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태함을 경책하는 정진의 시간 불일증휘(佛日增輝). 1997년 일타 스님이 입적하기 전 소설가 정찬주 씨에게 건넨 친필 휘호다. ‘부처님 지혜를 더 밝게 퍼뜨리고 빛내라’는 스님의 당부. 성철 스님 일대기를 그린 그의『산은 산 물은 물』을 보기라도 한 것일까. 절절하고 치열했던 고승들의 구도 일상을 글로써 담고자 하는 그의 열망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것일까. 휘호는 등골이 서늘해진 그의 가슴에 단박에 성성한 화두로 남았다. 궁금했다. 오른손이 뭉툭한 스님, 부처님 법대로 옳은 중노릇을 하고자 붕대를 감은 손에 불을 붙인 스님, 칠흑 같은 세상에 불을 밝히는 심정으로 성냥을 그은 일타 스님을 글로 그려내고자 했던 소설가 정찬주 씨. 1년 넘게 일타 스님의 세연을 좇은 그에게 일타 스님과 소설 ‘인연’은 어
진실한 말로 내 그대들에게 전별을 고하노라 파도가 심하면 달이 나타나기 어렵고 방이 그윽하면 등불이 더욱 빛나도다 그대들에게 마음 닦기를 간절히 권하노니 감로장을 기울어지게 하지 말지니라. 제 14장 인연‘나는 본래 전생의 업이 무겁고 복이 가벼운 가난한 중이었으며, 금생 이 세상에서도 인연업법(因緣業法)을 역시 잘 다스리지 못하였다. 다만 일념으로 시방(十方)을 꿰뚫으려 하였으나 이 관문도 꿰뚫지 못하였으니 늙은 이때 마음먹은 일을 어찌 기대하겠는가. 죽음의 왕이 출동함에 병(病)의 신하가 항상 따라다님을 어찌할 수 없지만 일심(一心)의 영대(靈臺)만은 잊거나 잃지 않고 간직하고 있다. 나는 본시 일필지록(一匹之鹿)
“온산의 단풍이 불꽃보다 고우니“삼라만상이 그 바탕을 온통 드러내는구나“생도 공하고 사도 또한 공하니“부처의 해인삼매 중에 미소 지으며 가노라.” 제 14장 인연일타는 문수사 신도에게 『조선불교통사』에 기록된 균여대사의 얘기를 하고 있었다.고려 초기의 일로 김해 나루터에 큰 삿갓을 쓴 한 대사가 어디론가 떠나려고 왔다갔다 서성이고 있었다. 마침 김해 목사가 나루터에 당도하여 범상치 않은 그 대사를 보고 물었다.“어디 계시는 대사님이오.” 대사가 지팡이로 바다 건너 일본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소승은 과거세의 비바시불 당시에 맺은 인연으로 잠시 고려국에 와 있었소. 이제 인연이 다하여 저 바다로 건너가고자 하오.”“바다 건너라면 왜국으로 가시겠다는 것입니까.” 그러나 김해 목사는 더 이상 대사와 얘기를
다음 생에서도 수행자로태어나 대오(大悟)를 이룸이 옳지 않겠느냐.그리하여 석가모니부처님처럼이 세상의 모든 중생을제도하는 것이 대장부의길이 아니겠느냐. 제 14장 인연일타는 입적하기 몇 년 전, 은해사를 청정한 율도량으로 정화하라는 총무원의 요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주지 발령을 받은 이후부터 제자들에게 자주 ‘세상과의 인연(世緣)’이 다해가고 있음을 담담하게 얘기하곤 했다. 종합검진을 해온 국내의 의사가 일타에게 이번 기회에 간질환을 근치(根治)하자고 설득해도 일타는 자신의 죽음을 이미 예감하고 있었기 때문에 초연할 뿐이었다. 일타의 게송을 듣게 된 의사는 과연 고승이구나 하고 감탄했다. 病不能殺人藥不能活人병이 사람을 능히 죽이는 것도 아니요약이 능히 사람을 살리는 것도 아니
“산하대지와 사생고락(死生苦樂)이 내 마음의 조작이라. “콩 심어 콩이 나고 팥 뿌려 팥 거두니, “인과응보가 몸 가는 데 그림자요. 소리에 울림이라.” 제 13장 회향 고명인은 찻집으로 다시 들어와 앉았지만 좀 전에 만났던 혜국과 대원성 보살이 마치 전생에 스쳤던 인연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듯한 기분도 들었다. 그들에게 들었던 얘기들이 고명인의 머릿속을 헤집고 다니는 것만 같았다. 고명인은 잠시 몽롱했던 기분을 떨쳐버리고 싶어 차를 다시 우려내 마셨다. 그러나 차 맛과 향은 너무 우린 탓인지 나지 않았다. 찻집 아가씨가 눈치를 채고 말했다. “차를 좀 더 드릴까요.”“네.”“송광사에서 묵으실 모양인가 봐요.”“아닙니다. 떠날 겁니다.”“마치 송
종교는 인간이 우주의 진리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 길에서 우리는 자신의 믿음과 다른 이름을 가진 이웃 종교인들을 만나곤 한다. 그들은 스스로의 신념으로 인해 때로는 적이 되기도, 때로는 아주 좋은 친구가 되기도 한다. 신년특집 ‘불교를 사랑하는 이웃종교인들’은 다른 종교의 성직자로서 불교인들과 깊은 소통을 나눈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찾아가는 진정한 세계를 생각해보기 위해 마련된 기획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종교는 타인과 나를 구분하는 장애물이 아니라, 우리의 본질과 내 안의 진리를 밝히기 위한 구도 수단이자, 영혼을 키우는 바다다. 편집자 주 다른 종교 이해하면 내 종교 더 풍성해져 개신교 김 경 재 목사 1996년 화계사에서 세 번의 불이 났다. 광신적 개신
옛 성인의 자취를 좇아 생각하니 追念古聖蹟이 아자방에서 큰 기틀을 얻었으매 於此得大機나도 여기에서 묵언정진하며 我欲默無言남은 해를 여여하게 보내리라. 殘年度如如 제 13장 회향 마침내 일타는 1972년 10월에 소승불교 국가인 태국으로 먼저 들어갔다. 그런 다음 미얀마로 향했고, 미얀마에서 네팔로 향했다. 그리고 네팔의 룸비니에서 인도로 들어가 불교 성지를 샅샅이 순례하는 동안 일타는 오대산 적멸보궁에서 연비할 때 ‘부처님 법을 통하여 신심을 완전히 결정짓겠나이다’라고 발원했던 그 마음을 다시 냈다. 일타는 부처님의 열반상이 안치된 쿠시나가라 열반당에 들어가서는 통곡하는 티베트 여인들을 보았다. 열반당 입구에는 부처님이 열반하려 하시자 아난존자가 붙들고 울었다는 사
제 13장 회향 흰 구름을 무심히 바라보던 혜국이 ‘여기를 보십시오’ 하고는 마루 판자를 가리켰다. 그러나 풀 먹인 잿빛 가사처럼 깔깔한 마루 판자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오후의 부드러운 햇살 한 자락이 내려앉아 있을 뿐, 마루 판자는 얼룩 하나 없이 말끔했다. “스님, 무엇을 보라는 말입니까.”“전 이 마루 판자를 볼 때마다 소름이 돋곤 합니다.” 불현듯 혜국은 마루 판자를 통해서 무엇이 전광석화처럼 떠오른 듯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요사 저쪽에서 60대 중반으로 보이는 보살이 젊은 스님의 안내를 받아 걸어오고 있었다. 보살을 본 혜국은 토방으로 내려섰다. 잘 아는 보살이 분명했다.“시님, 죄송합니더. 고속도로에서 농민들이 길을 막고 데모를 하는 바람에 늦었십니더.”“보살님, 저도 방금 왔습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닌 너는 어디서 주워 왔노.”“저를 속이지 말고 스님 살림살이를 내보이십시오.”“이놈 보그래이. 덕산탁발화(德山托鉢話)를 일러라.” 제 13장 회향 고명인은 송광사 일주문 밖에 차를 세웠다. 혜국은 자신을 송광사까지 태워다 준 고명인에게 미안했던지 소리 없이 웃으며 말했다. “이왕 왔으니 제가 송광사를 구경시켜드리겠습니다.”“스님, 저는 송광사를 보러 온 것은 아닙니다.” 고명인은 송광사보다는 태백산 도솔암으로 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도솔암으로 가서 단 며칠만이라도 참선을 해본 뒤 미국으로 돌아갈 계획이었다. “고 선생, 그렇다 하더라도 송광사는 우리나라 삼보사찰 중 하나입니다. 법당에 들러 참배를 하십시오. 향을 사르고 절을 하는 것도 좋은 인연을 맺는 일입니다. 복 짓
“수행자라면 모름지기 참선과 불학, 염불, 기도 등 불가의모든 방편이 한데 어우러진 화엄의 바다가 돼야 하네. 그게 연극 같은 인생 멋들어지게 사는 일이 아니겠나.” 제 12장 보살의 길 혜국은 차를 한 잔 더 마신 뒤 잠시 눈을 감았다. 그러더니 일타가 화엄사를 떠나 해인사로 간 얘기까지 마저 했다. “화엄사 하안거를 마친 우리 스님께서는 해인사 퇴설당으로 갔지요. 당시는 퇴설당이 선방이었거든요. 거기서 지월스님, 서옹스님을 모시고 2년 정도 정진하셨지요. 그런데 우리 스님을 조계종에서 놔주지 않았지요. 1962년 4월에 정화대책 중앙종회비상종회의원으로 발탁해 율장 부분을 담당케 했지요. 그런 뒤 그해 8월에는 정식으로 조계종 초대 중앙종회의원으로 선출됐고 더불어 교육위원, 감찰위원,
“잠이 완전히 푹 들었을 때 어느 곳에서 안심입명 합니까.”“안심입명을 애써 구할 필요가 있겠는가. 자네가 앉은 자리에“바로 그것이 있으니 말이네.” 제 12장 보살의 길 방광의 이적을 보인 일타는 화엄사 선방에 하안거 방부를 들였다. 화엄사는 쌍계사와 달리 비구 대처 간의 시비가 전혀 없었다. 관광객이 드문드문 들르지만 수행하기에 아주 조용하고 기운이 좋았다. 더구나 선방으로 운용되는 구층암은 대웅전 바로 뒤 백여 걸음 떨어진 곳에 있는 암자인데도 경내와 달리 깊은 산중처럼 적막했다. 구층암의 천불전이나 요사채도 대웅전처럼 4백여 년 된 건물이었다. 그러니 구층암 선방은 스님들이 기거하는 단순한 방이 아니라 지리산 산신령이 드나들고 조왕신이 상주하는 신령한 공간이었다. 구층암 선방 너머로는 지리산
“시비가 회오리바람처럼 일수록 수행자는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야 한다. 내가 맑아지면 도량이 맑아져 삼세제불의 ‘가피가 깃들고 신장들의 외호가 들어설 것이다.” 고명인은 오고 감이 자유로운 스님들의 문화를 절에 드나들면서 뒤늦게 이해했다. 스님들은 세속적인 약속의 굴레에서 벗어나 도 닦는 인연 따라 오고 갈 뿐이었다. 고명인은 미국에서 돌아오자마자 혜각을 만나러 해인사로 갔지만 스님은 벌써 포교국장 소임을 그만두고 다른 절로 가고 없었다. 종무소의 한 스님 말에 의하면 야밤에 도망치듯 지리산 화엄사 선방으로 간 모양이었다. 고명인은 어디로 갈까 망설이다 결국은 지리산 화엄사로 갔다. 자신의 사정으로 급히 미국으로 돌아가는 바람에 혜각과 함께 일타의 유적지를 돌다가 중도에 포기했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혜각
정찬주 장편소설 삽화·송영방 “몇 번이나 청산에 꽃이 피었다 졌다 하는 것을 보았느냐봄이 아니면 꽃이 피지 않는다고 말하지 말라고개를 한번 돌아보니 천지가 눈꽃으로 희어버렸더라.” 1957년. 석남사 주지를 맡게 된 인홍은 홍제사를 떠났다. 홍제사 비구니 대중도 뿔뿔이 흩어졌다. 대중 중에 현각과 불필 등은 인홍을 따라 석남사로 갔고, 나머지 비구니는 각자 인연 따라 다른 절을 찾아 갔다. 홍제사는 잠시 비었지만 곧 태백산 기운과 산세를 좋아하는 비구들이 대여섯 명 들어와서 대중을 이루었다. 법전이 ‘따로 살지 말고 모여 살자’고 제의하여 서암, 지유, 석주 등이 흩어져 수행하다가 홍제사로 들어왔던 것이다. 일타는 도솔암에 그대로 있으려고 했지만 법전이 도솔암까지 올라와 홍제사로 내려오기
정찬주 장편소설 삽화·송영방 “의식적으로 화두를 들 것도 없었다. 차를 마시면 자신이차가 되고, 밥을 보면 자신이 밥이 되고, 암자를 스치는바람소리를 들으면 자신이 바람소리가 되었다.” 도솔암 주위도 봄이 무르익고 있었다. 암자 마당가 한쪽에 자라난 모란의 꽃봉오리들이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봄볕을 받는 밭뙈기에서는 아지랑이가 모락모락 피워 올랐고, 산비탈에 자생하는 산복숭아 꽃도 만개하여 붉은 빛깔을 흘리고 있었다. 일타는 암자 옆에 있는 단샘(甘泉)으로 나가 찬물을 떠와 끓이지 않고 녹차 잎을 띄워 우려 마셨다. 그래도 차 맛과 향은 식도를 타고 온몸으로 퍼졌고 성성한 화두까지 적셨다. 며칠째 일타의 몸과 화두는 한 몸이 되어 있었다. 몽중일여(夢中一如). 좌선하는 동안 꾸벅 존 뒤
“부지런히 정진하라. 우리 마음이 게을러 정진을 쉬면나무끼리 비벼 불씨를 얻고자 할 때 나무가 달궈지기도전에 그만두는 것과 같아 끝내 불씨를 얻지 못한다.” 일타는 수행 장소를 벗어나지 않는 동구불출(洞口不出)의 원칙을 깨트리지 않기 위해 마을로 탁발을 나가지 않았다.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 암자에서 사방 40리 밖에 있었으므로 동구불출을 지키려면 탁발을 나갈 수 없었다. 물론 10리 터울로 화전민 농가가 한 채 한 채 있긴 했지만 그 집들은 오히려 일타가 도와주어야 할 만큼 어렵게 사는 곤궁한 화전민들이었다. 일타가 갈 수 있는 데는 홍제사까지 뿐이었다. 도솔암은 홍제사의 산내암자일뿐더러 양식이 떨어지면 홍제사로 가서 걸망에 넣어오거나 홍제사 비구니스님들이 가져다주기도 했다. 그렇다고 홍제사 살
“스님은 왜 빈 암자를 가시려고 합니까.”“죽을 각오로 정진하고 싶어서 그럽니다.”“스님, 가지 마십시오. 어찌 사시려고 들어가십니까.”“죽기를 각오한 사람에게 무슨 장애가 있겠습니까.” 일타는 봉화읍에 도착하자마자 멍석에 약초를 펴놓고 파는 허름한 약초가게에 들러 도솔암 가는 길을 물었다. 마침 약초가게 주인은 봉화군 소천면 홍점골 출신이었다. 가게 주인 역시 6.25 전쟁 중에 홍점골에서 읍으로 이사한 약초꾼이었다. “홍제사 밑 홍점골에서 살았지요. 스님, 도솔암은 홍제사에서도 10리 계곡을 올라가야 합니다. 가파른 계곡에는 길이 없습니다. 바윗돌에 난 희미한 발자국을 따라 올라가야 도솔암에 이릅니다.”“처사님, 도솔암에는 스님이 몇 분이나 계십니까.”“비구니스님이 한두 분 계셨는데 아마 지금은 안
“저는 중노릇만 하겠습니다. 제 정화불사는 따로 있습니다.”“허허, 그것이 무엇인고.”“마음속에 번뇌 망상을 지워 제가 청정해 지는 것입니다 .” 연비를 한 일타는 조금도 후유증을 겪지 않았다. 서울대병원에서 치료를 받기 시작한 지 한 달이 되자 말끔하게 완치가 됐다. 초가을부터는 연비한 손으로 글씨를 쓸 수 있었다. 일타는 엄지와 손바닥 사이에 붓을 끼워 글씨를 연습했다. 아침저녁으로 산들바람이 불어와 선학원 마당에는 느티나무 낙엽이 쌓였다. 일타는 마당을 쓸며 밥값을 했다. 고승들이 그러한 일타를 보고 칭찬하곤 했다. 일타의 연비를 모두 장하게 여겨 주었다. 선학원은 늘 대중이 많았고, 전국의 여느 절보다 양식과 먹을거리가 풍족했다. 승속을 불문하고 어디나 전후의 가난을 면치 못했는데 선학원만큼
정찬주 장편소설 삽화·송영방 “일타는 걸망을 메고 서대 염불암을 떠났다.운수납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다 하고 구름이듯 물이듯 어디론가 흘러갈 뿐이었다.” 마가목차를 한 사발 들이키자 신기하게도 오른 팔의 통증이 차츰 멎었다. 실제로 차의 약효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일타는 연비한 오른손의 고통을 잠시 잊었다. 일타는 부엌으로 가 아침공양을 준비했다. 지금까지는 매일 새벽에 상원사로 내려가 죽을 먹어왔으나 오대산에서의 정진도 마지막 날이라는 생각이 들어 서대 염불암에서 아침공양을 하고 싶었다. 늦어도 아침공양 후에는 서대 염불암을 떠나야 했다. 연비한 손가락을 그대로 두면 염증이 생겨 오른손이 곪아 들어가므로 오늘 중으로 병원으로 가서 소독을 해야 했다. 아침 햇살로 오른손가락을 살
“옳은 중노릇을 하기 위해 연비하려 합니다. 법을 따르는 결정심을 갖고자 연비하려 합니다. 숙세 업장을 없애기 위해 연비하려 합니다.” 서대 염불암은 참나무 껍질로 지붕을 얼기설기 덮은 너와집 암자인데, 겉모양만 봐서는 화전민들이 밭뙈기를 찾아 임시로 지은 움막 같았다. 그러나 서대 염불암을 창건한 연대는 수 백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조선 초기의 문신 권근의 수정암 중창기가 발견됨으로 해서 서대 염불암이 한때는 수정암으로 불렸던 사실도 밝혀졌던 것이다. 서대 염불암의 성소(聖所)는 우통수라는 샘이었다. 우통수는 암자 수행자들에게는 감로의 샘인 동시에 남한강 발원지로서 기호지방 중생들에게는 생명의 젖줄이었다. 우통수에서 흐른 물 한 줄기가 수많은 골짜기 물과 합수하여 마침내 남한강이 되기 때문이었다
정찬주 장편소설 삽화·송영방 “스님, 적멸보궁으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합니까.”“찾을 게 뭐 있는가.”“가르쳐주십시오.”“그대가 서 있는 곳이 바로 적멸보궁이네.” 일타는 오대산으로 갔다. 강원도 원주까지는 기차를 탔고, 또 진부까지는 버스를 탔다. 버스 안에는 승객의 요금표가 붙어 있었다. 군인 5원, 학생 5원, 일반 15원이라고 쓰인 요금표였다. 일타는 요금표를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농담 잘하는 도성이 생각나서였다. 언젠가 함께 버스를 타고 가는데 도성이 일타를 웃겼던 것이다. 도성이 차장을 불렀다. “차장!”“네.”“나는 버스요금 안 내도 되지.”“왜 그렇습니까.”“요금표에 스님 요금은 쓰여 있지 않으니까!”“당연히 일반 요금을 내셔야죠.”“내가 학생인가, 일반인가, 군인인가, 중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