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을 찾아온 사람들이 떠난 적막한 도량에는 벌써 어둠이 내리고 온통 소리의 향연이 시작되고 있다. 온갖 풀벌레 소리와 파도소리가 겹치고 있지만 반딧불이는 마치 지휘자처럼 이리저리 날며 소리 없는 소리로 묘음을 연출해 내고 있다. 잠시 펼쳐 놓았던 어록을 덮어놓고 삼매에 들어본다. 어느덧 일체 소리의 흔적이 끊어지고 나니 동산의 능선에는 달이 솟구쳐 오른다. 관음상 뒤 억새밭에는 수 없는 손들이 솟아올라 달빛을 맞이하고 있다.“누구네 집엔들 밝은 달, 맑은 바람 없으리(誰家無明月淸風).” 『벽암록』 달은 점점 중천으로 떠오르다가 마치 큰 파도를 타는 듯이 구름을 넘어 해맑은 얼굴을 드러내고 있다. 사람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천진면목을 훤칠하게 보여주고 있다. 어느덧 선실에도 하나의 달이 들어오고 나무마다
조과 도림(鳥 道林741~824) 선사는 항주 사람으로, 조과는 ‘새둥지’라는 뜻이다. 절 안에 있는 소나무의 가지가 휘어진 높은 곳에 좌선대를 만들어 놓고 참선을 즐겨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하루는 고을 태수로 있던 당대의 대시인인 백낙천(白樂天, 772~846)이 찾아왔다. 그때도 스님은 그곳에서 참선을 하고 있었다. 그가 올려보며 큰소리로 말했다.“스님, 위험합니다. 내려오시지요.”스님이 백낙천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자네가 더욱 위험 하네.” 자신은 땅에 서 있고, 스님은 높은 곳에 있는데 오히려 자신이 위험하다는 말이 선뜻 이해되지 않았다. 스님의 뜻은 ‘티끌 같은 세상지식으로 교만한 마음만 늘어 번뇌가 끝이 없고 탐욕의 불길이 쉬지 않으니 어찌 위험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가 평생의
가을비 지나간 들녘엔 벼가 점점 고개를 숙이고 영글어가는 모습은 성스럽기만 하다. 논에 물을 가두고 모내기를 할 때는 백화가 만발했고 강남 제비가 찾아와 곡예비행을 하며 집짓기에 바빴다. 볼이 불그스레한 과일은 유난히 뜨거웠던 지난 여름이 있었기에 더욱 탐스럽고 투명한 하늘아래 제 빛깔을 뽐내고 있으니 한가위를 맞이하여 걸림 없는 마음을 드러내고 있다. 머지않아 여기에 싸늘한 기운이 더하고 백설이 휘날리면 더욱 숙성되어 맛과 향기가 진동하리니 어찌 좋은 시절이 아닐 수 없다. 이 모든 것은 사계절이 뚜렷한 이 땅의 은혜이니 참으로 조상님들에게 감사를 드려야 할 것이다. 잠사경잠 선사가 어느날 산놀이를 갔다가 돌아오는데 제자가 어디에 가셨느냐고 물었다. 이에 대답하기를 “갈 때는 풀섭 우거진 곳을 따라 갔다
『벽암록』은 선가의 문헌 중에서도 최고의 반열에 있다. 송 대의 설두중현(980~1052)과 원오극근(1063~1135)에 의해 완성된 이래 수많은 참선수행자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설두는 운문종 계열, 원오는 임제종 계열로 둘 다 기질이 강한 촉(蜀)의 사천성 출신이다. 선은 문자에 의지하지 않고도 마음을 바로 볼 수 있다는 입장이다. 전통적으로 선문에서는 궁극에 대한 섣부른 견해를 경계하는데, 이 책은 도리어 언설로써 그 난해한 문제를 드러내고자 한다. 지금도 알아듣기 어려운 말을 ‘화두’, 또는 ‘선문답’이라 하는데, 공부인의 기량은 한마디 던져보면 드러나게 되어있다. 구산 큰스님께서는 언제 어디서건 물으시곤 했었다. 묵묵부답으로 있다 해서 감춰지는 게 아니다. 그 또한 값이 매겨진다. 고대 그리스 철
새벽 기운이 서늘해지고 귀뚜라미가 우는 것을 보니 어느덧 가을의 문턱이다. 섬에는 올 여름 유난히 비가 오지 않아 꺾일 줄 모르던 더위가 어젯밤 천둥 벼락이 몰고 온 장대비에 물러나고 말았으니 모든 것은 변한다는 사실이다. 제행무상(諸行無常) 존재하는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다.시생멸법(是生滅法) 그것은 일어났다 사라지는 연기의 법이기 때문이다.생멸멸이(生滅滅已) 생멸이 바로 적멸인줄 깨달으면적멸위락(寂滅爲樂) 열반의 즐거움을 얻게 되리라. 위 게송의 유래는 이렇다. 석가모니가 아득한 과거 보살인행 시절에 설산동자라는 이름으로 해탈을 구하기 위해서 고행을 하고 있었다. 이를 본 제석천이 구도의 뜻을 시험해 보기 위해서 험악한 나찰귀의 모습으로 둔갑하여 설산동자 가까이 가서 몸뚱이를 먹이로 바치라는 말을 했
인류 평화의 제전인 올림픽이 시작되었다. 선수와 응원객을 위시한 관광객은 물론이고 세계 100여개 나라의 정상들이 베이징에 모여들었다. 잔치도 큰 잔치다. 이날의 개막식을 밤늦도록 지켜봤던 것은 중국인들의 문화의 역량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여겼기 때문이다. 준비 단계부터 관심을 끌었던 새 둥지 모양의 주경기장은 로마의 콜로세움 이후 가장 이색적이고 독특한 건축물로 평가받기도 했다. 토테미즘(totemism)은 한 사회나 개인이 동물이나 자연 대상물과의 신비적 관계 또는 친족관계가 있다는 믿음에 근거한 복합적인 관념이나 의식으로 인류의 정신문화에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그 많은 상징 중에 하필 새 둥지였을까? 새 둥지에는 새가 사는 법, 어쩌면 다시 비상하고 싶은 중화민족 염원의 발로가 아닐까
태풍 갈매기가 많은 상처를 남기고 지나갔지만 섬에는 비가 내리지 않아 예년에 없었던 가뭄이다. 볼일이 있어 폭염을 뚫고 방문한 시내에 있는 절에서 한밤중에 맞이한 천둥벼락은 마치 천지가 무너지는 듯 요란하다가 몇 시간 동안 장대비를 퍼붓기 시작했다. 밤새 걱정이 되었지만 다행히 하늘은 아무런 흔적이 없고 여여한 모습으로 새날을 맞이하고 있었다. 사람의 성품은 마치 허공과도 같아 잠잘 때나 깨어있을 때가 한결같아서 차별이 없는 오매일여이다. 허공이 밝음과 어둠에 응하지만 물들지 않는 것처럼 사람의 성품도 깨어있어 작용할 때나 잠잘 때가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범부는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쓰기 때문에 둘이라고 착각하여 고통 속에서 헤매고 깨달은 사람은 분명하게 알고 쓰기 때문에 자나 깨나 한결같다. 수
호피인디언에게 기우제는 신성한 기도빗속에서 촛불 든 이들도 ‘호피인디언’ 미국 북동부 애리조나 사막 지대에는 호피(Hopi)인디언들이 산다. 사회학자인 머튼(Robert K. Merton, 1910)은 그들의 기우제 풍습을 연구했는데, 하나의 문화가 그 사회를 위해 어떤 잠재적인 기능을 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1년 강수량이 2,500mm이상이면 열대다우림, 600mm이하면 숲이 자라기 어려운 초원지대, 250mm이하면 사막이 생겨난다. 비 한 방울 내릴 것 같지 않는 오지의 사막에 씨앗을 뿌리고 거두기를 반복하며 살아가는 경작의 전통은 선사시대까지 올라간다. 모래언덕의 경사면 아래는 바람을 피하기 좋고, 비가 오면 가장 많은 습기를 머금는다. 그곳에 옥수수, 콩, 호박을 심는다. 호피 인디언 사회의
촛불은 ‘마음의 소’ 찾으려는 몸부림깨달음 사회화 하려는 몸짓 계속돼야 한바탕 굵은 소나기가 바다를 지나가니 폭염은 흔적 없이 사라지고 바로 청량한 세계가 드러난다. 이맘때쯤 점심을 먹고 나면 뒷산 절마당에는 소들이 가득했다. 방학을 맞이한 친구들은 소고삐를 풀어놓고 멱을 감으며 놀이에 빠져 시간가는 줄 모르는데 어느덧 배가 불룩한 소들은 뉘엿뉘엿 지는 해를 따라서 산을 내려온다. 이때 집으로 향하는 행렬은 참으로 넉넉하고 평화로운 한 폭의 그림이었다. 절에 가면 벽화에는 어김없이 소 그림이 등장한다. 소는 사람의 본래 성품을 가리키며 따라서 생명의 본질을 상징하고 있다. 장대비 속에서도 촛불이 꺼지지 않고 계속되고 있는 것은 잃어버린 마음의 소를 찾으려는 몸부림일 것이다. 그 동안 소를 찾으려는 나머지
현사 사비(玄沙師備, 835~908)스님이 대중 법문을 하였다. “여러 총림의 고승들이 모두 ‘사람을 제접하고 중생을 이롭게 한다’고 하나, 갑자기 귀머거리, 봉사, 벙어리가 찾아왔을 때는 어떻게 맞이하겠는가? 봉사에게 불자를 곧추세워도 그는 보지 못하며, 귀머거리는 일체의 말을 듣지 못하며, 벙어리에게는 말을 시켜도 하지 못한다. 만일 이들을 제접하지 못한다면 불법은 영험이 없는 것이다.” 한 학인이 이 말을 가지고 운문 문언(雲門文偃(864~949)선사를 찾아가 가르침을 청하였다. “절을 해봐라.” 절을 올리고 일어나던 학인은 스님이 주장자로 밀치자 몇 걸음 물러섰다.“너는 눈이 멀지는 않았구나.” 스님께서 가까이 오라 하자 학인이 다가섰다. “귀머거리는 아니구나.” 그리고는 다시 물었다. “알았느냐
사찰은 잡철을 강철로 만드는 용광로난파선 같은 세상서 참된 섬 찾기를 포살 법회 참석차 모처럼 출가 본사를 찾았더니 쏟아지는 장대비는 더욱 성성하게 성품을 깨우고 떨어지는 자리마다 그윽하여 물듦이 없으니 여기가 정혜쌍수의 고향 조계총림이다. 많은 대중들이 법당에 함께 모여 묵은 허물을 참회하고 다시 범하지 않기를 발원하니 천둥은 일갈하고 대중들은 법비에 젖어 청정법신을 통째로 드러내고 있다. 여름 수련회 준비가 한창이다. 산사라고 해서 더위가 없는 줄 알고 찾아가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쇠가 뜨거운 용광로에 들어가서 잡철을 모두 제거하고 나면 강철로 다시 태어나듯이 수련회도 마찬가지여서 세상사에서 찌들은 번뇌와 무명을 밝은 지혜로 돌이켜 전환하는 과정이다. 잠시 사자루 수련장에 앉아서 지도법사 시절을 떠올리
불편함 견디는 자세가 진리의 마음스스로 행복해야 남도 행복하게 해 『울지 않는 늑대』라는 책이 있다. 캐나다의 동물학자인 팔리 모왓(Farley Mowat. 1921년생, 캐나다의 자연학자 겸 작가)은 젊었을 때 캐나다 야생생물보호국의 연구에 참여했다. ‘순록을 닥치는 대로 잡아먹고 인간을 해치기까지 하는 늑대에 대한 조사’로 캐나다의 북극 지역에서 1년가량을 보내게 되는 데, 이 책은 바로 그때의 기록이다. 순록은 늑대에 먹힐 위험을 피해 목초지를 따라 하루에 50km의 속도로 여름동안 거의 3000km를 이동한다. 순록을 찾지 못하면 늑대는 굶어 죽기 때문에 이 둘은 일생을 쫓고 쫓기며 살아간다. 당국은 순록을 보호하기 위해 늑대의 개체수를 대폭 줄여주었다. 그런데 순록은 시름시름 생기를 잃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