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에 소로의 ‘숲속의 생’ 한국어판 출간을 청하기도 했다. 서울 봉은사 다래헌을 떠나 불일암으로 내려온 법정은 앉은뱅이책상에 앉아 책 읽고 글 쓰고 ‘화엄경’을 번역했다. 창 옆에는 ‘선가귀감’ 중 자신이 직접 고른 “출가하여 중 되는 것이 어찌 작은 일이랴. 편하고 한가함을 구해서가 아니며 따뜻이 입고 배불리 먹으려고 한 것도 아니며 명예와 재물을 구해서도 아니다. 번뇌를 끊어 생사를 면하려는 것이고, 부처님의 지혜를 이어 끝없는 중생을 건지기 위해서이다”는 글귀가 적힌 가리개를 세워놓고 항상 스스로를 경책했다. 비 오는 어느 날인가는 무엇을 할까 생각하다가 소설이나 읽는 것이 제격이다 싶어 다락에 더듬더듬 올라가 니코스 카잔차스키의 ‘희랍인 조르
▲운허 스님이 추진한 ‘불교사전’ 편찬 작업에도 참여했다. 법정은 탑전에서 홀로 수행하다가 해인사로 갔다. 그곳에서 정진에 정진을 거듭하면서도 의문을 떨칠 수 없었다. “이것이 깨달음으로 가는 길인가. 이 길을 가기 위해 출가를 한 것인가. 선배들의 길 말고 나만의 길은 없는가”를 고민했다. 아침저녁으로 장경각에 올라 참회의 예불을 하면서 신심을 모았다. 방선 시간 포행도 장경각 둘레를 거니는 것으로 대신했다. 어느 날. 한 여인이 장경각 계단을 내려오면서 팔만대장경이 어디 있는지를 물었다. “방금 보고 내려온 것이 팔만대장경”이라고 하니, “못 봤다”고 한다. “선반 같은 곳에 가지런히 꽂힌 것”이라고 하니, “아, 빨래판 같은 것 말입니까”라고 되묻
▲구례장터에서 산 ‘주홍글씨’는 결국 불에 태웠다. 보통학교 때 등대지기를 동경했던 청년은 대학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왔다. 행랑채 골방으로 들어가 여행가방 속에 책부터 챙겼다. 어느 절로 가더라도 책 몇 권은 가져가려 했다. 청년도 전쟁 직후 불어닥친 영어 광풍에서 자유롭지 못했기에 일찌감치 ‘영어사전’ 한 권을 가방 속에 넣어두고 있었다. 나머지 책들은 행랑채 궤짝 속에 넣었다 꺼냈다를 수십 번 반복한 끝에 두 권을 정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 탐독했던 니시다 기타로의 ‘善의 연구’, 그리고 당시 국내 최고 문장가가 쓴 문고판 수필집이었다. 결국 서옹 스님이 추천해서 백양사 목포포교당인 정혜원에서 불교학생회 총무 일을 볼 때 구입했던 불교서적 가운
▲스님은 후학들에게 일반학문에도 관심을 가지라고 당부했다. 고암은 법문을 하고 보시를 받으면 경전을 인쇄하거나 염주 또는 단주를 사서 불자들에게 나눠줬다. 병든 스님들 병원비로 보태기도 했다. 시주의 무서움을 몸으로 보여준 것으로 늘상 단월의 시주를 잘못 쓰면 과보가 따른다는 점을 강조했다. 제자들에게도 불사를 할 때 설판제자가 되어 거금을 내겠다는 시주자가 텅빈 자리에서 시주하지 않으면 절대 받지 말라고 했다. 자칫 시주자나 시주를 받은 스님에게 애착심이 생겨나 스스로 인과의 고초를 받을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고암은 90세에 달하는 나이까지도 건장을 잘 유지했다. 그래서 동남아 11개국을 순례할 때도 자정이 지나면 일어나 2시간 동안 참선을 한 후,
▲ 스님은 출세간법보다 더 좋은 법은 없다고 강조했다. 고암은 출가사문이자 보살이다. 그렇기에 계율이 청정한 사문의 길을 가면서도 한 곳에 홀로 머물며 수행하는데 그치지 않고 민중과 호흡하는 데도 정성을 다했다. 특히 1945년부터 1954년까지 10여 년 동안은 제주도에 이르기까지 경향 각처에서 포교하고 보살계를 설했다. 그런 고암이 대중들을 대하면서 입버릇처럼 가르치던 법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한 물건’에 대한 것이었다. “네게 한 물건이 있으니 허공보다 더 비었고 우주보다 더 크고 일월보다도 더 밝다. 그 물건은 밥도 먹고 옷도 입고 다니며 일하고 말할 줄도 안다. 그 물건은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되 또한 안으로는 여러 가지 묘한 것을 머
▲스님은 후학들에게도 ‘금강경’을 배워 익힐것을 당부했다. “좋은 책들이 굉장히 많네요.”“자네가 볼 만한 책 있거든 몇 권이건 가지고 가시게.”열아홉에 출가한 이래 돈은 물론 책, 기타 물건 등에 이처럼 초탈했던 고암은 무소유, 무집착, 자비보살의 화현으로 한평생을 살았다. 그리고 그 덕화로 세 번이나 조계종 종정에 추대될 정도로 그 수행과 삶이 일여(一如)했던 선지식이다. 1899년 10월5일 경기 파주 적성면 식현리에서 태어난 그는 아홉 살 때부터 열두 살까지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고, 열여섯까지는 보통학교에서 공부했다. 그러나 공부해서 세간에 나가 명리를 떨치길 바라던 부모 마음과 달리 어려서부터 먼발치로 절을 바라보며 그곳에서 살아가는 삶을 동경
▲스님은 후학들에게 경학하는 자세를 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가야총림 방장으로 후학을 제접하며 선 수행에 매진할 것을 당부하던 효봉은 동화사에서도 ‘정혜쌍수’를 강조했다. 1958년 동화사 금당선원 상당법어에서는 “내 문하에서는 정혜쌍수(定慧雙修)를 주장한다. 정이란 모든 망상이 떨어진 것을 말한다. 정이 없이 얻는 혜는 건혜(마른 지혜)다. 옛날 달마 스님이 이조 혜가에게 처음으로 가르치기를 ‘밖으로 모든 반연을 끊고 안으로 헐떡거림이 없어 마음이 장벽과 같아야 도에 들어갈 수 있다’ 하였으니 이것이 입도요문(入道要門)”이라며 정과 혜를 함께 닦도록 주문했다. 그런 효봉도 불교정화 시절에 “큰 집이 무너지려 하니 여럿의
▲스님은 상당법어를 할 때에 경전을 인용하기도 했다. 효봉은 1년 6개월의 토굴생활 끝에 깨달음을 얻고 1932년 4월 부처님오신날에 유점사에서 동선(東宣) 화상을 계사로 구족계와 보살계를 수지했다. 이후 설악산 봉정암, 오대산 상원사 등 선원에서 한 철씩 정진하다 1937년 운수의 발길을 송광사에서 멈췄다. 효봉은 그곳 조계산 송광사 선원(禪院) 삼일암(三日庵)에서 조실로 10년을 머무르며 수많은 후학들의 눈을 밝혀주었다. 그리고 여기에서 정혜쌍수(定慧雙修)에 관한 확고한 인식을 갖추기도 했다. 그런 효봉은 송광사 선원 조실로 있으면서 근검절약과 청규적용을 엄격히 한 것으로 유명하다. 상좌 법정이 찬거리를 구하러 갔다가 10분 늦게 돌아오자 “오늘
▲스님은 12세에 사서삼경을 통달했다. 스스로 동구불출(洞口不出), 오후불식(午後不食), 장좌불와(長坐不臥), 묵언(默言)의 4가지 규약을 정하고 엄격히 지켰던 선사. ‘판사 출신 선사’, ‘절구통 수좌’, ‘통합종단 초대종정’ 등의 수식어가 따라붙는 근대 한국불교 고승 효봉(曉峰, 1888~1966)스님이다. 효봉은 1888년 5월28일 평남 양덕 쌍룡면 반석리 금성동에서 아버지 수안(遂安) 이 씨 병억(炳億)과 어머니 김 씨 사이에서 5남매 중 3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유달리 영특해 이웃은 물론 인근 동리에까지 신동으로 소문이 났다. 그리고 신동답게 12세에 이미 할아버지로부터 ‘사서삼경’을 배워 통달했다. 평생 선비로 산 할아버지 영향을 받아
▲스님은 자신의 행적에 글자 하나 남기지 않았다. 춘성은 선(禪) 수행 이후로 경전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았다. 그러나 법문을 할 때나 주변 사람들과 대화를 할 때 같은 이야기를 두 번 하지 않을 만큼 대화 소재가 무궁무진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아마도 선 수행 이전에 읽었던 경전이나, 젊은 시절 읽었던 문학전집 등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춘성은 젊은 시절에 문학전집을 많이 읽었다고 전해진다. 출가 은사 만해로부터 영향을 받았는지, 혹은 다른 계기로 문학의 광이 되었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호기심이 강하고 모르는 것이 나오면 그것을 알기 위해 필요한 책은 다 읽어야 직성이 풀렸던 과거 습관에서 나온 것으로 보는 이들도 있다. 춘성과 인연
▲스님은 물항아리 수행으로 수마를 조복받았다. 용성이 개최한 ‘화엄경 강의회’ 법석에 오르면서 화엄법사라는 별칭까지 얻었던 춘성은 세속 나이 40세에 이르러 덕숭산으로 만공을 찾아갔다. 여기서 ‘문자에 너무 밝아 화두를 줄 수 없다’는 만공의 말에 충격을 받은 춘성은 갖고 다니던 경전까지 모두 버리고 정혜사 능인선원 작은 방에 들어가 잠도 자지 않으면서 수행에 전념했다. 그렇게 만공 회상에서 정진하던 춘성은 1938년 만공을 떠나 독자적으로 수행하고자 수행처를 금강산 유점사로 옮겼다. 그곳에서 정진하던 춘성은 잠이 쏟아지자 수마(睡魔)를 조복받기 위한 극한의 방법으로 물 항아리 수행을 택했다. 법당 뒤에 큰 항아리를 묻고 물을 가득 채운 후 밤마다 물이
▲스님은 13세에 만해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춘성 선사/ 그는 아예 상좌 하나도 두지 않았다/ 이불 없이 살았다/ 하기야 절 뒤안에 항아리 묻어/ 거기 물 채워/ 물속에 들어가/ 머리 내놓고 졸음 쫓는/ 선정이니/ 기어이 수마를 모조리 내쫓아 버렸으니(…) -고은 ‘만인보’” 만해의 제자 춘성. 세간에 무애도인으로 알려져 있는 춘성 스님은 만해가 백담사에 주석하며 불교학을 연마하고 맹렬하게 책을 읽어가던 시절, 그의 시자로 불문에 들었다. 그리고 만해가 옥에 수감됐을 때는 서울로 올라와 망월사에 거처하며 서대문 감옥을 드나들면서 옥바라지를 했다. 이때 춘성은 추운 겨울에도 이불을 덮지 않은 채 차가운 방에서 참선하며 밤을 지새우기 일쑤였다. “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