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송용 『천수경』’의 내용 구성을 살펴보면 다라니의 독송이라고 하는 본래적인 목적에 부합하는 부분과 그러한 의례를 수행(遂行)하기 위해서 필요한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예컨대, 「신묘장구대다라니」 그 자체는 전자에 해당하며, 그를 독송하기 위해서 그 이전에 행하도록 요청된 발원 부분이나 극락의 삼존을 비롯한 여러 불·보살을 청해서 모시는 소청(召請) 부분은 후자에 해당한다.한편, 다라니의 독송이라고 하는 본래적인 목적에 부합하는 부분도 아니면서 그 부분을 독송하기 위해서 필요한 보조적인 것으로 보기도 어려운 부분이 있다. 바로 참회 부분이 그것이다. 「참회게」, 「참제업장십이존불」, 「십악참회」, 그리고 「참회진언」 등이다. 이 참회 부분을 독립적으로 이해할 때, 우리는 ‘독송용 『천수경』’에 있어서 참
스스로 극락의 문을 걸어 잠그는 것 Q. 극락왕생에서 제외되는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만약 그 말이 맞는다면 염불은 온전히 믿고 따를 수 있는 수행이 아닌 것 같습니다. 잘못 들은 게 아닙니다. 법장비구의 48대원 중 18원에서 “다만 오역죄를 지은 사람이나 정법을 비방하는 사람은 제외한다”고 분명히 못을 박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해는 말기 바랍니다. 아미타불이 마치 물건을 고르듯이 마음에 들거나 들지 않거나에 따라서, 사람들의 극락왕생 여부를 결정하시는 게 아닙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스스로 제외된다고 하는 것이 맞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정법을 비방한다는 것은 자신의 참된 생명가치를 돌아보지 않은 결과이니, 벌인 인과에 따라서 당연히 제외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역
“모름지기 자신이 지은 죄와 업장이 마치 저 바다와 같음을 알아서, 이참(理懺)과 사참(事懺)으로 소멸할 줄 알아야 한다.” 이 말씀은 바로 보조지눌 스님의 저서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여기서 이참은 인간은 본래 부처이므로 죄는 본래 없음을 말하는 돈오적 참회를 가리키는 것이며, 사참은 현실적 입장에서 볼 때 여전히 중생인 까닭에 참회해야 할 죄가 있다고 보는 점수적 참회를 말한다. 물론, 이참과 사참은 ‘독송용 『천수경』’ 안에서 확인할 수 있음은 앞서 살펴본 그대로이다. 그런데, 이참과 사참을 둘 다 함께 닦아야 한다고 보는 입장을 보조지눌이 최초로 제시한 것은 아니다. 이러한 사고는 중국 천태종의 개조 지자(智者, 538∼597)대사에게서도 확인된다. 다만 그는 이참을 ‘존
보조지눌(普照知訥, 1158∼1210) 스님의 사상을 연구하는 보조사상연구원의 간사로 일한 시대(1987∼1992)가 있었다. 『천수경이야기』는 처녀작 「보조지눌의 이문정혜(二門定慧)에 대한 사상사적 고찰」(『한국불교학』 제14집, 1989)이라는 논문을 발표한 뒤의 일이었다. 그런 까닭에 내 『천수경』 읽기에는 보조선(普照禪)의 입장이 투영되어 있었다. 과연, 보조선과 ‘독송용 『천수경』’ 사이에 존재하는 동일한 지평은 무엇이었을까?불교의 많은 수행법은 모두 현실적 인간의 존재양상을 변화시켜 가는 치료법이다. 그런 점에서 현실적 인간을 어떻게 보는가 하는 진단의 문제가 처방의 제시를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위상을 차지할 수밖에 없게 된다. 과연,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을 설정하지 않고서
사실 나는 분류하는 것을 매우 좋아한다. 분류 매니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잊어서 안 되는 것은 어떤 것의 성격을 규정하고, 다른 것과 차별하는 것에는 위험도 따른다는 점이다. 복잡한 것을 단순화시키지 않고서는 분류할 수 없기 때문이고, 그러한 단순화에는 잃어버리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흔히 이용하는 신수대장경 속에서 ‘원본 『천수경』’을 찾아보면, 그것은 밀교부 속에 분류되어 있다. 그 중심에 다라니가 존재하므로 밀교부에 분류하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불가피한 면이 인정된다. 그런데, 여기에 함정이 있다. 이러한 분류는 ‘원본 『천수경』’의 가르침을 밀교적인 것으로만 제한해서 이해토록 할 우려가 있는 것이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천수경』에 대한 빼어난 해석을
국내에서만 공부해온 사람은 누구나 유학에의 꿈을 꾼다. 내게 그 꿈의 성취는 교토에서의 1년(2002. 8∼2003. 8)으로 현실화되었다. 그 새로운 체험은 『천수경』을 보는 나의 눈을 더욱 깊게 하였다. 사람, 책, 그리고 현장이 새로웠기 때문이다.고백하건대, 일본에 가기 전 『천수경』에 대해서 나는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자신하였다. “원본 『천수경』 자체에는 무슨 사상이 나타나 있는가?” 지도교수 다나카 선생의 이 질문에 나는 그것이 교만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사실 일본에 가기 전에 쓴 몇 편의 『천수경』관련 논문은 ‘독송용 『천수경』’에 몰려있었을 뿐, 그 성립의 모태가 되는 ‘원본 『천수경』’에 대해서는 진지한 성찰이 부족했다. 그런 나의 허물을 돌아보게 한 것이 다나카 선생이었다. 「원본 천수
하나의 책이 마땅히 존재해야 할 이유는 다른 책들에는 없는 그 나름의 새로움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다. 이런 기준을 나의 『천수경이야기』에 적용시켜 본다면, 무엇보다도 다라니의 의미를 번역하지 않고 있다는 데에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나모라 다나다라 야야 나막알야….” 이러한 다라니는 얼른 들어서 그 뜻이 이해되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사람들은 그 의미에 대해서 의문을 갖게 되고, 또 알고자 한다. 다라니를 다시 산스크리트로 복원한 뒤, 그로부터 그 의미를 찾아내는 방법을 학자들은 앞다투어 취해왔다. 나 역시 정식으로 발표한 것은 아니지만, 학생들과 함께 현재 전하는 신묘장구대다라니의 이본(異本)들에 대한 언어적 해석을 탐구해 본 바 있다. 그 결과를 발표하지 않은 것은 다른 학자들이 상세한 연구를 발표하고
『천수경』 강의를 법보신문에 연재했던 것은 내 나이 약관 삼십대 초반의 일이었다. 그래서 아쉬움이 없지 않다. 반드시 학문이 연륜과 정비례하는 것이 아닐지 몰라도 내 경우에는 세월이 흐르면서 이해가 더욱 깊어지고 있는 것 같다. 『천수경』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 하나의 예가 『천수경』을 『백화도량발원문(白華道場發願文)』과 심도 있게 연결시키지 못하였다는 점이다.신라의 의상(義相, 625∼702)스님은 『백화도량발원문』이라는 글을 남기고 있다. 우리말로 옮겼을 때 3페이지에 지나지 않는 짧은 분량인데, 그 일부에 다음과 같은 발원이 있다. “…제자 역시 관세음보살님을 정대하오니 / 십원육향, 천수천안과 대자대비는 / 관세음보살님과 같아지며 / 몸을 버리는 이 세상과 몸을 얻는 저 세상에서 / 머무는 곳곳마
『천수경』은 천수천안관세음보살이 천수천안관세음보살에 대해서 말하는 경전이다. 그런 까닭에, 『천수경』을 독송하고 신앙한다는 것은 곧 관세음보살을 신앙하는 일이 된다. 관세음보살 염불이 『천수경』 신행의 중요한 프로그램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하나의 대상에 믿음을 지극히 한다는 것은 다른 대상에 대해서는 배제하려는 마음이 생기기 쉽다. 관세음보살을 염해 가면서 아미타불에 대한 믿음을 갖고 염불하려는 마음이 옅어지는 것이었다. 내가 어디에서고 공개적으로 말한 것은 아니지만, 내면 속에서는 이런 갈등이 없지 않았다는 말이다. 만약 이러한 태도를 올바른 것으로 유지하게 된다면, 어느 덧 우리는 종파적·독단적 관점을 취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평소 회통(會通)을 추구하는 내 기본입장과 맞지 않게 된다. 어떻게
『천수경』의 경우, 이미 적지 않은 해설서들이 나와 있다. 나 역시 1991년 1년 동안 법보신문을 통하여 해설을 연재한 바 있으며, 이를 『천수경이야기』(민족사, 1992)라는 제목으로 출판한 바 있다. 13년 전의 일이다. 그런 뒤에도 나는 『천수경』에 붙잡혀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내게 있어서 도대체 『천수경』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다는 말일까? 나는 학자로서 대학에 몸담고 있다. 전공영역이라는 기준으로 한 사람의 학자를 평가할 때, 『천수경』을 공부한다는 것(물론, 『천수경』만을 공부하는 것은 아니기도 하지만)은 평가를 받을 수 없는 일이 된다. 어떤 전공영역 안에도 소속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천수경』의 핵심이 신묘장구대다라니라는 다라니에 있으며 대장경 속에는 그 다라니를 설하는 것이 중심이 된 『
고통의 소멸을 ‘열반’이라 한다. 고통의 원인인 갈애가 소멸되었기에, 고통이 소멸되었다고 한다. 초기경전인 니카야에서는 열반을 ‘탐욕의 소멸, 성남의 소멸, 어리석음의 소멸’이라고 말한다. 『염처경』에서는 ‘놓아버림’, ‘집착 없음’이라고 말한다. 진리는 부정의 방식에 의해서 표현된다. 만약 진리를 무엇이라고 언설로서 표현을 하면, 그것은 어긋난다. 진리는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 이미 내 안에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는 애착으로부터 해탈은 결코 쉽지가 않다.진리는 이미 내 안에 존재여기 잠깐 앉아서 명상을 해보라. 의식의 표면에 수많은 영상이 떠오르고 사라져 간다. 떠오르는 이미지들은 점점 홍수처럼 불어나서 마침내 폭풍처럼 내적 평화와 지혜를 휩쓸고 간다. 어떻게 이 폭류를 건널 것인가? 경전에서는 다음과 같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성제는 부처님의 가르침 가운데 핵심을 차지하는 중요한 가르침이다. 『대념처경』에서는 법염처을 가장 마지막에 설정하고 분량도 가장 많이 할애하고 있다. 하지만 실천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괴로움이다’, ‘이것은 괴로움이 발생하는 원인이다’,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이다’,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분명하게 관찰하는 일은 결코 쉽지가 않다. 먼저 무엇이 괴로움이고 그 원인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더구나 그것의 사라짐의 원리에 대한 철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고집멸도의 실천은 이론적인 이해와 더불어서 선지식의 안내가 필수적 요인이다.괴로움의 원인은 갈망『대념처경』에서는 여덟 가지의 고통으로 알려진 생로병사(生老病死) 네 가지와 싫은 사람과 만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