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염불을 낮춰 말하는 주변 분들의 소리를 듣다보면, 귀가 솔깃해지는 게 사실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A. 요즘 젊은이들의 말투를 관찰해보자면, “나는”이라는 말이 빈번히 등장함을 알 수 있습니다. 뭔가 자신을 내세우기는 해야겠는데, 손에 잡히듯 실감할 만큼 믿고 의지할 만한 그 무엇도 없습니다. 온통 불확실성으로 가득합니다. 그러다 보니 평소에 익숙한 주변의 평가를 근거로 짜 맞춘 “나”를 억지로라도 강조하기밖에 더하겠습니까? 비록 많은 수행법이 있다고 하지만, 불교의 가르침을 한마디로 이른다면 무아로 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고유성을 주장한 채 무아로 살라는 게 아닙니다. 본래부터 무아인 자신이 무아로 살라는 가르침입니다. 실로 현상으로 나타난 자신의 존재는 실체가 따로 없습
마하부와 스님이 태국의 왕과 왕비에게 법문하고 있다. 지난 호에 아찬 마하부와 스님의 삶과 가르침의 일부를 소개하였다. 이 번호에서는 스님이 스승인 아찬 문 스님에게서 지도받은 ‘마음의 원칙’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해 본다. 수행승들에게 중요한 점은 마음의 원칙(priciples in the heart)들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마음의 원칙들’이란 아라한의 깨달음에 이르기까지의 여러 단계의 마음집중(선정)과 지혜를 말한다. 마음의 원칙이 좋으면, 우리들이 수행을 할 때의 원칙들도 모든 측면에서 좋을 것이다. 이것이 마음을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보는 이유이다. 마음 수행에서 원칙을 가지고 있다면, 마음의 원칙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과는 아주 다르다. 마음의 원칙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시간이나 장소
염불암이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약을 털어 넣었다. 모두 안녕. 그리고 세상과 등지는 잠을 청했다. 목탁 소리와 함께 염불 소리가 아스라하게 들린다. 아! 이제 내가 극락에 왔구나 생각하며 눈을 살그머니 떠보니 법당이었다. 친구의 여자친구와 찾았던 곳약을 사들고 차창 바깥 풍경을 꼭꼭 짚어가며 눈으로 사진을 박아 놓았다. 마지막 세상을 선명하게 내 눈 속에 넣어두려고… 어두컴컴한 저녁 안양역에서 하차해 염불암이 바로 내려다보이는 바위에 드러누웠다. 그 바위는 내가 사랑했던 그녀가 앉아서 ‘사랑이 메아리 칠 때’를 불렀던 곳이다. 그녀는 내 친구의 여자였다. 나는 그녀를 무척 좋아했다. 지금도… 그날 나는 염불암이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약을 털어 넣었다. 모두 안녕. 그리고 세상과 등지는 잠
심곡암 전경 ‘말을 낳으면 제주도로,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라는 속담이 있다. 그만큼 넓은 곳에서 기회를 잡고 큰 뜻을 펼쳐보라는 말일 것이다. 자동차와 콘크리트 건물이 우거진 서울은 현재 약 357만 가구에 1,000만의 인구가 살고 있다고 한다. “종로에서 뺨맞고 한강 가서 눈 흘긴다.” “서울은 눈뜨고 코 베가는 곳”이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많은 사람이 살다보니 각박한 인심 또한 감당해야할 사실이다. 나 또한 이 곳에서 겨우 틈을 비집고 바둥대면서 살고 있다. 이 복잡한 서울 도심속에서 부처님을 만날 수 있는 청정한 도량은 어디에 있을까? 지난 해 어느 스님과 함께 정릉에 있는 심곡암을 찾게 되었다. 산길을 20여분 걸었을까. 콧등에 땀이 살짝 맺힐 쯤 도착한 작은 사찰 심곡암, 다람쥐 여
대위산의 제일 수좌라 불리는 한 수좌와 공양직을 맡고 있던 위산이 백장화상 앞에 앉았다. 백장화상이 물병을 놓고 물었다. “이것을 물병이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이것을 무엇이라 부를 것인가?” 수좌가 말했다. “나무토막이라고는 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 때 위산은 물병을 발로 차 버리고 나갔다. 백장화상이 웃으며 말했다. “선문의 제1수좌는 위산에게 졌다.” 무문이 게송으로 읊었다. “위산은 취사도구인 조리와 국자를 내던지고, 정면에서 물병을 차버리며 논의를 차단했네. 백장은 두꺼운 관문으로 위산을 막으려 했으나 저지할 수 없었다. 위산이 발끝으로 물병을 차버리니, 부처도 실타래처럼 풀어졌도다.”
덕산이 용담화상으로부터 법을 들으며 밤이 깊어갔는데 용담화상이 말했다. “밤이 깊었는데 이제 물러가라.” 덕산이 인사올리고 문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와 말했다. “밖이 어두워 돌아갈 수 없습니다.” 용담화상은 촛불에 불을 붙여 덕산에게 주었다. 덕산이 촛불을 건네받으려는 찰나 용담화상이 촛불을 ‘훅’불어 꺼버렸다. 덕산은 이 때 깨닫고 절을 올렸다. 용담화상이 “그대는 어떤 도리를 보았는가?”라고 묻자 덕산은 “저는 오늘부터 천하 노스님들의 말씀을 의심하지 않을 것입니다.”고 답했다. 용담화상은 다음날 설법하는 자리서 말했다. “대장부의 이빨은 칼을 세워놓은 나무와 같고, 입은 피를 담아 놓은 그릇과 같으니 한 방망이를 때려도 꼼짝하지 않는다. 그는 이후로 다른 날 다른 때
향엄화상이 말했다. “한 사람이 나무 위에 올라가 있다. 그는 입으로는 나뭇가지를 물고, 손은 나뭇가지를 붙잡지도 않고, 발은 나무를 밟지 않고 매달려 있을 뿐이다. 나무 아래서 어떤 사람이 ‘달마대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이 질문에 어떤 대답을 할 수 있는가. 대답하면 곧 바로 나무 아래로 떨어져 죽을 것이고, 대답하지 않는다면 질문한 사람의 뜻을 위배하는 것이다. 무문화상이 평했다. “폭포물이 떨어지는 것처럼 말을 잘 해도 이 경우에는 소용이 없다. 부처님이 평생 설한 경전을 다 터득해도 여기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향엄(香嚴): 위산영우의 제자. 산에서 잡초를 베다가 기와조각을 던졌다. 그 기와조각이 대나무에 부딪치며 ‘딱’하는 소리에 확연히 깨달
어느 날 운암 스님이 도오 스님에게 물었다. “관세음보살은 많은 손과 눈으로 무엇을 합니까?” “자다가 한밤중에 베게를 더듬어 찾는 것이다.” “예, 알겠습니다.” “무엇을 알았느냐?” “온 몸(遍身)이 손과 귀입니다.” “제대로 알지 못했다.” “사형은 무엇이라 하겠습니까?” “온 몸(通身)이 손과 귀다.” 천수천안관세음보살 앞에 서면 이 화두가 풀릴 것인가. 동으로 서로 남으로 북으로 관세음보살 찾아보아야 별 소용없음을 알아야 한다. 동분서주 하는 동안에 큰 마음 내어 내 손으로 타인의 손 한 번 잡아주는 게 나을 것이다.
청담(靑潭) 스님은 한국불교정화운동의 화신(化身)이었다. 1950년대에서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치열하게 불타올랐던 한국불교정화운동의 한복판에 서서 “성불(成佛)을 한생 미루더라도 불교정화만은 반드시 이루겠다”고 서원했던 분이 바로 청담 스님. 청담 스님은 1902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나 진주농업학교를 마친 후 2차에 걸쳐 출가를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친구였던 박생광(朴生光) 화백의 도움으로 일본에 건너가 송운사(松雲寺)의 아끼모도 준까 스님 문하에서 6개월을 수행했다. 그러나 일본불교의 승풍이 마음에 들지 않아 곧바로 귀국, 25세에 경남 고성 연화산에 있는 옥천사에서 남경봉 스님을 은사로 출가 득도했고, 순호(淳浩)라는 법명을 받았다. 그 후 스님은 서울 개운사의 대원강원 박한영 스님 문하에
한 스님이 노파에게 “오대산 가는 길이 어디오?”라고 물으면 노파는 “똑바로 가시오!”라고했다. 그 스님이 몇 걸음 가면 노파는 곧바로 “스님의 위의를 갖추고서 또 내가 말한 그대로 똑같이 가는군!”이라며 비꼬았다. 조주화상이 “내가 그 노파의 경지를 점검해 주겠다”며 노파를 만났다. 조주화상이 “오대산 가는 길이 어디오?”하고 묻자 노파는 “똑바로 가시오!”하고 대답했다. 조주화상은 돌아와서 대중에게 “내가 노파의 심지를 점검했다.”고 말했다. 무문화상이 평했다. “오대산 노파는 적군을 물리칠 작전을 세울 줄은 알아도 적에게 공격당한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다. 적군 진영을 급습하는 조주화상의 작전은 좋았지만 대장부답지는 않았다. 둘 다 허물이 있다.” 이어 게송으로 읊었다. “평범하지만(조주화상의
한송이 붉은 연꽃 바다에 피어나니 雲山海 스친 바람소리 법음으로 들려오고… 불긍거관음원 입구서 바라본 전경. 왼편의 관음원 앞으로 펼쳐진 바다가 일품이다. 2003년 일본 37개 사찰이 시주해 새롭게 조성한 불긍거관음원. 건축양식은 일본풍이다. 순례단은 10월 6일 보타낙가산 앞바다에서 방생대법회를 봉행했다. 좌. 불긍거관음원 바로 아래에 위치한 조음동. 우. 간절한 기도를 올리면 관세음보살이 나툰다는 범음고동의 누각. 본지가 주관한 ‘중국 보타·낙가산 성지순례’가 원만히 회향했다. 10월 4일부터 8일까지 4박5일간의 일정으로 중국을 방문한 순례단(단장 각현 스님) 82명은 상해의 옥불사와 용화사, 항주의 영은사와 정자사, 영파의 아육왕사와 보타·낙가산을 참배했다
운문화상이 동산수초가 처음 참문하러 왔을 때 물었다. “지금 어디서 왔는가?” “사도에서 왔습니다.” “하안거는 어디서 지냈는가?” “호남 보자사에서 지냈습니다.” “언제 그곳에서 출발했는가?” “8월25일 출발했습니다.” 운문화상은 “너에게 60방망이(三頓棒)를 때리는 벌을 내리겠다.” 다음날 동산이 운문화상에게 물었다. “60방망이를 내리겠다고 하셨는데 저의 허물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이 밥통 같은 녀석아! 너는 멀리 강서나 호남을 왔다 갔다 하면서 세월이나 보내고 말 것이냐?” 동산은 이 말을 듣고 크게 깨달았다. 무문화상이 말했다. “운문화상은 그 때 동산에게 본분을 깨닫도록 좋은 법문을 설해 동산에게 선승의 길을 체득하도록 하여 운문종의 한 가풍이 실추되지 않도록 했다”
Q : 얼마 전 불교로 개종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막상 염불생활을 하고자 해도 모든 게 낯설기만 합니다. 저와 같은 경우, 어떻게 하는 게 옳겠습니까? A : 단순히 많은 종교 중에서 한 가지를 택하는 것은 개종의 겉모습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기 생명의 궁극적인 의지처를 완전히 바꾸었을 때, 비로소 개종이라고 합니다. 경험과 기억에 근거해서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하는 중생으로서의 삶을 연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개종이란 더 이상 상대적인 여지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결단을 내림과 동시에 부처님생명으로만 살아가겠다는 지향에 망설임이 없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는 곧 싯다르타라고 불리던 구도자가 석가모니불로 개종하였음을 시사합니다. 익히 알고 있다시피 법장비구는 아미타불이 되셨습니다. 이는 A라는
오조 법연 선사가 말했다. “물소가 창살을 통과하는데 물소의 머리와 뿔, 앞발과 뒷발이 모두 지나갔는데, 어째서 물소의 꼬리만은 통과하지 못했는가?” 무문 화상이 평했다. “전도된 차별심을 떨치고 정법안목으로 깨달음을 체득하는 한 마디를 말할 수 있다면, 위로는 네 가지 은혜에 보답할 것이고, 아래로는 중생들을 구제하여 성불할 수가 있으리라.” 게송으로 읊었다. “물소가 창문을 통과하면 구덩이에 빠지고, 되돌아오면 도리어 파괴되고 만다. 이렇게 작은 물소의 꼬리라는 것은 정말로 괴상하기 짝이 없는 것이네.” 신구의 삼업이 청정한 수행인은 단박에 말할 것이다. 그러나 출세간인을 막론하고 명예나 이익 등에 집착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평생 소꼬리만 잡는다. 무문 화상이 평한 것처럼 차별심을
파초 화상이 대중에게 법문을 했다. “그대가 주장자가 있다고 하면, 내가 그대에게 주장자를 주고, 그대가 주장자가 없다고 하면, 내가 그대의 주장자를 빼앗겠다.” 무문 스님이 평했다. “이 주장자는 다리가 없는 강을 건널 때에 힘이 되고, 밝은 달이 없는 어두운 밤에 마을로 돌아갈 때도 이 주장자는 친구가 된다. 만약 이것을 주장자로 부른다면 이 사람은 화살보다도 더 빨리 지옥에 떨어지리라. 선법문 자리에서 선사가 들어 보인 주장자를 수도 없이 보았을 것이다. 주장자 ‘쾅! 쾅! 쾅!’ 내려치는 순간 무엇을 보고 듣는가. 선사가 들어 보인 주장자만 보고 있다가는 무문 스님 평처럼 지옥에 떨어진다. ‘쾅!’소리에 놀라기라도 하면 그나마 다행이다. 그러나 지옥을 면치 못할 것이다. *파초혜
Q. 나름대로 염불정진을 하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변의 눈길이 그리 곱지 않습니다. 염불보다 생활에 충실해야 한다고 요구합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요? A. 법회에 열심히 참석하여 정진하는 사람을 걱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종교는 그렇게 빠져드는 게 아니야. 부처님도 적당히 믿어야 한다. 우리도 불교를 믿지만 말이야”하는 식의 논리를 펴는 사람들이 있더군요. 언뜻 듣기에 아주 그럴듯한 말입니다. 하지만 지나치게 믿으면 안 된다는 말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온통 모순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자신의 생활은 하나도 변화시키지 않으면서, 부처님 법을 머리핀과 같이 장식하고 살겠다는 은밀한 뜻이 웅크리고 있을 뿐입니다. 물론 가족 간의 우의를 다지기 위해서 모이는 게 더 낫다는 마음을 이해하지
경북 경주에 차문화를 이끌어갈 새로운 차회 하나가 생겼다. 경주 불국사 소속 불국다향회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지난 10월 11일 불국사문화회관에서 창립식을 연 ‘불국다향회’는 ‘차문화를 통해 불교를 알리자’라는 목적으로 생긴 차회이다. 경주 불국사 주지 종상 스님을 중심으로 총 108명의 불자회원들로 구성된 ‘불국다향회’는 불교에서 보살이 수행에서 열반에 이르는 여섯 가지 방편 즉 보시(布施)·지계(持戒)·인욕(忍辱)·정진(精進)·선정(禪定)·지혜(智慧)반으로 나누어 각 특성에 맞는 포교 활동을 펼칠 예정이다. 불국사 주지 종상스님이 직접 이름지은 불국다향회는 ‘차의 향기가 불국토에 은은하게 퍼진다’는 뜻으로 차를 통한 포교에 앞장서겠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창립식에서 불국다향회 회원들은 “불
1. 특징과 분류 녹로금호(左)와 기문홍차(右) 홍차는 완전발효차라 불리는 차로 생엽을 위조(萎凋), 유념(捻 :또는 유절), 발효(發酵), 홍건(烘乾)등의 공정으로 만들어 진다. 녹차는 비발효차로서 생엽이 발효되지 않고 차를 만드는 것이 관건이라, 제다과정의 첫 공정이 생엽 속에서 발효를 진행시키는 단백질 효소를 파괴 내지는 억제시키는 살청(殺靑) 작업이 있다면, 홍차는 살청과정을 갖지 않고 모든 방법을 이용하여 원하는 향과 맛을 위해 최대한으로 발효시키는 차다. 물론 지나치게 발효를 시키면 밋밋한 향과 맛의 홍차가 되므로 각 홍차종류에 따라 적당함이라는 전제는 갖는다. 위조는 생엽 세포 중의 수분을 적당히 증발시켜 시들기를 하여 잎을 부드럽게 하고 발효를 위한 생화학 반응이 쉽게 일어나도록
프라 몽콜 탭무니 스님은 '마음집중'수행법을 체계화 했다. 태국 사원에는 고승의 유체(遺體)를 모셔둔 곳이 여러 곳 있다. 스승의 가르침을 존중해서 유체를 관에 모셔두고 있는 것이다. 방콕 교외의 왓 팍 남(Wat Pak Nam)이라는 사원에는 법신(法身)인 담마카야를 발견하고 그 수행법을 널리 알린 프라 몽콜 텝무니(Phra Mongkol Thepmuni, 1884~1959) 스님의 유체가 모셔져 있어 참배하는 사람들의 행렬이 끊어지지 않고 있다. 두 번에 거쳐 수정을 이용해 마음을 집중한 후 지혜를 계발하는 수행법을 통해 아라한이 되는 길을 가르치고 있는 담마카야 수행법과 이를 발견한 프라 몽콜 텝무니 스님을 소개하고자 한다. 경전 10년 공부 후 수행 롱퍼 왓 팍 남(왓 팍남의 큰스님)
다섯 비구 머무는 바라나시 향해 진리의 첫 수레바퀴가 구르다 우루벨라에서 함께 고행했던 다섯 명의 도반을 교화하기 위해 붓다는 바라나시를 향해 출발했다. 걸음걸이가 무겁지는 않았지만 약 300킬로미터에 이르는 머나먼 길을 나서는지라 그의 표정에는 약간의 비장한 기운마저 흘렀다. 하긴, 어찌 비장하지 않을 수 있으랴. 오랜 고민 끝에 전법의 대 결단을 내리기는 했지만 이를 알아들을 이가 얼마나 있을 것이며, 또 있더라도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 가르침을 실천할 것인가에 대한 걱정이 줄곧 뇌리를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일단 전법의 결단을 내린 이상 그런 문제에 연연할 필요는 없었다. 마음을 단단히 추스린 붓다는 한 발짝씩 바라나시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붓다에 의해 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