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여전히 나는 탐행자, 진행자, 치행자다. 골고루 다 갖추었다. 욕심도 많고 화도 잘 낸다. 종종 어리바리하게 행동할 때도 있다. 그런데 그렇게 욕심낼 때, 화낼 때, 어리바리할 때도 참주인공인 나는 항상 같다는 것을 예전엔 몰랐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렵지 않은, 조금만 고민해보면 알 수 있는 사실인데 선원에서 공부하기 전에는 몰랐다. 화를 내기 전의 나, 화를 내는 나도 결국 같은 나다. 그 ‘나’가 목종 스님이 강의시간에 내게 가르쳐주신 ‘참나’ ‘진여자성’ 임을 믿고 이해하며 조금씩 느낀다. 시간이 지날수록 안심한다. 이
무수한 인연으로 이어져 지금 여기 내가 있다. 나는 어떤 인연으로 불자(佛子)가 되었을까. 지난 기억의 자락들이 파노라마가 되어 온다. 이 생에 태어나서 잘한 것 중 첫 번째가 불교와의 인연임을 당당하게 밝힌다. 어린시절, 관세음보살님은 나의 해결사였다. 조금이라도 어렵고 힘들면 그저 ‘관세음보살’을 염하곤 했는데 그것은 순전히 할머니의 지극한 불심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불교와 만날 수 있었으니, 할머니의 손녀로 태어난 것에 감사를 드린다. 사실 불교는 30대까지 그저 그랬다. 어려울 때만 ‘관세음보살’을 염하는 최후의 도피처 같은
수행을 시작한 지 2년 10개월만에 대비주 10만독을 성취했다. 사람들 앞에 설 수 있는 자존감과 자신감을 회복했다. 많은 대중 앞에서 당당하게 수행기를 발표했으며 영상인터뷰도 해냈다. 그리고 법명 지안(智安)을 받음으로써 전에 있던 나를 버리고 새롭게 태어났다. ‘덕양선원’ 다음카페 수행일기 게시판에 처음으로 댓글 쓰던 날을 잊을 수 없다. 썼다가 지우고를 수없이 반복했다. 그 모습은 마치 병아리가 알에서 깨어나려고 부리로 수없이 껍질을 쪼는 것 같았다. 그러던 내가 이제는 수행일기도 쓰고 법문 필사도 한다. 도전하는 힘을 수행으
대비주수행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5년 전이다. 큰아이가 중학교 1학년이었을 때 담임이자 생활부장이었던 선생님 소개로 대비주수행을 만났다. 선생님은 당시 3학년인 아이의 문제로 상담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다. 긴 상담 끝에 선생님은 내게 책 한 권을 주셨다. 그분은 교육현장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전법하는 수행사례로 ‘법보신문 무진등’에 소개된 조미경(수일) 선생님이다. 책은 일산 덕양선원 법상 스님의 법문 중 ‘대비주수행’에 관한 것들을 엮은 책이었다. 책에는 다양한 수행 사례들이 있었지만 모두 다 내 이야기 같았다. 책을
참회를 거듭하니, 모든 인연에 대한 감사함이 마음속에 가득 차올랐다. 나약한 존재로 여겼던 나에 대한 참회와 동시에 용기있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다짐이 커졌다. 염불하며 정진했던 천일동안의 기도는 지금껏 살아온 모든 날 중 가장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스님과 함께 한 천일동안 자연스레 예불의식을 익혔고, 어려웠던 경구들도 마음속으로 들어왔다. 그중에서도 ‘천수경’의 ‘無爲心內起悲心 (함이 없는 마음 중에 자비심 내어)’과 ‘願我恒隨諸佛學 (부처님을 따라서 항상 배우며)’이라는 두 경구(經句)가 나의 원력으로 자리매김했다. 이 경
모두 코로나로 힘들고 지쳐가는 가운데 나는 날마다 부처님의 은혜 속에서 살려지고 있다. 이처럼 어려운 시기, 작지만 소중한 신심이 전해지길 바라본다. 한없이 부족한 내가 힘든 모든 이에게 희망과 용기를 드릴 수 있기를 매일 기도한다.불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 결혼한 지 얼마 안 돼 데면한 시어머니의 이끌림에, 마지못해 사찰을 방문했다. 돌이켜보면 이것이 나와 부처님과의 인연의 시작이 아닌가 생각한다. 시어머니 따라 절을 방문하게 된 후,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로 지내며 1년에 한두번, 스트레스가 심할 때마다 절에 갔다. 아
참선과 법문을 마치고 나면 10명 내외로 짜여진 조에서 도반들과 서로의 경험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선원에 나오지 않는 나머지 날은 제일 조용한 방 안에서 최소 40분 정도를 앉았다. 그리고 하루를 마무리할 때 시간표에 자율적으로 기록했다. 저녁에 일정이 있으면 지하철이나 버스 안에서 잠시라도 한 점을 찍고 집중하려 했다. 몸이 너무 안 좋거나 피곤할 때는 방석이 아닌 의자에 앉아서라도 참선하려 했기에 나름 포기하지 않았다는 뿌듯한 마음으로 시간표를 채워나갔다. 그래서 몇 달 뒤, 기초반을 수료하던 날에는 무엇이라도 얻은 양 자신
즉금차처(卽今此處). 이 4자를 오롯이 이해하기까지 몇 년이 걸렸을까. 아니, 완벽하게 받아들이려면 몇 년이 더 걸릴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을 그 시간을 금강선원에서 혜거 스님, 참선반 및 청년반 도반들과 함께 보냈다. 그리고 앞으로도 보낼 시간이 힘들지 않을 것이라며 매번 감사하고 있다. 어릴 때는 어떤 종교에도 관심이 없었다. 부처님오신날처럼 공휴일이 주중에 걸리면 하루라도 더 놀 수 있길 기대하며 살았다. 그렇다보니 금강선원이 위치한 동네에서 30년 넘게 살았음에도 그 존재를 전혀 몰랐었다. 간혹 “금
참다운 수행이라 말할 수 있게 된 것은 각산 스님의 ‘안반수의경’을 듣고나서다. 오랜세월 수행했지만 풀리지 않는 답답한 무언가가 자리잡고 있었다. 공부를 새롭게 시작하는 마음으로 강의를 듣기 시작했다. 강의를 듣는데 용어가 낯설고 생소해 교학에 무지함이 부끄러웠다. 그후 참선법회에 참석해 지도에 따라 실참했지만 이상하게 숨이 가쁘고 불편했다. 스님은 “잘하려 하지 말고 숨쉬는 것을 알아치리기만 하라”고 말해주셨다. 어느날 카페에서 차를 마시며 스님 글을 읽던 중 “마음의 드론 띄우고” 라는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글귀를 생각하며 내
내가 불교를 만난 것은 돌아가신 시아버님 시신을 둘러 친 병풍 앞이었다. 2대 독자의 외며느리로 그것도 막내며느리가 된 나는 6개월 정도 시부모님을 모시고 산 것 외에 크게 정을 느낄만한 시간이 없었다. ‘이렇게 보내드려야 하나’ 생각하던 중 누군가의 지장보살을 부르면 좋은 곳으로 간다던데라는 말을 듣고 그때부터 나는 지장보살을 고성으로 부르고 있었다. 하루는 스님이 먼데서 매 재를 어떻게 오냐며 ‘금강경’을 한편씩 독송하라고 했다. 그래서 가족들을 앉혀놓고 재 때 마다 ‘금강경’ 한편을 읽었다. 막재를 지내고 온 날, 꿈에 시아버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49가지’를 수행주제로 다루며 ‘MS버킷리스트 49’를 작성했다. 이중에 ‘시부모님께 애교 부리고 용돈 받아보기’가 있는데 시어머니의 기억이 희미해져서 불가능해 보였다. 그래도 진심을 전해야겠다고 생각해 생신날 편지를 써 읽어드리니 곁에 있던 시누이가 어머님 대신이라며 용돈을 주었다. ‘리마인드 웨딩’도 잊지 못할 성취다. 전에는 남편 얼굴도 쳐다보기 싫었는데 지금은 그 마음이 다 녹고 더 편안하고 환하게 웃고 있다. 어느날 남편의 건강이 악화돼 수술을 해야했다. 사업이 악화되면서 남편에 대한 주변의 여러
일산 덕양선원을 찾은 것은 2015년 3월1일로 내 인생이 최상의 길로 들어선 날이다.일찍이 교직에 몸을 담고 평탄하게 사는가 싶었는데 남편의 사업이 어려워지고 시부모님이 번갈아가며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시면서 집안이 통째로 흔들렸다. 젊지 않은 나이에 0점도 아니고 마이너스에서 다시 시작하려니 경제적으로 힘든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비슷하게 시작한 주위의 동료들과 자꾸 비교되면서 속이 상하고 우울했다. 또 거리가 먼 학교로 발령 받아 장거리 통근, 살림, 병간호 등 많은 일을 해내야 하는 상황을 몸이 감당해내지 못해 결국 한동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