 얻을 수 없는데 어찌 사람들이 마음을 보겠는가?’라는 부처님 말씀이었다. 이 구절을 설명하는 도중 한 불자가 질문했다. “불교수행은 마음을 보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씀 하시면 혼란이 생깁니다.”
돈독한 신심과 열정으로 부처님 법을 공부했던 강단 있는 여성불자님 얘기다. 게다가 꽤 오랜 세월 시부모를 모시고 살아야 했고, 시어머니 성격이 유별나 시집살이도 혹독했다고 한다. 결혼을 하고 보니 시어머니가 툭하면 무당들을 찾아 점을 보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시어머니가 용한 무당이 있다며 함께 가자고 했더란다. 그 불자는 시어머니 말씀을 거역할 수도 없고 내심 호기심도 있어 함께 무당을 찾아갔다.무당은 동전들을 손에 들고 주문을 외다가 상 위에 떨어뜨린 뒤 펼쳐진 동전들의 배열을 보고 점을 쳤다. 시어머니 차례가 되었다. 시어머
망설이는 성격은 어떤 일이 생겼을 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우물쭈물하거나 이랬다저랬다 반복하는 행동을 낳는다. 예를 들어 옷을 사면 그대로 입지 않고 잘못 샀다는 생각이 들어 그 옷을 다시 바꾼다. 이런 식으로 갈까 말까, 할까 말까, 이럴까 저럴까 망설이다 시간을 허비한다. 망설이는 성격은 일의 능률이 떨어지고 허점을 노출시키는가 하면 때로는 큰 낭패를 보게 된다. 나도 바로 이런 망설이는 성격의 소유자라 할 수 있다.어렸을 적의 일이다.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는 집에서 거리가 꽤 멀었다. 어린 걸음으로 족히 40~50분은 걸어야
오래 전 일이다. 10여년을 모시고 공부하던 스승과 매끄럽지 못한 관계로 결별했다. 법에 대해 스승과의 견해가 달라 늘 갈등했고 이로 인해 마침내 스승과의 인연을 접어야 했었다. 그로 인해 나는 적잖은 심적 방황을 겪었다. 앞으로의 삶을 어느 방향에 두어야 하는지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생각 끝에 나는 지금은 많은 이들의 멘토가 되어 유명해진 모스님을 만났다. 당시 그 스님은 출가 전부터 나와 교분이 깊었던 관계로 허물없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나는 스님을 만나 스승과 헤어지게 된 동기와 과정들을 설명하고 내가 앞으로 어떻
명산에는 절도 많고 기도처도 많다. 서울의 명산인 북한산에도 많은 사찰과 암자들이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명산이라고 반드시 부처님을 모신 절만 있는 것은 아니다. 무속인들이 세운 굿당이나 신당들도 적지 않게 눈에 띈다. 아마 절 수효 못지않게 굿당과 신당이 자리를 잡고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나는 어렸을 적부터 무속인들에 대한 호기심이 많았다. 굿당이나 신당을 발견하면 그냥 지나치지 않고 안에 들러 굿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고는 했다. 며칠 전에도 오랜 만에 북한산을 오르게 되었는데 꽤 규모가 큰 굿당 안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
초등학교 친구 중에 목사가 있다. 그런데 그 친구는 나를 만날 때면 이젠 불교를 그만두고 예수님을 영접하라고 집요하게 전도한다. 지금도 나를 위해 하나님에게 매일 기도한다는 말도 빼놓지 않는다. 하나님은 너를 무척 사랑하시기 때문에 네가 오기를 기다리고 계신다면서 어떻게든 설득시키려고 애쓴다.이런 친구가 불교를 믿는 사람에게 자주 사용하는 무기가 있다.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요 부활의 종교임에 비해 불교는 사망의 종교요 허무의 종교라는 것이다.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났으나 석가는 부처가 됐다지만 결국은
인터넷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영상물들이 존재한다. 불교도 예외는 아니어서 굳이 강의실이나 법회에 가지 않아도 각양각색의 불교를 손쉽게 접할 수 있게 됐다.최근 한 인문학자의 불교 강의를 듣게 됐다. 주제는 무명홀기설(無明忽起說)이었다. 무명홀기설이란 진여의 부처 마음자리에서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홀연히 무명이 일어나 중생이 되었다는 이론이다. 그는 이 이론에 대해 마치 고요한 바다가 어느 때부터인가 파도가 일어나 어지럽게 된 것처럼 중생의 마음도 그와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모든 중생은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무명이 일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