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서 화살은 자주 언급되는 비유 가운데 하나이다. 가장 잘 알려져 있는 것이 ‘독화살의 비유’일 것이다. 그 외에도 초기경전에서는 탐욕이나 분노와 같은 불건전한 정서를 ‘화살’에 비유하는 경우가 많다. 화살이란 전쟁에서 무기로 사용되는 것으로 상대방을 죽이거나 큰 상처를 입혀 전쟁을 수행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말 그대로 상대를 해치는 무기인 것이다. 이런 무기를 비유로 사용하는 것은 탐욕이나 분노와 같은 번뇌들이 그것을 품은 사람을 해치기 때문이다. 걸핏하면 전쟁이 일어났던 당시 북인도의 사정을 감안하면 아마도 사람들이 번
불교에도 악마라는 존재가 등장한다. 초기불교에서 악마가 등장하는 것은 부처님이 정각을 성취하기 바로 직전이다. 그 시점은 부처님이 고행을 포기한 시점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고행에 전념하고 있을 때에 악마가 등장하지 않은 것은 고행으로는 정각을 성취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행을 포기한 뒤 그동안의 수행을 되돌아보면서, 어릴적 경험한 초선을 회상하고 그 수행법을 선택하자 악마가 등장하게 된다. 이 내용이 주는 상징성은 매우 중요하다.삼독심 끊지 못하면악마의 덫 걸리게 돼구분 안목 키운다면평온의길 갈수 있어그리고 스님들이 수행을
우리에게는 감각기관이 있다. 그 가운데 사물을 보는 기관을 시각기관이라고 한다. 이 시각기관이 기관으로서 역할을 하지 못하면 우리는 사물을 보지 못한다. 그러한 장애를 지닌 사람을 맹인이라고 한다. 맹인은 다만 사물을 보지 못할 뿐이다. 그래서 그 만큼 불편할 뿐이다. 그것 뿐이다.부처님 당시 아누룻다 존자란 분이 계셨다. 이 분은 잠을 자지 않고 수행에 정진한 끝에, 깨달음을 얻어 아라한이 되었지만 눈이 멀고 말았다. 하지만 이 분은 천안제일(天眼第一)이란 능력을 더불어 얻게 되었다. 천안은 육안으로는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능력
중국의 대혜 종고 선사가 ‘서장’에서 “생각생각마다 머리에 불붙은 것을 끄듯이 하십시오.”라는 말씀을 했다. 그리고 이 말은 선가의 선사들께서 자주 사용하는 문구이기도 하다. 말인즉슨, 수행을 하는데 이처럼 간절한 심정으로 하라는 것이다.출가자 모범 강조는포교의 첩격이기도한 나라의 통치자도간절한 마음 가져야이 문구는 초기경전에서도 즐겨 사용하는 문구이기도 하다. 수행을 독려하는 것으로 이 만큼 사람들에게 절실하게 다가오는 말도 없을 것이다. 경전의 내용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벗들이여, 만약에 비구가 성찰하면서 일체의 착하고 선한
우리는 기적이란 말을 가끔 사용한다. 절망의 순간에 ‘기적이 일어나길’ 바란다. 죽었다고 생각한 사람이 살아나면, ‘기적적인 생환’이라는 표현도 사용한다. 기적이란 이처럼 일어나기 어려운 일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사전에서는 ‘상식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기이한 일’, 혹은 ‘신에 의해 행해졌다고 믿어지는 불가사의한 현상’이라고 정의되고 있다.오늘날 돈 우선주의천박한 모습 반영해진정성은 돈이 아닌최선과 노력에 있어그래서 이런 기적이란 말의 이면에는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어떤 존재가 ‘우리가 직면한 어려운 상황’을 해결해
흔히 ‘맹목적’이란 말을 쓴다. 맹목이란 사전적 정의를 보면, ‘이성을 잃어 적절한 분별이나 판단을 못함’, 혹은 ‘주관이나 원칙이 없이 덮어놓고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고, 무비판적으로 어떤 것을 추종하는 상태를 말한다고 하겠다.띠끌로 탐욕 물들면내 자신 역시 파괴돼탐진치 잘 헤아리면맹목적 어둠 벗어나우리는 어떤 사람이 권위를 지닌 사람의 말에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경우를 본다. 이는 아마도 우리들이 지닌 속성가운데 하나일지 모른다. ‘맹목적 복종’은 상식적 관점에서 보면 도저히 할 수 없는 비
불교에서 소는 다른 동물과는 다른 상징성을 갖는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십우도(十牛圖), 혹은 심우도(尋牛圖)에서 소는 자신의 본성을 상징한다. 십우도는 선의 수행단계를 10단계로 나눈 것이다. 십우도에서 수행자가 처음에 소의 흔적을 발견하며 구도의 여행이 시작된다. 그리고 소를 발견하게 되고, 거친 소를 길들이는 목우(牧牛)의 단계를 거치게 된다. 소가 길들여지면 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게 되고, 집에 와보니 소는 없고 자기만 남는 경지가 묘사된다. 이윽고 자신도 잊고 주객이 텅 비게 되면 참된 지혜가 발현되고, 마지막으로 중생
아직 인지가 발달하지 않은 아이들은 자신의 그림자를 매우 신기해한다. 자꾸 따라오는 것이 때로는 무서운 듯 우는 아이도 본 적이 있다. 그 모습을 보면 어른들은 왜 자기 그림자를 보고 저리 반응할까 라는 생각에 아이의 순진함에 미소를 짓기도 한다.거짓 가릴 수 있어도행동 떼놓을 수 없어그림자 형체 따르듯선행·악행도 따라와조금 더 자라, 그림자가 왜 생기는지 알면, 아이는 더 이상 그림자에 대해 관심을 가지 않는다. 그림자가 신기하지도 않거니와, 무섭지도 않다. 그러면서 ‘그림자가 왜 생기지?’하고 물으면, 당연한 것을 왜 묻느냐는
간혹 산에 오르면, 바위에 옛사람이 새겨 놓은 시구나 글귀를 보게 된다. 수백 년이 지났지만 선명하게 새겨져 있는 글을 보면, 그 내용보다도 무엇보다도 ‘저걸 어떻게 새겼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바위에 보기 흉하게 새겨놓은 글씨나 그림을 보면, 저걸 어떻게 지우나 라는 생각도 든다.분노 화살 간직하면마음 속에 평화 없어바위에 새겨진 화도흘려버릴 수 있어야여튼 바위에 새겨진 글이나 그림은 쉽게 지워지지도 않으며, 수백 년 이상의 세월을 견뎌낸다는 점에서 종이에 쓴 글씨나 나무에 새겨놓은 글씨보다도 더 오래간다. 우리의 생각
청동그릇을 다른 말로 유기그릇이라고도 하고, 놋그릇이라고도 한다. 요즘 놋그릇이 새삼 주목받고 있기도 하다. 놋그릇에 음식을 담아 놓으면 살균 작용으로 음식이 상하는 것을 지연시켜 줌은 물론 사람 몸에 이로운 작용도 한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그릇이 수요가 많지 않다 보니, 다소 비싸다는데 있다.청동그릇의 가치는음식 따라 달라지듯내면 관찰과 통제가아름다운 삶의 기본우리가 청동그릇, 말하자면 놋그릇은 절에 가면 쉽게 볼 수 있다. 부처님전에 공양물을 올릴 때 사용되고 있다. 잘 닦여진 청동그릇은 반짝반짝 윤이 나면서 보
거울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비춘다. 그런데 거울에 금이 가거나, 얼룩이 지거나, 다른 무엇인가를 붙여 놓으면 대상이 왜곡되거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비추지 못한다. 예부터 현인들이 우리 인간의 심성을 거울에 비유한 것은 이 때문이다. 내가 색안경을 쓰고 세상을 바라보면 안경 색깔에 따라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 하지만 세상은 색안경 때문에 결코 달라지지 않는다. 다만 세상을 바라보는 그 사람의 인식이 그렇게 색안경에 의해 왜곡될 뿐이다. 그런데 이것을 알지 못하게 되면 자신이 바라보고 있는 세상이 옳은 것이고, 전부라고 생각하게 된다
고따마 붓다, 곧 석가모니 부처님께는 아드님이 한 분 계신다. 아드님의 이름은 라훌라(Rahu-la)이다. 경전에서는 라훌라가 태어나고 얼마 되지 않아 태자였던 고따마는 출가한다. 그리고 다시 부자가 만난 것은 부처님께서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을 성취하고 얼마의 시간이 지난 뒤가 된다. 당시 라훌라의 나이는 문헌마다 다소의 차이는 있지만 7-8세 정도 되었다고 한다. 거짓말 일삼고 있는덕성없는 삶 천박해자신 돌아보게 하는부처님 말씀 따라야부처님께서 고향을 방문하고 난 뒤, 석가족의 왕자들이 출가하게 된다. 그 가운데 한 명이 바로
불교는 수행의 종교이다. 수행의 종교란 말이 어렵게 다가올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수행이란 말을 쉽게 표현하면 ‘실천’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즉 불교는 관념의 종교가 아닌 실천의 종교란 말이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증득(證得)의 종교가 된다. 증득이란 경험이나 체험을 통해 철저하게 자신의 것이 되는 것을 말한다. 다른 사람의 경험이 아닌, 나의 경험인 것이다. 말하자면 갈증이 날 때, 다른 사람이 물을 마시면서 ‘아, 시원하다.’라고 하는 것을 간접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물을 마셔서 그러한 경험을 하는 것이다
부처님 당시 지와까란 의사가 있었다. 그는 부처님의 주치의이자, 북인도 일대에서 가장 유명한 의사로 명성이 자자했다. 당시 사람들은 지와까에게 진료를 받기 위해 출가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을 정도였다고 경전은 전한다. 오늘날과 같은 의료 혜택을 받지 못했던 시대의 이야기이지만, 얼마나 의료 환경이 열악했는지를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는 에피소드이기도 하다. 음식 속 허물 유무사람의해 좌우 돼맛 탐착 않는 것이음식 즐기는 방법지와까는 부처님을 자주 뵙고 건강상태를 체크해 왔기에, 그만큼 부처님과 대화를 나눌 기회도 많았던 것 같다. 그
한 사람이 살아 온 삶의 자취를 기록한 것을 ‘전기(傳記)’라고 한다. 그리고 그러한 개인의 삶이 모여 하나의 사건으로 구성되게 되면, 그것을 우리는 ‘역사(歷史)’라고 한다. 역사에는 따라서 시대를 살아갔던 민초들의 삶이 배경으로 존재한다. 아주 소소한 작은 일상의 일들이 역사라는 커다란 배경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삶의 역사를 중시한다. 후대에 어떠한 이름을 남길 것인지, 어떻게 사람들에게 ‘내’가 기억될 것인지가 중요하게 부각되는 이유이다. 이러한 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금을 불문하는 인류의 공통적인
불교는 대표적인 무신론의 종교이다. 창조주라든가 하는 절대자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경전을 보면 무수한 신들이 또한 등장한다. 따라서 불교에서 말하는 무신론이란 신적인 존재 자체가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자로서의 신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입장인 것이다. 그것은 불교의 우주관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데, 인간계와 천계로 나누고 천계는 다시 욕계천(欲界天), 색계천(色界天), 무색계천(無色界天)으로 구분한다. 욕계천은 6개의 하늘나라가 있고, 색계천에는 18개의 하늘나라, 그리고 무색계천에는 4개의 하늘나라가 있다. 도합 28
악을 넘어 선을 추구하는 것은 모든 종교가 공통으로 갖는 요소일 것이다. 물론 종교마다 악이나 선을 규정하는 내용이 다를 수 있다. 하지만 보편적 선이라는 것을 역사의 흐름을 견디어 온 전통적인 종교들은 갖고 있다. 그것을 우리는 자비, 어짊(仁), 사랑으로 표현한다. 악마는 내안 욕망에 있고내가 갈애·공포 일으켜만들고 없애는 자는 나요선택 역시 내게 달린 것 그런데 종교마다 악을 규정하는 내용은 다소 다르다. 말하자면 악을 실존하는 악마에게서 찾고, 그것을 절대악으로 규정하는 종교도 있다. 그리고 그 절대악의 대척점에는 절대선 즉
우리가 흔히 어떤 빠져 나오기 힘든 처지에 놓이거나, 아주 곤란한 상황을 ‘수렁에 빠졌다’라고 표현한다. 한 발 잘못 디디면 좀 체로 빠져나오기 힘든 늪과 같은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겠다. 감각적 쾌락과 욕망은넘기 힘든 수렁과 같아욕망 긍정적 발현 되면삶이 윤택하게 발전 돼 삶을 길이라고 보면, 길 위에는 매우 다양한 상황들이 연출된다. 예쁜 꽃들이 만개한 곳도 있고, 드넓은 초원이 펼쳐진 곳도 있고, 물웅덩이가 있는 곳도 있다. 때로는 가시밭길도 있을 수 있고, 진흙창길을 가야할 경우도 있다. 이렇듯 여러 상황들을 마주하며 때로는
우리는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을 ‘장님’이라고 표현한다. 선천적으로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고와 같은 어떤 후천적인 요인으로 앞을 보지 못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육신(肉身)의 눈이란 기관이 작동하지 않는 것일 뿐, 그 외의 어떤 다른 해석을 붙일 이유는 없다. 육신의 눈은 멀쩡하지만 마음의 눈이 닫힌 사람들이 있다. 사실 우리가 문제를 삼아야 하는 것은 ‘마음의 눈이 닫힌’ 사람이다. 마음의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 교류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기분이나 생각을 알려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무리 조심한다고 해도 살다 보면 어떠한 형태로든 상처를 입는 경우가 있다. 대수롭지 않은 상처라서 무심코 지나치는 경우도 있고, 제법 큰 상처라 치료를 요하는 경우도 있다. 대개의 경우 상처가 나면 소독을 하고 상처에 약을 바르고, 그것이 덧나지 않도록 조심한다. 사실 아무리 작은 상처라도 잘 관리하지 않으면 크게 고생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나의 판단 의심하며대상에게 현혹 말고욕망 자세히 살피면마음의 평온 얻게 돼상처가 나면 신경 쓰고, 관리하듯이 우리가 신경 써 관리할 것이 또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감각기관이다. 부처님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