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선원을 알기 전에는 마음공부를 하지 않았다. 신심 깊은 불자인 어머니를 따라 가끔 기도와 수행을 따라 했을 뿐이었다. 특별한 일이 있을 땐 108배, 철야 삼천배를 하기도 했다.가족 7남매 중 여섯번 째 여동생은 어렸을 때부터 참선을 자주했다. 어느 순간부터 큰 사찰의 보살선방에 들어가 30여 년간 하안거 동안거를 지내기 시작했다. 매일같이 선방에서 참선만 하고 있던 여동생이 “오빠도 마음공부 한번 해볼래?”라고 권유했다. 오래전부터 지켜보며 든 호기심에 같이 정진해보고 싶었지만, 무릎이 아파 가부좌를 틀지 못한다고 거절했다.
기초부터 시작해 불교대학, 불교대학원 전 과정을 밟으며, 초기경전 공부와 위빠사나 수행을 빠뜨리지 않고 지속해 나갔다. 평생을 ‘All or Nothing’의 사유 프레임에서 생각하고 행동했던 과거의 시간은 부처님의 자상한 가르침으로 ‘지금 여기’서 ‘나와 타인이 둘이 아님’을 관조하는 현재의 시간으로 대체됐다. 그 시간영역은 무한 확장돼 ‘부처님 닮아가기’로 변화하는 노정에 들어가고 있었다. 동시에 자비와 사랑, 이타심의 실천행을 위해 사찰에서 진행하는 다양한 자원봉사 활동도 이어가며 신행생활을 계속해 나갔다. ‘부처님처럼 생각하
“엄마, 너무 따갑고 가려워. 피도 계속 나. 언제까지 아프고 고생해야 해?”원인을 알 수 없는 알레르기로 인해 온 몸에 돋은 두드러기 발진은 시간이 흘러도 나아지질 않았다. 의사는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원인은 수백가지가 되며 그에 따라 약 처방도 천차만별”이라며 일시적으로 증상을 완화시키는 약만 처방해 줄 뿐이었다. 더 이상 어떤 약도 듣지 않는 상태에서 10살꼬마의 투정 대상은 늘 엄마였다. 그 투정이 안쓰러워 엄마가 선택한 일시적 방법은 ‘굵은 소금’이었다. 마당에 신문지를 넓게 펴고 그 위에 등을 구부리고 서면 엄마는 등에
21일 혹은 49일로 기도를 끊어서 계속 이어가고 있었는데 기도 초반에는 회향 날이 되면 이상하게 어딘가에서 꽃이 들어오곤 했다. 식물을 기를 때 선인장도 죽이는 마이너스의 손을 가진 내가 대충 물주는 난 화분이 갑자기 꽃을 피우고 게다가 두 개의 화분이 비슷한 시기에 난꽃을 피우는 일도 일어났다. 신기하고 감사했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신기한 현상에 마음두지 말고 그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묵묵히 기도하자’고 마음먹었다.천일기도 회향을 5개월 앞두고 있는 지금 여전히 규칙적으로 기도하고 있다. 초반에 스스로 자랑스러워 들떴던 마음
오늘도 새벽 3시에 알람이 울렸다. 따뜻한 잠자리에 미련이 남았지만 떨치고 일어났다. 조금 더 미적거리면 기도하기 좋은 시간이 아깝게 지나가 버리기 때문이다. 주말에는 좀 늦장을 부려 늦은 시간에 기도를 드리기도 하는데, 시간에 따라 기도의 느낌은 확실히 다르다. 인도의 어떤 구루는 새벽 3~4시경을 천신이 내려오는 시간이라 표현하기도 했는데, 실제 그 시간에 기도를 해보면 고요함의 깊이가 다른 듯하다. 내가 수행을 시작한 것은 3년 전부터이다. 그 이전에도 아침에 출근 전 간략하게 기도를 드리기는 했었으나 불교는 아니었다. 직장에
태국 아잔 차 스님 전통의 아잔 브람 스님의 제자이면서 테라와다의 비구니를 부활하는 데 큰 관심을 갖고 있던 반테 수자토 스님을 집 근처 커뮤니티 센터에서 만났다. 스님은 자애명상을 가르쳐 주셨고 일상적이거나 심리적인 다양한 질문들을 환영하며 초기불교적 관점으로 답해 주셨다. 내게는 너무나 큰 환희심으로 다가왔다.당시 대안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점심시간이 되면 밥도 대충 먹고 아이들을 피해 식탁 밑에 들어가 명상을 할 정도였다. 한 번은 너무 강렬한 환희심 때문에 잠도 못자고 몸 주변이 커다란 타이어 같은 것에 둘러쌓인 것 같
불교를 종교로 만난 건 아니었다. 나에게 불교는 현재의 삶을 내려놓는 해방감과 좋은 사람이 되는 즐거움을 알려주는 가이드로서 다가왔다.대학 3학년 때 심한 불면증이 찾아왔다. 당시에는 시험기간에 가방을 도난당하고 놀란 것이 시작이었는데 1년간 거의 잠을 못잤다. 마음을 돌볼 방법을 적극적으로 찾아다닐 수 밖에 없게 되었다. 당시 나는 심리학을 공부하고 있었기 때문에 심리치료에도 익숙한 편이었지만, 도움을 얻지 못했다. 6개월 정도 상담을 받고도 “선생님은 왜 저를 도와주려 하세요?”라는 질문을 해 상담사를 당황하게 했다. “모든 사
“꿈은 꿈일 뿐이다. 꿈 속에서 살면서 또 무슨 꿈얘기를 하는가?”20여년 전 열반한 서암 스님이 생전에 나의 질문을 듣고 일러주신 가르침이다.어린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부처님과 인연에 관한 암시는 글 몇 자 적는 것으로는 표현이 어렵다. 물론 무늬만 불자인 일반 대중의 행태를 나도 줄곧 반복해 왔다. 절에 가면 가끔 108배를 하거나, 부처님오신날에 절에 찾아가고, 경치 좋은 도량을 알아보는 것 등이었다. 세속에 사는 우리네들은 사방팔방이 감각적 욕망에 노출되어 있다. 특히 문명이 발달한 요즘의 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감각적 욕망의
‘두두물물(頭頭物物)’머리의 우측 상단부분에서 문자가 새겨지듯 어떤 유기체가 움직이는 것 같이 선명하게 각인되는 느낌이 찾아왔다. 그 다음은 이어지지 않았다. 8차선 대로와 인접된 길 어귀 보행 중에 일어난 현상이었다. 옆 사람과 큰 목소리로 대화를 해야만 들릴 수 있는 환경이었는데. 순간이었는지 아니면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몰라도 그것 외 일체의 인식이 사라진 현상이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이번 생에서 간화선 수행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자동차의 소음으로 인하여 대단히 시끄러운 대로변의 건물에서 삼중창인 창문
어머니의 한결같은 기도와 정성 덕에 좋은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고 왕따를 당한 적도 없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내가 학년이 올라가 반이 바뀔 때마다 어머니가 담임선생님들에게 아들 잘 부탁드린다며 학급을 원조했고, 친구들에게 철마다 간식을 제공하는 등 아주 많은 보시를 했다. 부처님 가피는 항상 있었다. 어머니 덕분이었다. 나는 생활 자체가 부처님과 늘 함께 였기에 따로 기도를 드린다거나 매일 꾸준히 하는 신행 생활이 없었다. 사실 불경을 읽어도 통역이 없어 내용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한자를 따라 해도 무슨 말인지 어려웠고 우리말 경전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3살 즈음 걸린 심한 열병 때문에 귀가 안 들리게 되었다고. 너무 어렸을 적이라 기억은 나지 않지만 걸을 수 있을 때부터 어머니 손에 이끌려 우리나라 곳곳에 있는 산과 절에 다니며 108배와 참선을 배웠다. 해인사에서는 성담이란 법명도 받았다. ‘맑고 투명한 물이 가득 찬 연못처럼 청정한 불성을 체득하라’는 뜻이라고 한다.어머니는 어머니의 어머니, 또 그 어머니의 어머니 때부터 계속 부처님을 믿었다. 어머니는 공양주 일을 하셨기에 절에서 생활하는 시간이 나랑 함께하는 시간보다 훨씬 길었다. 나는 어머니와
고봉선사(1238~1295)는 의정이 문득 일어나면 공부가 급격히 진전하고 ‘무심삼매’에 들어갈 수 있다는 체험담을 전했다. 그리고 의정이 일어난 이후에는 ‘화두공부’를 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공부의 에너지가 현전하면서 공부가 수월해진다. 단지 집중하고 공부를 놓지 않으려고 방일하지 않으면 된다. 몽산화상은 이를 화두가 자연적으로 현전한다고 했고, 고봉선사는 화두가 저절로 들린다고 했다. 이때부터는 공부가 수월해지면서 공부에 힘을 덜게 되는 생력(省力)과 공부에서 힘을 얻게 되는 득력(得力)을 하게 된다고 전했다.이렇게 공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