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핵심사상을 말한다면 동체대비(同體大悲) 가르침을 빼놓을 수 없다. 동체대비는 부처님 자비심의 핵심을 관통한다. 부처님이 중생들에게 대자비심을 일으키는 것은 중생이 불쌍한 존재여서가 아니라 바로 부처님과 동일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처님의 자비에는 조건이 없다. 스스로에게 베푸는 자비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우리의 자비 또한 마찬가지다. 인간적인 연민이나 사랑을 넘어선 동체로서의 자비를 지향한다.새삼 동체대비의 의미에 골몰하는 것은 최근 사회적으로 논란을 불러일으킨 ‘신발깔창 생리대 사건’ 때문이다. 국
가수 조영남의 그림 대작(代作) 사건으로 시끄럽다. 다른 사람에게 그림을 그리게 한 뒤 자신의 작품이라고 속여 팔아온 의혹으로 검찰의 수사가 진행 중이다. 독실한 기독교인인 조씨의 대작 의혹에 불자들의 관심이 쏠리는 것은 조씨가 지난해 부천 석왕사에서 영담 스님, 신정아씨와 함께 ‘조영남이 만난 부처님’이라는 제목으로 전시회를 열었기 때문이다. 당시 조씨의 전시회는 그야말로 파격이었다. 당시 전시회의 큐레이터를 맡았던 신정아씨는 2007년 학력을 위조해 동국대 교수로 임용됐다가 사기행각이 탄로나 실형을 살았던 인물이다. 종단에서 공
이심중애(離心中愛) 시명사문(是名沙門), 불연세속(不戀世俗) 시명출가(是名出家). 이 내용은 ‘초발심자경문’ 중에서 원효 스님이 쓰신 ‘발심수행장’에 나오는 가르침이다. ‘초발심자경문’은 불문에 입문한 사미승이 가장 처음 배우는 책으로 보조국사 지눌 스님의 ‘계초심학인문’ 원효 스님의 ‘발심수행장’ 야운 스님의 ‘자경문’ 등 3편으로 구성돼 있다. 원효 스님의 말씀을 풀이하면 “마음에서 애욕을 여읜 사람을 사문이라 이름하며, 세속의 일을 그리워하지 않는 것을 출가라 부른다”라는 뜻이다. 수행자의 자격과 출가의 의미를 이토록 단순 명
언제부터인가 약자들의 피맺힌 절규 현장에는 ‘어버이연합’이라는 정체 모를 단체가 출몰했다. ‘중북’이나 ‘빨갱이’를 입에 달고 정부가 불편해 할 시위현장에 득달같이 나타나 욕설을 퍼붓고 폭력을 휘둘렀다. 특히 세월호 참사로 자식을 잃어버린 어버이들의 한 서린 단식 현장에서 폭식 투쟁을 벌이며 조롱을 일삼았던 그들의 행동에서 이들이 일반적 어버이들이 아님을 짐작케 했다.최근 ‘어버이연합’이 온갖 추문의 중심에 서 있다. 퇴직경찰관의 모임 ‘경우회’와 경제인들의 모임 ‘전경련’에서 억대의 뒷돈을 받아 시위 때마다 일당을 주고 수천 명의
보조국사 지눌 스님의 ‘정혜결사문’에 인인지이도자(人因地而倒者) 인지이기(因地而起)라는 명언이 있다. “땅에서 넘어진 자(人因地而倒者), 땅을 딛고 일어나라(因地而起)”는 말이다. 지눌 스님은 무인이 칼로 세상을 다스리던 폭압의 시절, 함께 타락해 권력을 탐하던 불교에 묵직한 주장자를 내리쳤다. 절에 재물이 넘쳐나고 거드름 피우며 현학적인 지식을 자랑하던 불교를 떠나 멀리 변방에서 새로운 불교를 일으켰다. ‘정혜결사’였다. 선정과 지혜를 함께 닦는 정혜결사는 깊은 산속에서 치열한 수행과 계율로 고려불교의 바른 길을 제시했다.지눌 스
단식중생(但識衆生)하면 즉능견불(卽能見佛)이요 약불식중생(若不識衆生)하면 멱불만겁(覓佛萬劫)하여도 불득견야(不得見也)이다. 육조혜능 스님의 가르침을 담은 ‘육조법보단경’에 나오는 내용이다. 풀이하면 “중생을 알면 능히 부처를 볼 것이요, 만약 중생을 알지 못하면 만겁토록 부처를 찾아도 보지 못할 것이다”라는 내용이다. 여기서 즉능견불(卽能見佛)은 “능히 부처를 볼 것이다”라는 뜻이다. 물론 조건이 있다. 중생을 알면 그렇다는 의미다. 중생을 안다는 것은 중생이 바로 부처임을 알라는 의미다. 중생이 곧 부처이기에 중생을 떠난 부처란
4·13 총선이 목전에 다가왔다. 국민의 소중한 한 표가 모여 민의를 대변할 국회의원 300명을 선출하게 된다. 그러나 이번 총선은 역대 어느 선거보다 국민을 불편하게 하고 있다.여당은 대통령에 대한 충성도에 따른 줄 세우기 공천이 국민의 입에 오르내리면서 절망을 주고 있다. 국민의 뜻을 살펴 정책을 내놓기보다 대통령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과 인연을 강조하는 후진적인 선거문화가 21세기를 살아가는 국민들에게는 충격적이다. 국민들의 비판이 쇄도하자 후보들이 느닷없이 길거리에서 떼거리로 무릎을 꿇고 마음에도 없는 사죄를 표명하며 표를 구
여실지견(如實知見)이라는 말이 있다. 여실(如實)은 ‘있는 그대로’, 지견(知見)은 ‘알고 본다’는 뜻이다. 풀이하면 진리의 참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안다는 의미다. 의미로만 본다면 깨달음 혹은 견성(見性)과 다르지 않고 실천행으로 본다면 팔정도의 정견(正見)과 궤를 같이 한다.정견은 바르게 보는 것이다. 실상을 바르게 봐야(正見) 바른 사유(正思惟)가 생기고 바른 말(正語), 바른 행동(正業), 바른 생활(正命), 바른 노력(正精進), 바른 알아차림(正念) 바른 선정(正定)이 가능하다. 팔정도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여실지견은
스님들이 신발을 벗는 댓돌 위에 흔하게 걸린 주련이 조고각하(照顧脚下)다. 풀이하면 자기 발밑을 비추어 보라는 의미다. 세간에서 각하(脚下)는 ‘발밑’으로 해석하지만 불교에서는 본래면목(本來面目)의 의미로 읽히는 경우가 많다. 조고각하는 진리를 밖에서 구하지 말고 자신에게서 구하라는 의미다.그래도 흔히 조고각하는 너의 행동을 돌아보라는 뜻으로 자주 쓰인다. 남이 하면 불륜, 자기가 하면 로맨스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 사회는 자신의 허물에는 관대하고 남의 잘못에는 득달같이 달려드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조고각하는 삼불야화(三佛夜話)라
육조 스님이 열반에 들기 전 대중들이 울며 세상에 더 머물러있기를 간청했다. 이에 육조 스님이 말했다.“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신 것은 열반을 드러내 보이기 위한 것이다. 오면 가야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이 몸 또한 반드시 가야한다.”그러자 대중들이 물었다. “스님께서 지금 가시면 언제 오십니까?” 육조 스님이 말했다. “나뭇잎이 떨어지면 뿌리로 돌아간다. 내가 오더라도 아무 말이 없을 것이다.”‘육조단경’ 부촉품의 내용이다. 낙엽귀근(落葉歸根)은 나뭇잎이 떨어지면 뿌리로 돌아간다는 의미다. 낙엽은 결국 뿌리로부터 시작됐다. 현상이
수처작주(隨處作主)라는 말이 있다. 어떤 곳에 처하든 주인공이 되라는 뜻이다. 입처개진(立處皆眞)과 함께 쓰이는데 어떤 곳에 처하든 주인공이 되면((隨處作主) 서 있는 그곳이 항상 진실하게 된다(立處皆眞)는 가르침이다. 임제 스님은 “큰 그릇이라면 결코 남들에게 미혹 당해서는 안 된다. 어떤 곳에 처하든 주인공이 되면 서 있는 그곳이 항상 진실하게 된다. 그대가 한 찰나라도 미혹된다면 마구니가 마음에 침입하게 될 것”이라고 경책했다.그러나 수처작주의 의미를 처한 상황의 분위기에 잘 맞추거나 주도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이 많다. 임
불가에 견월망지(見月亡指)라는 표현이 있다. 원문을 풀이하면 달을 봤으면 달을 가리키는 손을 잊으라는 뜻이다. 본질을 깨우쳤으면 수단들은 버려야 한다는 의미다. ‘능엄경’은 견월망지의 핵심을 찌르고 있다. “누군가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켜 보인다면 우리는 손가락이 향한 곳을 따라 달을 보게 된다. 그런데 만약 누군가의 손가락을 달의 본체로 여기게 된다면 우리는 달만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손가락까지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우여곡절 끝에 테러방지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야당이 필리버스터(다수파의 횡포를 막기 위한 합법적 의사진행 방해 행
제자와 스승의 관계를 줄탁(啐啄)으로 설명한다. 줄(啐)은 부른다는 의미고 탁(啄)은 쫀다는 의미다. 병아리가 알에서 나오기 위해서는 새끼와 어미가 알을 안팎에서 쪼아야 하는 것처럼 스승 제자의 관계가 그렇다. 따라서 줄탁동기(啐啄同機)는 제자의 화두가 익을 때를 스승이 잘 살펴 발현시켜야 한다는 의미다.줄탁동기는 ‘벽암록’ 16칙 경청줄탁기(鏡淸啐啄機)에 등장하는데 내용은 이렇다. 어떤 스님이 경청 스님에게 물었다. “제가 안에서 쪼을테니 스님은 밖에서 쪼아 저를 도와주십시오.”
불교에서 자주 사용하는 말 중 전도몽상(顚倒夢想)이 있다. 전도(顚倒)는 바르게 보지 않고 뒤집어 보는 것이고 몽상(夢想)은 꿈이나 헛것을 현실이나 진실로 착각하는 것이다. ‘반야심경’에 “원리전도몽상(遠離顚倒夢想) 구경열반(究竟涅槃)”이라는 내용이 나온다. 전도몽상에서 벗어나야 비로소 부처님의 세계인 구경열반에 이를 수 있다는 뜻이다. 전도몽상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삼법인(三法印)을 알고 깨우쳐야 한다. 세상은 고통으로 가득 차 있고 변하지 않는 영원한 것은 없으며 ‘나’라는 실체 또한 없다는 것을 체득해야 한다는 말이다. 불교에
“정직함이 가장 좋은 정책이다(Honest is the best policy).” 학창시절 영어 작문 시험에 빈번하게 출제됐던 격언이다. 영어 실력 평가의 의미도 있겠지만 학생들에게 참다운 삶의 방식을 알려주려는 뜻도 있었을 것이다.그러나 흥사단 투명사회운동본부의 2013년 설문조사에 따르면 고등학생 44%가 10억 원이 생긴다면 1년 정도 감옥에 가도 좋다고 응답했다. 돈이 된다면 범죄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우리 아이들의 인성이 결코 건강하지 않다는 점을 방증한다. 이런 현상이 아이들의 잘못은 아니다. 우리 사회에 거짓과
무풍기랑(無風起浪)은 바람이 없는데도 파도가 인다는 뜻이다. ‘완릉록(宛陵錄)’의 ‘달마서래(達磨西來) 무풍기랑(無風起浪)’에서 유래됐다. 달마대사가 서쪽에서 온 것은 바람이 없는데도 파도가 이는 것과 같다는 의미다. 그러나 불교는 인과를 말한다. 원인이 없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결과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무풍기랑의 의미는 원인을 잘 살피라는 역설이다.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 즉 “달마 스님이 서쪽에서 온 까닭은”이라는 의문이 화두로 등장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누리과정(만3~5세 무상보육) 예산이 결국 유치원에 지원되
날목(捏目)은 경전과 선어록에 등장한다. 날목생화(捏目生花), 날목공화(捏目空花), 날목지자(捏目之子) 등의 용어로 쓰인다. 날목생화나 날목공화는 눈을 문지르거나 누르면 없던 꽃을 본다는 의미다. 날목지자(捏目之子)는 이렇게 헛것을 보면서 그것이 진실이라고 믿는 사람을 지칭한다. 불교에서 중생은 날목지자다. 미혹에 빠져 실체가 아닌 것을 실체로 착각해 고통을 받기 때문이다. 따라서 깨달음은 이런 날목지자의 삶을 벗어남을 의미함이다.새해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눈살 찌푸리는 일이 일어났다. 개신교 신자를 자처하는 60대가 불상을 파
마전성경(磨磚成鏡)은 ‘마조어록(馬祖語錄)’에 나오는 유명한 명구다. 벽돌을 갈아서 거울을 만든다는 의미인데 남악회양(677~744) 스님이 마조도일(709~788) 스님에게 물었던 말에서 비롯됐다.회양 스님이 참선을 하고 있는 마조 스님에게 물었다. “무엇 때문에 참선을 하고 있는가?” 마조 스님이 말했다. “부처가 되고자 합니다.” 그러자 회양 스님은 벽돌을 집어 들어 바위에 갈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마조 스님이 물었다. “벽돌을 갈아 무엇에 쓰시렵니까?” “거울을 만들 생각이다.” “벽돌을 갈아 어떻게 거울을 만듭
스님들이 수행하는데 교훈이 될 만한 내용을 추려 정리한 책으로 ‘치문경훈(緇門警訓)’이 있다. ‘일생공과(一生空過) 후회난추(後悔難追)’는 이곳에 실린 위산영우(771~ 853) 스님의 경책이다.‘일생을 헛되이 지내게 되면 뒤에 후회해도 좇기 어렵다’로 해석되는데 ‘인생을 허송세월로 보내고 나면 뒤에 후회해도 소용없다’는 의미다. 세상사 모든 일은 때가 있기 마련이다. 봄에 씨를 뿌리고 여름에 열심히 김을 매지 않으면 가을의 풍성한 결실을 기대하기 어렵다. 뒤늦게 후회해도 한 겨울 언 땅에 씨를 뿌리고 김을 맬 수는 없는 일이다.
선어에 귀가온좌(歸家穩坐)라는 말이 있다. “집에 돌아와 편안하게 앉는다”라는 뜻이다. 오조법연 스님의 “확연무성을 꿰뚫으면 집으로 돌아와 편안히 앉을 수 있다”는 말씀에서 비롯됐다.12월30일 쌍용차 노사가 극적인 합의를 이끌어냈다. 2009년 구조조정 때 해고나 희망퇴직, 분사 방식으로 회사를 떠난 노동자들을 신규채용 수요에 맞춰 2017년까지 단계적으로 복직시키기로 했다. 쌍용차 노동자들이 거리로 내몰린 지 꼭 6년만의 일이다. 쌍용차 사태는 우리사회의 가장 큰 비극이었다. 느닷없는 해고에 노동자들은 77일간 평택공장을 점거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