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사문제 고민하다 선운사 출가수행일로 걷다 사중 뜻에 소임 만세루 개방이 소통 첫 신호탄지역주민-지자체 신망 두터워뉴타운 내 불교회관도 건립 추진 스님 노후복지 수행마을 순항 중선운사 연계해 미당문학관도 ‘빛’명실상부 ‘석전 기념관’ 건립 희망 ▲법만 스님 선운사 초입 길가. 서정주 시인의 ‘선운사 동구’ 육필원고를 그대로 새긴 ‘미당 시비’가 길손들을 맞이하고 있다. ‘선운산 골째기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안했고/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상기도 남었습니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었습니다’ 4월말, 5월 초면 유독 선운사를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
대각사상연구원(원장 보광 스님)은 최근 ‘대각사상’ 제18집을 펴냈다. ‘용성 스님의 한글 화엄경과 화엄사’를 특집으로 다룬 이번 호에는 관련 논문으로 △화엄사상(1)-법신사상(도업 스님) △백용성스님 국역 ‘조선글 화엄경’ 연구(보광 스님) △한국불교에서 ‘화엄경’의 위상과 한글 번역-백용성과 이운허의 번역 중 ‘이세간품’을 중심으로(신규탁) △근현대 화엄사의 사격과 진진응․이동헌(김광식) △구도자, 도광 스님 연구-그의 보살행과 구도행각(종석 스님) 등이 실려 있다. 또 기고논문으로 △불교계 고승과 국도 천도-고려 및 조선의 국도를 중심으로(황인규) △경허의 삼수갑산과 상채(償債)(홍현지) △1920~30년대 불교계의 사회주의에 대한 인식(김종인) △김일타, 비구승단의 복원, 그리고 현 조
△597년 신라 진평왕 19년 삼랑사 창건 △645년 신라 선덕여왕 14년 자장의 건의로 황룡사 9층탑 창건 △705년 신라 성덕왕 4년 살생금지 △921년 고려 태조 오관산 대흥사 창건 △981년 고려 성종 팔관회의 잡기를 폐지, 왕이 법왕사에 거동하여 행향 △1017년 고려 현종 사람이 집을 버려 절로 만드는 것과 부녀가 니승이 되는 것을 금지 △1377년 현존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으로 판명된 ‘직지심체요절’ 인쇄 △1461년 조선 세조 7년 간경도감 설치, 불전 국역 △1881년 조선 고종 18년 5월 이동인 서울에서 피살 △1893년 조선 고종 30년 4월8일 왕실, 연등회 거행 △1929년 1월 경성방송에서 불교방송 △1917년 8월31일부터 9월23일까지 본산 주지들 일본 시찰, 불교잡지 ‘조선
▲‘수릉엄경’ 팔만대장경의 축소판으로 불리는 ‘능엄경’은 당나라 때 중천축 사문 반랄밀제가 한역했으며, 삼매법과 보살의 수행 단계를 차근차근 해설하고 있다. 특히 7권에 실린 용맹스럽게 정진하여 선정을 닦는 데 힘을 주는 주문으로 알려진 ‘능엄주’는 깨달음에 이르는 빠르고 곧장 가는 길이며 대단히 강력한 권능을 가진 주문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때문에 조선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널리 독송되고 있고, 성철 스님도 수지 독송을 적극 권장했던 수행법이다. 본래 ‘대불정여래밀인수증료의제보살만행수릉엄경’이라는 긴 제목이 붙은 이 경전은 ‘여래의 크고 높은 비밀한 인행이며, 닦아서 증득하신 뜻이 분명하게 드러난 법이며, 보살들이 이에 의거하여 만행을 닦으면 성
▲‘왕초보 한문 박사 되다’ ‘불교는 어렵다.’ 보통 사람들은 ‘불교’라고 하면 ‘어렵다’는 생각에 먼저 사로잡힌다. 특히 한문문화권에서 형성된 불교교리나 용어가 모두 한자어로 번역, 사용되고 있어 어려움이 더하다. 여기에 그래도 쉽게 풀었다는 불교경전이나 한글 반 한자 반이라 할 만큼 한자가 많이 섞인 불교 서적을 대할 때면 그만 희망을 잃고 포기하게 된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에게 ‘불교는 어렵다’는 말이 마치 당연한 공식처럼 여겨진다. 경전에 한글로 구결(口訣)을 달고 언해한 ‘불경언해(佛經諺解)’가 한글이 창제되고 난 직후부터 시작됐음에도 아직까지 경전의 한글화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백용성, 안진호, 용담, 운허 스님 등의 노력으로 대장경판을
기독교 왕성한 활동에 자극경전 한글화가 대중화 확신선사임에도 역경불사 착수꼼꼼한 한글 번역이 특징 ▲대각사상연구원이 10월7일 구례 화엄사에서 개최한 학술세미나. 일제강점기 용성(1864~1940) 스님이 참선수행을 했던 선사임에도 경전 번역에 착수한 것은 타종교의 비방과 도전이 계속되고 불교가 침체되는 속에서 이를 극복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판단했기 때문인 것으로 나타났다. 동국대 교수 보광 스님은 대각사상연구원이 10월7일 구례 화엄사에서 개최한 학술세미나에서 한국 역경사의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꼽히는 ‘조선글 화엄경’(1928년)을 중심으로 용성 스님의 경전번역 이유, 특징, 출판 의의 등에 대
▲신임 원로의장 밀운 대종사. 조계종 원로회의 제8대 의장에 남양주 봉선사 회주 밀운 스님이 만장일치로 추대됐다. 원로회의는 10월10일 오후 2시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4층 대회의실에서 제41차 회의를 열고 제8대 원로의장에 밀운 스님을 추대했다. 또 원로회의 부의장에는 영축총림 통도사 방장 원명 스님과 여수 흥국사 주지 명선 스님을 각각 추대했다. 이날 회의에는 24명의 원로의원 가운데 지혜 스님을 제외한 23명의 스님들이 참석했다. 신임 원로의장 밀운 스님은 1934년 10월 황해도 연백에서 출생, 1954년 대오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비로사에서 무강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수지했다. 1967년 비
석전 축전위원회 주관10월8~19일 동국대서학자들 석전 문학 조명유품 300여점도 전시 ▲ 불교계 최고 지도자이자 당대 대표적 지성이었던 석전 박한영 스님. 개화기 한국불교 최고의 지도자이자 당대 최고의 지성이었던 석전 박한영(1870~1948) 스님을 추모하기 위한 학술강연회를 비롯해 유품전시회, 음악제 등 다양한 행사가 마련된다. 석전 박한영 축전위원회는 10월8일부터 19일까지 동국대 강당과 중앙도서관 전시실 등에서 ‘석전 박한영 축전’을 개최한다고 밝혔다. 석전 스님은 개화기 및 일제강점기와 해방 직후 두 번에 걸쳐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종정을 역임한 당대 최고의 종교 지도자로서 일제의 한국불교 장악에
▲운허 스님이 추진한 ‘불교사전’ 편찬 작업에도 참여했다. 법정은 탑전에서 홀로 수행하다가 해인사로 갔다. 그곳에서 정진에 정진을 거듭하면서도 의문을 떨칠 수 없었다. “이것이 깨달음으로 가는 길인가. 이 길을 가기 위해 출가를 한 것인가. 선배들의 길 말고 나만의 길은 없는가”를 고민했다. 아침저녁으로 장경각에 올라 참회의 예불을 하면서 신심을 모았다. 방선 시간 포행도 장경각 둘레를 거니는 것으로 대신했다. 어느 날. 한 여인이 장경각 계단을 내려오면서 팔만대장경이 어디 있는지를 물었다. “방금 보고 내려온 것이 팔만대장경”이라고 하니, “못 봤다”고 한다. “선반 같은 곳에 가지런히 꽂힌 것”이라고 하니, “아, 빨래판 같은 것 말입니까”라고 되묻
골동품(骨董品)은 오래되어서 희소가치가 있고 또 예술적 가치도 높다. 고완(古玩)·고동(古董)이라고도 하며, 요즘은 ‘골동’이라는 말 대신 주로 ‘고미술품’이라고 부른다. 한편 ‘골동(骨董)’이라는 말은 시대에 뒤떨어지고 쓸모없는 낡은 것이나 그런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기도 한다. 서양에서는 처음에 그리스·로마 시대의 고전문화 유물들만을 지칭했으나 점차 시대와 공간을 초월해 오래된 장식품들을 모두 가리키게 되었다. 동양에서는 중국에서 ‘골동’이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는데 송대(宋代)에는 문인들 사이에서 골동품 수집과 완상(琓賞)이 교양의 하나였다. 명대(明代)의 문인 동기창(董其昌)도 골동을 매우 좋아했고, ‘부생육기’의 작자 심복과 비운의 아내 운이는 둘이서 매일 같이 시장에 나가 싼 공동품을 사다가 매만
“금10개·종합10위 목표…선수·스텝 모두가 영웅” ▲이기흥 단장 “제30회 런던올림픽에 출전하는 선수들이 만들어내는 감동의 드라마를 불자와 국민들에게 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선수들이 최상의 컨디션으로 최고의 기량을 선보여 본인은 물론 국가의 명예를 높일 수 있도록 지원을 아까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의 한계에 도전하는 선수들의 땀과 열정에 많은 격려와 박수를 부탁드립니다.”지난 2010년 광저우아시안게임에서 대한민국선수단을 이끌며 기대 이상의 선전으로 종합 2위의 성적을 달성, 국민들에게 환희와 감동을 선사한 이기흥 대한수영연맹 회장이 다시 런던올림픽대회 대한민국선수단장에 선임됐다. 조계종 중앙신도회 수석부회장인
▲‘한계를 넘어서’ 쌍련선원에 도착하던 날 청담, 성철과 함께 원주실 호롱불 아래 앉아 있었다. 성철과는 잠시 동안 몇 마디 대화를 어색하게 주고받았다. 청담은 성철 옆에서 한마디 말도 하지 않은 채 눈을 지그시 감고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다. 성철이 ‘부처를 아느냐’고 물었다. ‘잘 모른다’고 하니, 성철이 부처님의 생애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조용히 그 얘기를 듣고 있었다. 밤 아홉시가 가까울 무렵, 성철과 청담은 선방으로 건너갔다. 현대 한국불교 최초의 비구니 율사로 불리는 묘엄 스님이 출가를 결심하고 절을 찾은 날, 현대 한국불교 최고 선지식으로 불리는 성철·청담 두 스님은 이제 갓 출가를 결심한 신출내기를 앞에 두고 이처럼 정성을 다했다.
▲스님은 능엄경 독경소리를 들으며 입적했다. 경전 번역으로 일관했던 운허는 1952년부터 ‘능엄경’을 번역하고 사람들에게 강의를 하기도 했다. 이후 몇 년간 동학사, 봉선사, 통도사, 해인사 등에서 학인들에게 강의하던 운허는 1956년 ‘사미율의’를 시작으로 ‘무량수경’, ‘범망경’, ‘금강경’, ‘정토삼부경’ 등 중요 경전들을 번역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된 ‘능엄경’ 인연은 운허가 입적할 때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자신이 지은 ‘능엄경강화’에서 수행과 관련하여 “우리나라는 선종이라고 해서, 참선을 해야 되지 경만 보아 가지고는 성불치 못한다고 한다면 부처님이 경을 설하지 않았어야 한다”며 “성불하라고 경을 설했는데 왜 경 가지고는 안 된다고 하는가.
통합종단 출범 50주년 성과와 과제 2001년 한글대장경 318권 완간기본교육의무화…교육과정 정비복지·NGO 등 대사회 참여 강화 ▲통합종단은 도제양성과 포교, 역경 사업에 주력하면서 한국불교의 현대화를 이끌었다. 특히 1994년 종단 개혁 이후 포교원을 별원(사진 위)으로 설립, 포교를 전담하도록 했으며 행자교육원(사진 아래)을 별도로 운영, 승려 자질 향상을 위해 노력했다. 비구·대처승간의 오랜 갈등을 해소하고 1962년 출범한 통합종단 대한불교조계종은 일제강점기에 나타난 왜색불교의 잔재 청산과 종단 자주화, 한국불교 전통성 계승을 위한 토대를 다졌다. 특히 통합종단이 출범과 함께 내세운 도제양성과 포교, 역경이라는 3대
▲스님은 항상 인재양성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봉일사에서 경송 스님에게 “중 노릇 잘하여 조선 백성을 도탄에서 구해주면 그것도 독립운동”이라는 가르침을 듣고 계를 받은 후, 금강산 유점사로 가서 서기 일을 보며 불법을 배우던 운허는 경송의 은사 봉선사 월초 스님 뜻에 따라 봉선사로 거처를 옮겼다. 당시 자신을 미나미 총독의 수양아버지라며 일본 경찰들을 나무라기도 했던 월초는 운허에게 “봉선사 월초 스님을 만나러 가는 길”이라는 편지를 갖고 벙어리 흉내를 내도록 하는 등 일본 경찰을 피해 안전하게 올 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운허는 그렇게 봉선사로 와서 월초 밑에서 본격적으로 ‘능엄경’, ‘법화경’을 비롯한 경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이때는
황양목(黃楊木)은 나무 이름이다. 회양목과(―楊木科 Buxaceae)에 속하는 관목으로,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회양목’이라고 한다. 한국의 산지에서 많이 자라는데 특히 석회암지대의 산기슭과 산중턱에서 많이 자란다. 키는 작은 것은 50센티, 큰 것은 7m 정도. 상록수라서 정원수로 많이 심는다. 회양목(황양목)은 나무 재질이 매우 단단하고 견고하다. 도장(인장)을 새길 때 많이 사용한다고 해서 일명 ‘도장 나무’라고도 한다. 또 회양목으로 만든 호패를 황양목패(黃楊木牌)라고 하는데, 초시(初試)에 합격한 진사(進士)나 생원(生員)들이 차고 다녔다. 회양목의 용도(조각용도 등)가 매우 다양하여 공물(貢物)로 바치던 황양목계(黃楊木契)도 있었다. 나무 애기는 그만하고, ‘황양목선(黃楊木禪)’이란 근기와 자질
▲스님은 독립운동 중 뜻하지 않은 계기로 불교에 입문했다. 20세기 한국불교사에서 뛰어난 학승으로, 또 불경번역의 일인자로 뚜렷한 족적을 남긴 운허 스님은 ‘나라를 위해서는 애국인, 후배를 위해서는 교육인, 자신을 위해서는 수행인이면서 고금을 통한 지식인’으로 추앙받고 있다. 스님은 1892년 평안북도 정주군 신안면 어호동 전주 이 씨 집안에서 태어나 불과 여섯 살에 한글을 깨우칠 정도로 어려서부터 영민했다. 한글을 깨치고 곧바로 일곱 살에 고향에서 한학을 배우기 시작한 스님은 14세에 한학당인 회보제가 폐지됨에 따라, 집에서 김익진 선생으로부터 유교경전인 ‘논어’, ‘맹자’, ‘중용’, ‘대학’ 등 사서(四書)를 배웠다.
▲ 2009년 10월 총무원장 퇴임식에 함께 한 혜총 스님과 지관 스님. “지관 사숙님이 가시는 곳마다, 인연 닿는 곳마다 부처님의 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부처님 꽃이 피니까 사람들도 진면목을 바르게 볼 수 있었던 겁니다. 큰스님 감사합니다.” 1월4일 지관 스님의 법체를 모신 해인사 보경당에서 조계종 전 포교원장 혜총 스님을 만났다. 보경당에서 금강경 독송이 끝나가자 이내 대중 스님들 대부분이 각자의 방사로 돌아갔으나 혜총 스님은 영정을 바라보면서 말없이 앉아 있었다. 생전 유지대로 꽃 장엄 없이 흰 천으로 꾸민 소박한 영단, 큰스님을 바라보던 혜총 스님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스님이 바로 꽃이야, 사숙님의 삶 그대로가 부
한국불교 대표적 강백으로 ‘고승비문’ 등 수많은 저술 징계자 사면·범불교대회 등종단화합·불교자주권 수호 ▲2009년 10월30일 조계종 총무원장 퇴임식을 마치고 사부대중의 축하를 받으며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을 나서고 있는 지관 스님. 지난 1월2일 원적에 든 조계종 전 총무원장 지관 스님은 불학연구의 최고 권위자이자 종교지도자로 한국불교의 중흥을 견인해 온 선지식이었다. 지관 스님은 1932년 포항 청하면 유계리의 시골마을에서 태어나 16세 때인 1947년 합천 해인사에서 당대 최고의 율사로 칭송 받던 자운 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 1947년 성철·청담·보문·우봉 스님 등이 주도한 봉암사 결사에
▲지관 스님. 불학연구의 최고 권위자이자 종교지도자로 늘 한국불교의 한 가운데서 한국불교의 중흥을 견인해 온 조계종 전 총무원장 지관 스님이 적멸에 들었다. 지병인 천식이 악화돼 지난해 9월부터 서울 삼성병원에서 수면치료를 받아 온 지관 스님은 회복이 안 돼, 1월2일 오후 경국사로 긴급 이송됐으며, 이날 저녁 7시 55분 경 끝내 세연을 마감했다. 세납 80세, 법랍 66세. 지관 스님의 법체는 1월3일 오전 11시 해인사 보경당으로 이운되며, 영결식은 1월6일 오전 11시 종단장으로 엄수될 예정이다. 지관 스님은 1932년 포항 청하면 유계리의 시골마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