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한 해가 가고 있다. 되돌아보면 어수선했던 일도 많았다. 그 중에서도 종교적 갈등의 조짐이 보였던 일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었으나, 다행히 서로 자성하는 조심성으로 종교라는 큰 포용의 덕을 보인 것은 불행 중에도 다행한 일이라 하겠다. 종교적 이념의 대칭은 어느 사회나 있게 마련이지만, 우리 민족에게도 오랜 세월을 양립적 대각을 세워 온 것이 바로 유교와 불교의 대등적 공존이라 하리라. 고려 사회에서는 불교를 국교적 차원으로 대접하면서 사회의 관리자로서의 사대부라 할 유가들도 동행의 같은 궤도를 밟았기에 갈등적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조선조에 유교를 국시로 하면서 불교에 대한 비판이 노골화되어 서로의 거리가 생기게 되었으니, 조선 초기의 정도전(?~1398)의 배불론이 대립의 첫 포문이었다 할 것이
손바닥 뒤집듯 한다는 말이 있다. 일이 쉽다거나 알기가 매우 쉽다는 경우에 쓰는 말이니, 어느 경우이든 이 말은 아주 쉬운 일에 인용되는 비유이리라. 손바닥이란 사람의 신체 중에서 항상 움직여야 하고, 눈의 시선에서 가까이 접근시킬 수가 있어 가장 잘 보이기도 하기에 생긴 말일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 단어는 뒤집는다는 말에 비중을 두어 일을 가볍게 번복하는 변덕스러움에 인용되기 십상이다. 공자가 어느 사람이 천제의 하늘에 대한 제사를 물으니까, 대답하기를 “글쎄, 나도 알지 못하겠구나. 천제란 천하 사람들이 다 말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하면서 손바닥을 가리켰다. 이때도 제사란 공경과 정성이면 되는 것이야 다 아는 사실이니 손바닥 드려다 보듯 훤한 것 아닌가 하는 의미일 것이다. 세상사란 어찌 보면 손바
사람의 존재 자체는 육신이라는 몸이 있어 형성된 것인데, 이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 하면 마음이라고 함이 일반적 상식이 아닐까. 그래서 항시 마음과 육신을 상대적으로 보고 움직이는 실체는 육신이지만 움직이게 조종하는 것은 마음이라 하게 된다. 육신의 움직임이 결국은 삶의 작용이니 삶을 잘 조절하려면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한다고 하게 된다. 배움이나 가르침은 결국 사람살이의 바른 길을 찾는 것이기에 육신의 움직임인 삶의 방향을 찾으려면 마음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다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동서고금의 가르침의 덕목이 궁극적으로는 마음 다스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동양교육의 중추적 역할을 한 유교에서도 마음은 선천적으로 착한 것인가 악한 것인가 하는 두 길을 놓고 가르침의 향방이 서로 대
며칠 전 안면도의 해변에서 하루 밤을 묵어 보았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도 깊어진 해수욕장의 썰렁함은 지난 철의 북새통을 상상할 수 없으리만큼 고적하게 느껴지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밀려오고 밀려나는 조수의 드나듦이나 뜨고 지는 태양의 일상에는 추호의 변화도 없으리라. 마침 날씨가 쾌청하여 서해의 낙조를 제대로 맛보았다. 바다로 내려앉는 붉은 해의 수레바퀴를 보면서 풍덩하고 떨어지는 물소리가 들리는 듯도 하였다. 이것이 바로 하루라는 시간적 단위가 되는 낮 시간의 종말인 것이다. 그러면서 이 뒤는 내일이라는 시간의 준비 기간이기도 하다. 여기서 잠시 나는 나의 사색의 틀에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여 되돌아보게 되었다. 이 일몰이라는 해가 지다의 표현이 어디에 기준을 둔 것인가. 해가 어떻게 바다 밑으
사물을 구별함에 있어서 시간의 간격으로 어제와 오늘이라 하거나, 공간적 거리로 이쪽 저쪽이라 하거나, 행위적 동작으로 시작과 끝이라 하나, 이런 규정은 사실 그 시점을 어디에 두었느냐에 따라서는 전혀 맞지 않는 규정이 된다. 오늘의 현재가 어제라는 과거에서 보았다면 현재가 아닌 미래인 것이고, 이쪽이라는 시발점도 저쪽에서 시발점을 삼으면 이쪽이 저쪽이 된다. 시작과 끝이라는 동작도 동작의 되풀이로 연속이 지속되면 끝의 동작이 바로 시작으로 환원된다. 이래서 사물의 깨달음을 일깨우는 불교의 가르침에는 ‘두 끝(실마리)에 떨어지지 말라[不落兩邊]’한다. 사람살이의 조화를 이루기 위하여 흔히 이르는 말이 ‘처지를 바꾸어 생각하라[易地思之]’하는데 이도 불락양변과 동일한 가르침이라 하겠다. 나라는 한쪽으로만 고집
사람살이란 홀로 삶이 아니기에 서로 어울림으로부터 시작될 수밖에 없다. 살아감에 있어서 자연스런 모임으로 결합되는 첫 단계가 가족이니 이것은 윤리적 결합으로서 이해득실의 계산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지만, 삶의 범위가 확대되면서 사회라는 집단의 구성이 형성되면 여기서는 어쩔 수 없는 이해득실의 장단점을 계산하게 된다.이러한 이해득실의 계산이 개재되면 어울림에 편차가 생겨 원근(遠近) 친소(親疎)의 간격이 벌어져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쏠림 현상이 일게 된다. 이러한 쏠림 현상이 커지면 하나의 집단, 하나의 사회로 기울어지는 불균형이 조성되어 사회적 혼란을 야기하게 되는 것이다. 사회가 큰 공간으로 확산된 것이 국가이고 국가의 균형을 잡는 것이 정치이니, 정치에는 항시 이 쏠림의 불균형이 없도록 조절하는 기술
사람의 존재는 원초적으로 나눔에서 얻어진 동시에 모임으로서 그 존재의 실현을 보게 되는 것이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된 것은 부모의 몸을 나누어 가짐으로써 시작되었고, 사람으로서 삶의 시작은 나와 부모라는 상대적 모임으로 형성된다. 이를 일러 가족이라 하니, 가족은 집합명사의 원초인 듯도 하다. 따라서 나눔의 최소단위가 나라면 모임의 최대단위가 중생이리라. 그래서 부처님은 나의 대칭에 항상 중생을 두고 자비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 아닐까. 이를 일러 동체대비라 하리라. 자비란 말을 나누어 따져보면 사랑과 연민이니, 사랑도 중생을 사랑함이요, 연민도 중생을 연민함이다. 곧 중생을 사랑하여 즐거움을 주는 것이 자애의 자(慈)이고, 중생을 연민히 여겨 괴로움을 뽑아버림이 연민의 비(悲)이다. 그러니 삶의 실
몇 달 전에 이 자리를 통하여 신라의 경문왕의 혀와 귀에 대하여 말한 적이 있다. 이 나라 백성의 입과 귀를 대신하여 나라 살림을 논의할 전당으로 가겠으니 ‘나를 보내 달라’는 외침이 한창일 때 소시민의 바람을 토로했던 것이다. 그 글의 결론을 되새겨 보면 이렇다. ‘경문왕의 귀가 긴 것은 백성의 말을 널리 들으려 함이요, 혀가 가슴을 덮은 것은 말을 할 때는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라는 훈계이다. 아울러 두 혀[兩舌]를 열 가지 죄악의 하나로 경계한 불교의 율법도 항시 마음에 새겨 ‘말 풍년’으로 늘어놓았던 공약들을 반드시 성취시켜 서민의 답답함을 풀어주는 능력자가 되기를 기대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국회가 열린 지가 두 달 이상을 흘렀는데도 아직도 실질적인 원을 구성 못하고 있다 하니 이것이 무
24절기로 대서가 지났으니 한여름이라는 말도 중반을 넘어선 셈이다. 오락가락하는 빗줄기에 장마란 말도 실감나게 한다. 이런 때면 반가운 꽃이 있으니 바로 연꽃이다. 그러기에 여러 곳에서 연꽃축제가 열린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있다. 내가 살고 있는 마을의 호수공원에서도 사흘간의 연꽃축제가 있다 하니 즐거운 눈복의 감상을 할 작정이다.이를 계기로 하여 연꽃에 대한 의미를 한번 짚어보자. 그러기 위하여 우선 불교에서 보살이 수행해야 할 10가지의 선행에 비유한 ‘연화십유(蓮華十喩)’를 들어본다. 1, 이제염오(離諸染汚). 연꽃은 더러운 진흙에서 뿌리내리고 자라지만 그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다. 이는 보살의 수행은 지혜로 모든 대상의 경계를 관찰하되 탐욕이나 애착심을 내지 않으니, 비록 오탁 생사의 흐름 속에 처하더
사람살이의 조건을 흔히 일러 의(옷) 식(먹이) 주(집)의 3가지를 말하나, 이 중에서도 먹이가 가장 중요할 것이다. 설혹 옷이나 집이야 없이도 지낼 수 있지만, 먹이는 하루만 없어도 견디기 어려운 것은 생명이라는 삶의 작용에 직접 관계되기 때문이다. 이 생명이라는 삶 자체가 생물이라는 큰 테두리에서 하나로 묶여지는 공통점이다. 이것이 두 부류로 분류될 때 동물과 식물일 터인데 사람도 동물의 부류이면서 스스로 영장이라 하여 윗자리를 점유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먹이사슬의 윗자리에 있어 무엇이나 먹잇감으로 삼아도 되는 양 먹을 수 있는 동식물을 마구잡이로 섭취하면서 마치 고급문화를 향유하는 듯 의기양양하다. 그러니 중생을 사랑하여 쾌락을 주고 중생을 불쌍히 여겨 괴로움을 제거해 주려는 자비의 정신을
사람이 동물 중에서 뛰어난 기능을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본다면, 서로의 의사소통이 말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라 할 것이다. 그래서 말에는 사상과 감정이 담겨 있다 할 것이니, 표현된 말에는 전달자의 사상과 감정이 담겨 있게 된다. 그렇다면 표현된 말에는 그렇게 표현되어야 할 이유와 원인이 있었을 것이고, 표현된 말은 이 원인에 대한 결과의 산물이 되는 셈이다. 그러니까 말이란 항상 의미적 내용의 원인적 씨앗을 가지고 있는 결과적 열매인 셈이다. 한 단어의 의미와 표현에 이러한 인과 관계가 있을 뿐만 아니라, 표현되는 언어 질서에도 이러한 인과 관계가 있어 이를 일러 문법적 논리라 하게 된다. 예를 들어 ‘봄이 오니 꽃이 피다.’ 하면, 봄이 원인이라면 꽃이 결과이다. 다시 ‘꽃이 피니 나비 찾아
동양사유에서는 모든 것을 4단 논리로 분류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아마도 온대기후에 적응되어 춘하추동 사계절의 분명함에 익숙해진 까닭이 아닌가 여겨진다. 자연 질서라 할 수 있는 천도(天道)의 규정을 원형리정(元亨利貞)이라 하여 네 가지로 규정하고는 여기에 대응되는 인도(人道)의 정상적 규율도 인의예지(仁義禮智)라 하여, 네 갈래로 규정하고 있다. 이렇듯 계절의 순환에 따라 질서 지어지니, 문장적 논리도 기승전결(起承轉結)이라 하여 4단 논리이다. 서구적 논리의 틀인 정반합(正反合)의 3단 논리와 구별된다. 이것이 바로 춘하추동의 사계절에 순응된 자연적 현상이라 생각된다. 사람의 일생도 생로병사라 하여 네 단계로 구분해 놓았다. 그러나 엄밀히 따진다면 태어남에서 곧바로 늙음으로 옮긴다는 것은 시간적 배려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