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체 만법이 마음을 좇아 나고 멸하니 심법으로 중생 제도해 불국토 이루라 법계의 이치를 깨닫고 우주를 보면 세 갈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각성이오, 둘째는 삼라만상의 유상이오, 셋째는 무형한 허공이다. 그러한 물체에 있어 오직 마음만이 주(主)가 되나니, 만일 사람이 마음의 주를 알기만 한다면 만가지 이치를 한참에 통할 것이다.각성은 상주불변하여 겁외에 초연하여 자유롭지만 삼라만상의 유상은 생하기도 하고 멸하기도 해서 고통스러울 뿐이다. 그리고 마음은 만법의 본원이며 만화의 주체이기 때문에 인생이 닦아 나아가는 향상의 도정에 있어서도 만일 마음 공부를 하지 않으면 불법 진리는 도저히 체달하지 못할 것이다.(중략) 불자들이여! 불법은 다만 마음을 돌려 비춰보는데 있는 것이니 마음을 반조하지 못하면 바깥
마음의 때 벗기고 씻어내는게 수행조바심이나 게으른 마음 내지 마라 부처님 말씀에 중생은 모두 성불할 가능성이 있다고 하셨다. 그것은 중생 모두가 불성을 본래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일체중생(一切衆生)’이란 곧 그러한 소식이다. 또한 중생심은 다 본래부터 청정한 것이라고 말씀하시었다. 중생의 본래 마음이 불성의 자리에 있다면 그 불성이 청정치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중생이 이와 같이 평등하게 성불과 해탈의 가능성을 소유하고 있지만, 가능성 그대로만으로는 부처라고 할 수 없다. 여기에는 그 가능성을 실현하는 문제가 있다. 본래 청정한 그 자리를 청정한 그대로 나타내자면 또, 그 청정성이 뚜렷이 드러나기까지는 오랜 시간과 많은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흔히 우리의 마음을 거울에 비유한다. 거울은 본래 맑고
해제해도 선지식 간택 용맹정진금생에 결단코 생사대사 판결하라 족로천간수(足千間水)하고, 신파만산운(身破萬山雲)이니라. 수행납자의 살림살이는 부유만덕(富有萬德)이로다. 차 한잔 마시는 것도 법이요, 잠 한숨 자는 것도 법이다. 청풍명월도 내 소유요, 청산백운도 내 소유다. 그러나 다시 보니 탕탕하여 한 티끌도 없다. 생사도 없는 곳에 무슨 티끌이 있으리요.(중략) 호수는 오히려 자체나 있다만 우리의 근본면목은 그 자체마저 없는데 어째서 팔만사천번뇌로 끝없이 생사대해에 윤회만 하는가. 무섭다! 무명칠흙의 이 생사업이여! 무량겁을 두고 깜깜하던 이 본래 면목을 찾으려고 발로는 천간수를 딛고 몸으로는 만산 구름을 헤치는 발심납자의 고달픔을 쉴 곳은 과연 어디냐. 약인투득상두관(若人透得上頭關)이면, 시학산하대
육신의 생명은 유한한 것에 불과정신생명 영원함 아는 것이 불법 어떤 인생을 살 것입니까. 다 함께 곰곰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생문제란 따라서 어떻게 하는 것이 착한 일을 해서 선도로 가는 것이고, 어떻게 하는 것이 나쁜 행동을 멈추어서 악도에 나는 것을 피하는 것인가에 모아진다 할 수 있습니다. 가장 중대한 인생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네 모양새가 다르고 생각하는 것이 다른 만큼, 우리가 가는 길 역시 천차만별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는 상대적인 존재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인간에게는 두 가지 상대적인 것, 곧 밝은 길이 있는가 하면 어두운 길이 있습니다. 큰길이 있는가하면 좁은 길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밝은 길, 바른 길, 큰길이란 곧 선도입니다. 보다 사람답게 사
망령되게 걸림없는 행 지어서야 되겠나참공부하면 저절로 삼학이 원만해 질 것 우리의 마음자리는 본래 편안하고 조금도 다른 것이 없다. 이 법신이 본래 스스로 남(生)이 없거늘 다시 어느 곳에다 의탁하려 하는가. 마음은 신령스럽고도 또렷하여 항상 모두를 알고, 쫓아 온 바도 갈 바도 또한 본래도 없는 것이다. 옛적에 개오하여 아주 환하고 의심이 없으나, 다만 무시 이래의 번뇌 습기가 물론 다하지 아니 한다고 말한다면, 마음 밖에 나머지 법이 없을진대 번뇌 습기가 이것이 무슨 물건이건대 다하려고 하느냐. 도무지 마음 밖에 다시 한 물건도 없는 줄 알았을진대, 번뇌 습기가 무슨 물건이건대 그것을 다 하고자 하느냐는 말이다. 만약 터럭 끝 만큼이라도 제하여 버릴 번뇌 습기가 남아 있다면, 이것은 아직도 마음
삼계 육도를 쳇바퀴 돌 듯 윤회하는 도정에서 미혹한 중생의 옷을 벗어버린 영가는 그 육신을 떠나 해탈의 경지로 들어섰습니다. 다시 말하면 안이비설신의의 육근을 다 버렸기 때문에 본래 있던 그 청정한 곳으로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영가는 그동안 이생에 있으면서 꾸던 꿈을 다 훌훌 털어 버리고 오늘에야 비로소 극락세계로 간 것입니다. 육도를 윤회하는 사이에 그중 하나인 인간도에 머물다가 한때 꿈을 꾸다가 갔습니다. 좋은 꿈은 좋은 삶을 살다가 가는 것과 같고, 나쁜 꿈을 꾸는 것은 나쁜 삶을 살다가 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오래 산다고 하는 것은 꿈을 오래 꾸는 것이고, 짧게 사는 것은 잠깐 꿈꾸는 것과 같은 것으로써 윤회의 시간이 길고 짧은 것을 나타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꿈의 주인공인
참선 공부하는 이가 조사의 공안상에 실다히 참구하지 못하고 거개가 다 병마에 끌달려서 본참공안을 투탈하지 못하고 있다. 어떤 이는 몸을 꿈적거리기 싫어하고 마음을 조용하게만 만들어 아무것도 않고 일체 모두 잊어버기는 것으로 선을 삼나니, 이것은 마음의 체성이 본래 공하고 환같은 이몸이 무상한 줄 모르고서 쓸데없이 몸과 마음을 국집하여 억지로 용을 쓰는 것이다. 어떤 이는 화두에 대한 의정은 잊어버리고 자기 가슴 속에 한 물건 불별망상만이 조용해지면 당장 참마음이 다 된 줄 생각하고 그 생각을 지켜 일체에 연속되어 끊어지지 않는 것으로 선을 삼나니, 이것은 진과 망의 자체가 물건이 그림자를 따름과 같아서 지키는 자와 있는 자가 모두다 환화인줄 알지 못하고 환법으로 환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까닭이다. 혹자는
생(生)이라 함은 만물의 번영함과 같고 사(死)라 함은 만물의 조락(凋落)함과 같다. 그런 즉 번영(繁榮)이 곧 조락의 근본이요 조락이 곧 번영의 근본이다. 사람의 생사도 이와 같아서 같은 뿌리 다른 가지에 그 간극(間隙)이 석화전광(石火電光)이다. 이른바 달자(達者)의 중대한 관념을 치(置)할 바 아니나, 지우(智愚) 현불초(賢不肖)를 물론하고 생사에 대한 관념이 가볍고 무거운 차별까지는 있을지라도 완전히 무심타고는 칭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이른바 우(愚)와 불초인(不肖人)의 경우에 있어서는 아무리 수유간(須臾間)이라도 자기를 위하여 무수한 행복과 영원한 안락을 몽상(夢想) 아니하지 못함으로, 그 생에 대한 금성철벽(金城鐵壁)의 견고한 관념이 경경불기(耿耿不己)할 것이다. 지(智)와 현(賢)의 사람의
‘할’ “대중은 알겠는가?”“내가 대중을 위해 이 낱 소식을 통하게 하리라.” 수미산이 반 공중에 꺼꾸러지니삼세불조가 콧구멍을 잃었도다. 만약 이 일을 논한다면 살활(殺活)을 자재로 하는 사람이라야 바야흐로 대장부라고 이름하리니, 한 번 깨칠 적에 일만 겹의 관문을 뚫어 지내서 대해탈과 대휴헐(大休歇)과 대자재와 대안락이 만겁에 외외 당당하여야 비로소 될 것이니라. 근래 공부한다는 사람들은 보고 듣고 느낌과 육근 문두에 나타나는 빛과 그림자의 알음알이를 가지고 본래인을 삼으니 슬프고 통탄할 일이로다. 고인이 말씀하되 ‘말후의 일구라사 비로소 구경의 관문에 이르른다’고 하셨느니라. 덕산 스님 회상에 설봉 스님이 공양주를 하시는데 하루는 덕산 방장 스님이 바리때를 가지고 식당으로 내려오시거늘 설봉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기 전에 말씀하시기를 그때 대중이 천이백 대중인데 이 대중 가운데서 견성 못한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열반에 들지 않겠느니라. 그때 대중 가운데 한 사람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셨습니다. 그후 아난존자가 가섭존자께 묻기를 ‘금란가사와 백옥발우를 전한 밖에 결점이 무엇입니까’, 가섭존자께서 답하시기를 ‘도각문전(倒却門前) 찰간착(刹竿着)하라.’ 여기에서 아난이 꽉 막혔더라. 생사 하나 해결 못한 쥐같은 놈들이 뭐니뭐니 지랄치지만 안심이 되야 하느니라. 지금 이춘성이 어딜 가나 사마 외도라고 하지 중이라고 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내가 여기서 화두를 한 마디 말하겠습니다. 비유를 들어서 할테니 화두 천칠백 가지 중에 무(無)자가 제일입니다. 염라대
세간에 있는 모든 것이 헛된 줄 알면미혹함이 끓는 물에 얼음 녹듯 하리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은 군중을 놀라게 하는 별별 이상한 일이 아니라 다만 자기의 현전일념(現前一念)에서 흘러나오는 마음을 돌이켜 비추어 그 근원을 명백하게 요달하여 다시 외물상(外物相)에 섞이지 않고 안으로 헐떡이는 생각이 없어 일체 경계를 대하여 부동함은 태산반석 같고 청정하고 광대함은 태허공과 같아서 모든 인연법을 따르되 막힘도 걸림도 없이 종일토록 담소하되 담소하지 아니하고 종일토록 거래하되 거래하지 아니하여 상락아정(常樂我淨)의 하염없는 도를 미래제(未來際)가 다하도록 무진장으로 수용하는 것이니, 이것은 억지로 지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마다 평등하게 본래 가지고 있는 일이니 누가 들어올 분(分)이 없으리오. 현우귀천과 노
사람마다 그 발 밑에 하늘 뚫을 한 가닥 활로가 있는데 여기 모인 대중은 과연 그 길을 밟고 있는가. 아직 밟지 못했다면 눈이 있으면서도 장님과 같아 가는 곳마다 걸릴 것이다. 보고 들음에 걸리고 소리와 빛깔에 걸리며 일과 이치에 걸리고 현묘한 뜻에도 걸릴 것이다. 그러나 한번 그 길을 밟으면 이른바 칠통 팔달이요 백천 가지를 모두 깨달아 밝히지 못할 것이 없고 통하지 못할 이치가 없을 것이다. 만일 그 길을 밟고자 하거든 이익이 있거나 없거나 시장을 떠나지 말라. 이제부터 대중을 위해 용심할 곳을 지시하리라. 우리 선조 보리달마 존자는 법으로써 법을 전하신지라 다른 법을 말하지 않으셨다. 그 법이란 말로 할 수 없는 법이요, 그 부처란 취할 수 없는 부처이니 그것은 곧 본원 청정한 마음이다. 그러므로오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