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의 심리상태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해석이나 전통적 이해는 천상의 복은 반드시 끝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복의 끝에는 지옥이 있다. 앞에서 쵸감트룽파 린포체는 천상의 심리상태를 엄청나게 노력한 수행자의 경우를 예로 들어서 설명했다. 그런데 천상의 즐거움과 희열은 엄청난 수행의 결과 외에도 사랑받고 사랑하고자 하는 갈망에 의해서도 그 경험이 가능하다. 우리는 누구나 살면서 한번쯤은 천상의 마인드를 경험한다. 바로 사랑의 순간이다.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항상 사랑을 갈구하고 인정받으려는 욕구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예기치 않은 순간에 사랑의 대상을 발견하고 빠질 수가 있다. 사랑은 우리의 무의식이 끊임없이 갈망한 결과다. 흔히 눈이 멀고 콩깍지가 씌워져서 세상이 다르게 보이고 모든 것이 아름답고
마크 엡스타인은 천상계는 감각적 지복, 희열, 환희, 심미적 쾌락을 경험하는 심리적 상태라고 했다. 즉 천상의 마인드는 우리가 원하고 사랑하는 대상과 하나가 됨으로서 일시적으로 자아의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즐거움과 희열의 한가운데 머물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천상계에 나타나는 관세음보살님은 비파를 들고 계시는데 이는 그와 같은 즐거움은 일시적인 것이니 몽환의 상태에서 깨어나라는 가르침을 음악으로서 들려주신다는 것이다. 한편 쵸감트룽파 린포체는 천상의 마인드를 보다 세부적이고 명료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천상의 심리상태는 자아와 영적 유물론에 근거를 둔 정신적 고착, 일종의 명상적 몰입이라는 것이다. 때로는 엄청난 노력의 결과로 영감적인 비젼이나 소리, 정신적 육체적으로 신비한 가피경험을 하기도 한
고도의 몰입적인 경쟁심과 질투심, 그리고 편집증적 망상을 특징으로 하는 아수라의 정신세계에서 우리는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우리가 알다시피 아수라의 마인드는 접촉하는 모든 대상들을 ‘나’와 ‘나의 편’, 그리고 ‘너’와 ‘너의 편’으로 구분해서 상대를 의심하고 경계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와 같이 극단적인 이원적 지각을 다루는 방식은 임제 스님이 제자를 가르쳤던 ‘사요간’이라 불리는 4가지 방법 가운데 하나인 주체로서 ‘나’도 죽이고 객체로서 ‘너’도 죽이는 기법이 효과적이지 않을까 짐작해 본다. 참고로 자아중심적인 ‘나’는 죽이고 대상중심적인 ‘너’는 살리는 타자중심의 치유법이 어떨까 궁금해 하는 이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수라의 마음은 극도의 자아몰입적인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인적 생각이지
아수라의 정신세계 또한 쵸감트룽빠 린포체와 마크 엡스타인의 견해를 빌려서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쵸감 트룽빠 린포체는 아수라의 정신세계에서 가장 특징적인 성향을 편집증 또는 망상증으로 보았다. 이를테면 아수라의 마인드에 있는 사람은 타인이 자기를 도와주려고 하면, 상대방의 행동이 자기를 억압하거나 아니면 자기 영역을 침범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반대로 자기를 돕지 않으면 자신의 편안만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상대를 매도한다. 만일 상황에 따라서 돕기도 하고 돕지 않기도 하면 상대방이 자기하고 게임을 한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아수라의 심리상태는 말 그대로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모를 정도로 머리가 정신없이 굴러가고 어수선하며 안정감과 일관성이 없다. 아수라의 정신세계는 또한 보통의 사람들
마음치유의 관점에서 불법을 공부하면 할수록 참으로 절묘하고 수승하다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특히 마음이 아프면 몸도 아프다는 진리를 부처님께서는 이미 2500년 전에 간파하셨지만 서양의학은 극히 최근에 와서야 비로소 그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몸과 마음을 분리하는 이원성에 바탕을 둔 서양의 정신의학은 마음의 문제는 마음으로만 풀려고 했기 때문에 심리치료가 오랫동안 말을 통한 만남에 국한돼 왔다. 반면에 몸과 마음을 하나로 보는 일원성에 바탕을 둔 불교의 마음치료는 말에 치우치지 않고, 몸과 말, 생각의 신구의 삼업의 실천을 통한 치유를 강조한다. 행동, 말, 생각의 통합적 변화와 성장을 추구한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불교는 완전한 치유를 목적으로 한다는 의미다. 그런데 인간계에서 겪는 고통에는 두 종류가
지난 호에서 인간영역이 안고 있는 고통의 근원을 심리치유적 관점에서 탐색해 보았다. 즉 인간계의 정신세계는 행복을 추구하지만 행복하지 못하고, 자기개발과 성취를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고 애쓰면서도 얻어진 조건에 만족하지 못하고, 자기가 진짜 누구인지 쉬지 않고 질문하고 답을 구하지만 항상 자기에 대해서 착각하는 모순 속에서 희망과 좌절, 즐거움과 괴로움의 파도에 휩쓸려 표류하는 것이 그 특징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러한 인간적 고뇌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까? 우리들 대부분은 이미 정답을 알고 있다. 아집, 아상을 버리면 된다. 문제는 그 아집을 어떻게 버리느냐는 것이다. 아무리 애쓰고, 또 애써도 “나”라는 생각, 관념은 사라지지 않는데. 마치 가지를 치면 더욱더 무성하게 자라나는 나무들처럼,
지난 호에서 인간계는 행복을 창조하려는 열정과 갈망이 지식, 꿈, 계획, 아이디어를 끊임없이 추구하는 지적활동으로 드러난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주어진 상황이나 조건에 만족하지 못하고 자아에 대한 추구, 즉 진짜 자기를 찾아서 계속적으로 방황하며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이 인간계의 특징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인간의 마인드로부터 우리는 어떻게 해방될 수 있을까 하는 현실적인 문제해결이 절실하다. 왜냐하면 육도 가운데 인간계만큼 행복을 추구하지만 행복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노력하고 애쓰지만 만족할 수 없고, 자기가 진짜 누구인지 쉬지 않고 질문하고 답을 구하지만 결코 자기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모순 속에서 희망과 좌절, 즐거움과 괴로움의 갈등 속에서 번민하고 괴로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고 보면 육
쵸감트룽파 린포체는 인간계의 주된 특징으로 열정, 또는 갈망을 꼽았다. 그리고 그 열정과 갈망은 행복을 추구하는 논리적 이성적 마음작용과 관련되어 있다고 보았다. 그런데 사실 우리 인간이 행복을 갈망하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다만 인간계의 정신세계에는 오직 즐거운 대상만이 편안과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다고 느끼는 무의식적인 믿음이 문제일 뿐이다. 그렇다고 그 즐거운 대상을 향한 매력에 완전히 오래 만족하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그 즐거움의 대상을 자기 영역 안으로 끌어들이고자 하기 때문이다. 인간계에서 즐거움의 대상을 끌어당기려는 마음작용은 아수라에서 이루어지는 것과 다르다. 인간계에서는 대상을 끌어들이는 에너지가 고도로 선택적이고 안달복달할 만큼 열정적인데 반해 아수라 영역은 끌어당기는 힘이 선택적
우리가 어떻게 축생의 마인드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지, 이번 호에서는 동물적 무지를 축생계의 주된 특징으로 본 쵸감 트룽파 린포체의 견해를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이미 알고 있듯이 축생마인드의 특징은 남들이 자기를 어떻게 보는지에 대해서 일차적으로 무지하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스타일을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보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의 모습이 타인들의 눈에 어떻게 비추어지는지 아무런 아이디어가 없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의 행위에 의해서 누가 어떻게 상처받고 다치는지, 어떤 가치들이 파괴되던지 크게 상관치 아니하고 무조건 자기 앞만 보고 나아간다. 그들에게는 인간계의 주된 고민들, 인간존재로서의 실존적 한계와 의문, 가치들이 무의미하고 오히려 소모적이고 한심해 보일는지도 모른다. 알다시피 축생계에 나타
지난 호에서 동물적 무지와 성욕구를 특징으로 하는 축생의 정신세계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우리는 그와 같은 축생의 마인드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우선 정신분석적 입장에서 축생계의 주된 특징을 성욕구로 본 마크 엡스타인의 견해를 살펴보자. 프로이드는 인간이 성욕과 같은 동물적 욕구를 극복하고 인격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보다 바람직한 방향으로 변형시켜 나아가는 것을 ‘승화’라고 표현한다. 왜냐하면 성욕과 같은 괘락적인 감각은 결코 충족되어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감각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것으로는 인간의 궁극적인 행복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욕망을 무조건 억압하고 무시하는 것으로도 인간의 동물적 속성은 없어지지 않는다. 욕망은 강제로 억압하면 할수록 더욱 강해져 무
불교의 가르침에서 축생계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어리석음이고 그것의 대표적인 동물로는 주로 돼지가 등장한다. 축생계에서 어리석음은 우리가 흔히 탐진치 삼독에서 말하는 연기법, 인연법을 모르는 그런 본질적인 무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육도를 윤회하는 근본 이유가 연기법을 알지 못하는 무지 때문이며, 육도를 벗어나는 길 또한 연기법을 깨달아야만 된다는 사실을 상기해보면 그러한 무지가 축생계만의 특징으로 부각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금방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축생계에서 의미하는 어리석음은 무엇인지 쵸감 트룽파 린포체의 말을 빌려서 설명해 보자. 그에 의하면 우리는 모두 제각기 먹고 자고 걷고 행동하는 스타일이 있는데 남이 자기를 어떻게 보는지 알지 못하고, 스스로도 자신이 행위 하는 방식을 알지
아귀의 지칠 줄 모르는 허기증과 갈망을 다루는 전통적 방식 가운데 하나가 부정관이다. 원래 부정관은 주로 감각적 욕망에 대한 집착을 끊기 위한 방편으로 대상이 늙고 병들어 썩고 백골이 되는 과정을 해부학적으로 관찰하는 방법이다. 그런데 부정관을 통한 수행은 자칫하면 갈망하는 대상만이 아니라 자신을 포함해서 다른 모든 이들을 향해 그들이 더럽고 추하다는 부정적인 느낌과 생각으로 전이될 위험이 너무나 크다. 그 결과 흔히 “어차피 죽으면 썩어 없어질 이 몸뚱아리….”라는 식으로 몸을 함부로 대했던 수행의 잔재들이 지금까지도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산재해 있다. 어쩌면 수행과정에서 감각적 욕망을 제어하는데 상대적으로 더 많은 어려움을 겪는 남자들이 부정관을 통해 욕망의 대상인 여자를 함부로 대하고 업신여긴 나머지
아귀의 심리적 특징은 허기다. 지칠 줄 모르는 갈망과 채워지지 않는 결핍감이다. 그 원인을 심리학적 이론에서 찾아본다면 어린시기에 정상적이고 건강한 성장과 발달을 위해 필요한 기본적인 사랑과 돌봄이 부족했기 때문에 그것을 갈망하는 마음의 상태가 습관적인 에너지, 패턴으로 굳어져버린 것이다. 지구상에서 인간만큼 스스로를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데 긴 시간을 필요로 하는 존재는 없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는 생존을 위해 누군가에게 의존해야 하기 때문에 어려서 돌봄과 사랑을 받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삶을 위한 필수조건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다른 생명체들에 비해 살아남기 위해서 상대적으로 더 긴 시간을 더 많이, 그리고 더 필사적으로 요구하고 갈망할 수밖에 없는 운명적 존재인지도 모른다.
육도 가운데 아마 가장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는 것이 아귀도일 것이다. 바짝 마른 사지와 잔뜩 부풀어 오른 배에 비해 가느다란 목구멍을 가진 유령 같은 형상을 한 아귀들은 자신들의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엄청난 고통에 시달린다. 바늘구멍같이 가늘고 좁다란 목구멍으로 과거생생 누적된 태산 같은 욕망의 배를 채운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육도를 정신분석학적으로 설명한 마크 엡스타인은 아귀들의 모습을 지칠 줄 모르는 인간의 끝없는 욕망에 비유했다. 한편 쵸감 트룽파 린포체는 아귀도의 특징을 끊임없이 확장하고, 부자를 원하고, 소비에 몰두하면서도 계속적으로 궁핍함을 느끼는 모습으로 묘사했다. 즉 어린 시절에 결핍되고 좌절되었던 욕구들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성인이 되서도 과거의 불만족을 충족시키고자 집착하는 인간의
지난 호에서 자비심을 배양하기 위해서 자비의 감정을 가장 쉽게 불러일으킬 수 있는 가족, 사랑하는 사람을 제일먼저 떠올리고 그들의 행복과 평화, 안전, 건강 등을 기원하는 방법을 소개했다. 그런 다음에 점차로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 중립적인 느낌의 대상들을 향한 기도로 이동한다. 이때 사람만이 아니라 살아있는 모든 생명들과 무생물, 자연과 우주 전체를 대상으로 삼고 그들의 안전과 평화, 웰빙을 기원하는 기도를 보낸다. 마지막에는 자비심을 베풀기에 가장 어려운 상대들, 싫어하고 혐오하는 대상을 향해 그들의 행복을 기원하고,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기를 기원하는 마음을 훈련한다. 그런데 실제로 자비명상 수행 프로그램에서 보면 어떤 이들은 사랑하는 대상을 향해 자비심을 일으키는데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있다. 특
지난 호에서 이미 설명했듯이 화는 상대를 공격하면 할수록 더 큰 저항과 공격에 직면하게 되는 심리상태다. 이는 화가 화를 불러일으키는 악순환상태이기 때문에 화가 나는 상대를 향해 공격성을 드러내는 것으로는 자신의 고통을 제거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때의 화는 자신의 내면에서 치밀어 올라오는 것이기 때문에 상대방을 공격한다고 해서 화의 감정이 근본적으로 제거되지 않기 때문이다. 화가 많은 사람들은 화의 원인이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화의 원인이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해도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그들은 정말로 화를 내고 싶지 않지만 시시때때로 치밀어 올라오는 화를 자기 자신도 어쩌지 못하고 분노의 감정에 휘말리기 때문이다. 그 결과 자기는 화를 내고 싶지
지옥은 흔히 불 속이나 끓는 기름 속에서 고통을 받거나 굶주린 동물에 의해 사지가 뜯기는 고통과 같은 이미지로 그려진다. 심리학적으로 보면 공격성과 불안, 공포에 의한 고통이 지옥에 해당된다. 그 가운데서도 성난 불길처럼 화(anger)로 가득 차서 이글거리고 활활 타오르는 공격성의 심리상태다. 공격성의 대상은 타자나 자기 자신을 향한 멈추지 않는 분노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에 대해 쵸감 트룽빠 린포체는 “공격성에는 끝이 없는 혼란과 불확실성이 함께 있는데, 왜냐하면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전체를 공격성으로 물들이고, 마침내 그 환경이 다시 자신을 공격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마치 뜨거운 한 여름에 아스팔트 위를 걸어가는 것과 같아서 땀이 공기에 식혀지면서 잠시 잠깐 괜찮은 듯하다가도 계속적
불교수행의 궁극적 목표는 생사해탈, 즉 삶과 죽음의 순환고리로 부터의 해방이다.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반드시 태어남과 죽음을 반복하는 윤회의 세계를 돌게 되어 있는데 그 세계를 지옥, 축생, 아귀, 인간, 아수라, 천상의 6곳으로 분류하기 때문에 육도윤회라고 부른다. 육도윤회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고통이다. 그래서 불교의 일차적 목적은 우리들로 하여금 윤회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을 가르치는데 있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방법으로 윤회의 근본 원인이 우리가 탐진치 삼독에 중독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삼독을 해독하는 방식으로 사성제, 팔정도, 12연기 등 다양한 방법을 가르쳐 준다.그런데 우리 가운데 어떤 이들은 자신이 삼독에 중독되어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인정하지 않거나 알지 못하기도 하고
지난 호에서는 명색의 단계에서 사심사관(四尋伺觀) 훈련, 즉 감각과 인식대상이 가지고 있는 이름(名), 그 이름과 연합된 의미(義), 본질(自性), 그리고 현상적 차이(差別)를 분석하고 자각하는 작업을 알아봤다. 이를 통해서 우리가 집착하는 정신적 물질적 대상으로부터 보다 자유로울 수 있다고 했다. 사심사관 수행은 유식 5위 수행에서 두 번째 단계로 첫 번째 단계에서 이루어지는 6바라밀과 37조도법, 그리고 사섭법과 사무량심 훈련을 바탕으로 깨달음을 향해 본격적으로 노력하는 단계다. 이를테면 사심사관 훈련은 말이나 행동으로는 모든 것으로부터 초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무의식 수준에서는 마음이 계속해 대상에 메이고 집착하는 경우나, 아니면 말로만 부질없다고 하면서 행동과 생각으로는 대상을 쫓고 있기 때문에 내면
지난 호에서는 12연기의 열두 고리 (①무명-②행-③식-④명색-⑤육입-⑥촉-⑦수-⑧애-⑨취-⑩유-⑪생-⑫노사) 가운데 번뇌가 극심한 ⑧갈애를 기준점으로 삼고 고통이 발생하고 순환하는 고리를 끊어낼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 보았다. 이번에는 망상이 극심한 ⑤육입을 중심으로 탐색해보고자 한다. 육입은 눈, 귀, 코, 혀, 몸의 다섯 가지 감각기관과 마음을 의미한다. 이들이 각각 감각/인식대상인 색성향미촉법을 만나면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느낌이 발생한다. 그런데 다섯 가지 감각기관과 마음이 각각의 대상과 부딪치는 과정이 인연 따라 자연스럽게 이루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대상에 부여된 의미, 가치 또한 실제가 아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안이비설신의가 앞의 단계인 ④명색에 의해 오염되었다는 의미다. 그 결과 다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