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더 정진하면서 불자답게 살라고 주신 상으로 여기겠습니다. 포교사로서 초발심을 되새기며 열심히 정진하고 포교하겠습니다.”제7회 신행수기 공모에서 최우수상인 포교원장상을 수상한 이을선(문수월)불자의 ‘기도로 이겨낸 슬픔, 기도로 일궈낸 행복’은 삶의 고난과 역경을 부처님 가르침 속에서 지혜롭게 대처하며 희망을 잃지 않는 모습에서 심사위원들의 큰 호평을 받았다. 이을선 불자는 “신행생활을 돌아본다는 의미와 나의 신행수기가 문서포교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에 동참하게 됐다”고 이번 신행수기 공모에 동참한 동기를 말했다. 그러면서 “
“35년 동안 한 해에 수차례씩 봉정암에 올랐는데 이제는 나이도 많고 어렵겠기에 법보신문에 회향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써봤지요. 대상까지 받게 되었으니 이보다 더 큰 행복이 있을까요. 부처님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일생에 걸친 불사권선과 불자로서 살아온 삶의 궤적을 진솔하게 고백한 내용을 담은 ‘봉정암’으로 제7회 신행수기 공모 대상인 총무원장상을 수상한 이채순(불일심) 불자는 인터뷰 내내 밝은 웃음과 함께 했다. ‘봉정암’은 코로나19가 없었다면 탄생할 수 없는 신행수기였다. 이채순 불자는 올해 76세로 30년 넘게 아산의 한 전
발원이란 나 자신은 물론 이웃과 사회의 고통을 향한 자비롭고 맑은 샘물이다. 그 샘물은 나와 온 세상을 아름답게 적시는 일심의 바다와 같다. 그러하기에 발원문을 쓰고 발원문을 읽는다는 것은 내 생명을 깨우고 내가 사는 공동체를 행복과 평화로 물들이는 진심어린 마음의 기도라 할 것이다. 또한 그 발원이란 내가 처한 상황에 대한 마음의 고백이기도 한 것이다. 거기엔 내가 저지른 죄업에 대한 참회가 담겨 있고 그 죄업을 바꾸어 나와 세상을 청정하게 가꾸려는 원력이 서려 있다.금번 조계종 신행수기 공모전 발원문 분야에 많은 불자님들이 참여
5월은 감사의 달이다. 여느 때와 같다면 좋은 인연들과의 자리가 많기에 행복한 추억을 많이 가질 수 있는 시간이지만 올해는 달랐다. 코로나19 여파로 교계 최대 행사인 부처님오신날 봉축법요식도 윤사월로 연기되고 불교문화축제인 연등회는 취소됐다. 하지만 불행 중 다행인지, 제7회를 맞이하는 대한불교조계종 신행수기 공모에는 코로나가 불자들에게 잠시나마 휴식 아닌 휴식을 안겨주어 좋은 결과물들을 배출했다.신행수기 공모 대상인 총무원장상을 수상한 이채순 불자의 ‘봉정암’은 코로나가 없었다면 우리에게 다가오지 못했을 것이다. 코로나 사태는
새벽녘 여명이 밝아오는 순간 나는 새로운 희망을 꿈꾼다. 겨울나무처럼 살아가리라. 다 벗어버리고도 꼿꼿한 자세, 다 비우고도 꽉 찬 기운으로 끈기와 기다림으로 시절인연이 오면 본래의 모습을 피워내는 것은 잠시도 자기를 잃어버리지 않음이리라.나는 교정기관에서 무기수란 신분으로 이름 대신 수번으로 살아온 지 어느덧 10년이 흘렀다. 지금은 오랜 꿈이던 방송통신대학에 입학해 못다 한 배움의 길을 가고 있으며, 열심히 모범수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처음부터 생활이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나는 살인을 저지른 죄인이다.
부처님 터전에서 20년째 살고 있다. 부처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낙산사에 계시는 관세음보살님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지금 어디에선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힘겹고 어려운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내 나이 겨우 42세에 하반신 마비가 오기 시작해서 44세에는 혼자 일어서고 눕고 걷기도 힘들고 차를 타기도 힘들었다. 두 아들 교복을 다리미로 다려 깔끔하게 해서 학교에 보내야 하는데, 다림질을 할 수가 없었다. 엎드려서 해도 안 되고 서서 할 수도 없고 눈물로 하루하루를 살고 있었다.그러던 어느 날 큰아들 고3때였다. 한 달에 한번 마지
어느덧 50대 후반을 훌쩍 넘겨 발자취를 돌아다보니 굽이굽이 지나온 굴곡진 세월이 가슴 먹먹하게 자리한다. 인생사 사연 없는 삶 없겠지만, 거센 파도처럼 밀려오던 시련을 피하려 발버둥 치던 시간들이 다시금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IMF로 온 나라가 어수선하고 수많은 국민들이 힘들어할 때, 십 수 년을 건축설계사로 성실히 근무하던 남편이 갑자기 일자리를 잃었다. 청약적금 부어 어렵게 장만한 아파트를 팔고 애들 보험까지 해지한 돈으로 남의 땅을 임대해 철물점을 차렸다. 하지만 막연한 생각으로 시작한 장사가 잘될 리 만무했다. 남편이 못
지난 해 추석 이틀 전(9월11일)이었다. 남편은 정년퇴직 후 전원생활을 시작해 6년여를 시골생활 중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 집에 올 정도로 정성을 기울여 800여 평 농장을 가꾸면서 전원생활의 꿈을 실현해가고 있었다.그 날, 추석 전날 온다고 했었는데 웬일인지 전전날 오후 4시쯤 귀가해서는 소화가 안 된다며 누웠다. 동네 한의원에 가보라는 말에 선뜻 일어나 나간 지 한 시간 쯤 뒤 남편에게서 연락이 왔다. 한의원에서 집으로 오다가 쓰러졌는데 누군가 일으켜줘 벤치에 앉아있다고 했다. 마침 아들이 집에 있는 저녁시간이어서 먼저 뛰어가
아주 어릴 때부터 할머니와 할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때론 엄하지만 그 무엇보다 큰 사랑으로 나를 키워주신 할머니, 할아버지와의 기억만큼은 어디 가서 “저는 행복하게 자랐습니다”라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손녀라면 언젠가 찾아올 이별의 순간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첫 번째 순간은 가장 중요한 시기에 찾아오고 말았다. 내가 이제 막 고3 수험생이 된 3월의 봄이었다. 나는 그날 학교를 마치고 바로 할아버지가 계신 집으로 갔고 할아버지께서 코를 골며 주무시고 계셨다. 할아버지 옆에 누워있던 나
“옴 아모카 바이로차나 마하무드라 마니파드마 즈바라 프라바르타야 훔.”그는 이생에서의 마지막 의식을 치르고 있었다. 화장터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기도뿐이었다. 전날 밤, 조문 온 법우가 내게 당부를 했다. 화장터로 모시면 마음이 무너져 내릴지도 모를 테니 마음 단단히 먹으라고. 그때 꼭 기도를 하라는 조언과 함께 네가 할 수 있는 건 기도뿐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법우의 말이 맞았다. 기도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양 손에 염주를 꽉 쥐고서 광명진언을 외웠다. 두 뺨으로는 눈물만 하염없이 흐르고 있었다
코로나19로 인해 대구가 전 세계에 알려졌다. 나는 그 대구에 살고 있다. 불교와 인연이 닿은지는 십여년 남짓 되었지만 유명하다는 사찰을 찾아 기도하는 정도였다. 동화사 대구불교대학에 입학해서 공부한 적도 있었지만 일년도 채우지 못하고 남편의 암 수술과 병간호를 핑계로 중퇴했다. 다니는 절을 정해 놓고 신행 생활을 한 것은 삼 년쯤 되었나 보다. 요즈음은 남편의 사업도 뜻대로 되지 않고 아이들도 직장을 구하지 못하게 되자 기도에 대한 회의가 슬슬 생겨나기 시작했다. 절에 갈 때마다 기도했지만 법당을 나올 때는 뭔가 모자란다는 느낌에
나의 재적사찰은 충남 서산 부석사이다. 할아버지를 따라 절에 가기 시작했고 자연스레 불자가 됐다. 중학교 3학년 어느 여름날 할아버지는 “시집가서도 부석사를 큰집으로 알고 다녀라”하시면서 매미 울음소리와 함께 세상을 떠나셨다. 나는 남들 대학 다니는 스무 살에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대학에 진학한 친구들이 부러워 갈피를 잡지 못할 때는 기도보다는 부처님께 투정부리기 위해 절을 찾았다. 남편은 둘도 없는 효자였다. 인연이라서 그랬을까? 신혼여행에서 남편의 얼굴을 보니 유난히 검었다. 원래 피부색이냐고 물으니 시아버지가 간경화로 돌아가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