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참 이상하다. 벌써 지도상에서 없어져야 할 나라처럼 보이는데 아직도 존속한다. 중국, 일본, 러시아 틈바구니에서 5000년 동안 망하지 않고 이렇게 성장했다는 것은 세계사의 기적이다.”‘강대국의 흥망’을 쓴 영국 역사학자 폴 케네디 예일대학 교수의 말이다. 이는 한국의 불교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 숭유억불의 500년 암흑기를 빠져나온 불교계가 격동의 시기에 온갖 정치적 탄압과 편향을 딛고 급성장한 것은 기적이다.일제강점기 정확한 종교인구를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1930년대까지도 불자수는 30만명을 넘지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올해 정부와 민간 각 분야에서 이를 기념하는 다양한 사업을 펼치고 있다. 특히 100년 전 이 운동을 계획하고 전국에서 큰 울림을 이끌어낸 불교와 천도교 등 종교계에서는 3‧1운동의 의미를 재조명하고 앞으로 3‧1운동의 정신이 한국뿐 아니라 세계평화와 인류화합에 기여하는 등불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다짐을 내놓고 있다.돌이켜보면 우리 불교계는 3‧1운동 과정에서뿐 아니라 그 뒤 수십년의 일제강점기 동안 숱한 어려움을 겪었다. 이 과정에서 일제 강압 통치에 저항하다가 곤혹을 치르는 분들도 많았고, 적
‘대한불교(1977년 11월20일자)’에 따르면 조계종 종정 서옹 스님은 11월11일 비상종령 37호를 공포하고 중앙종회 해산을 명령했다. “본분을 망각하고 권위를 상실한 종회를 그대로 두고서는 현 사태를 해결할 길이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대신 “종단원로 및 중진 15~21명으로 중흥종회를 구성해 종회의 기능을 대신하겠다”고 밝혔다. 중앙종회의 ‘종정불신임 결의’에 맞선 대응이었다. 중앙종회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월주, 설조 스님 등 20여명의 종회의원들은 ‘서옹 종정 등 집행부 간부 직무집행정지 및 직무대행자 선임’을 구하는
160cm도 안 되는 작은 체구로 늘 직경 50cm가 넘는 큰 목탁을 들고 보통 염주알보다 몇 배나 큰 염주를 돌리는 스님이 있었다. 웬만한 사람이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로 걸음이 빨라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했던 이 스님, 언제인가부터 홍도라는 법명보다 ‘방울스님’이라는 애칭으로 더 많이 알려졌다. 홍도(1935~1979) 스님은 한창 활동해야 할 4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세연을 다했지만, 현대 한국불교 포교 역사에 그가 남긴 자취는 크고 넓고 깊어서 ‘작은 체구로 짧은 삶을 멋지게 회향하고 떠난 큰 인물’이라는 평을 들었다.동
박정희 정권에서 대통령 비서실장과 중앙정보부장 등 요직을 지낸 이후락(1924~2009, 이하 HR)은 숱한 사건의 주역 또는 배후 인물이었다. 3선 개헌‧10월 유신 강행과 김대중 납치사건 등 현대사의 비극과 치욕에는 박정희와 그의 이름이 나란히 등장한다. 그런가하면 HR는 1972년 5월 극비리에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을 만나고 두 달 뒤인 7월4일에는 남북한이 합의한 ‘7‧4 공동성명’을 발표해 세상을 놀라게 했으며, 그 뒤 남북조절위원회 남측공동위원장을 맡는 등 남북대화 역사에도 큰 자취를 남겼다.HR이 2009년 10월31일
세월이 흘러도 중요성이 퇴색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 일기가 그렇다. 기록과 성찰이라는 일기의 기본 속성이 크게 작용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린 시절 개학을 앞두고 숙제로 내준 일기를 한꺼번에 써야할 때 날씨가 어땠는지 가물거려 당황스러웠던 기억 등 누구나 일기와 관련한 추억이 한둘쯤은 있을 듯싶다.2004년 국가인권위원회가 초등학교 아이들 일기장 검사는 사생활과 양심의 자유를 침해할 소지가 크다며, 교육부에 일기 검사를 개선하라고 권고하면서 예전의 일기 검사방식은 사라졌다. 대신 담임 선생님과 부모들이 재량껏 일기 쓰기를 지도하고 있
2019년은 3‧1운동이 일어난 지 100년이 되는 해이다. 일제의 폭압에 항거하기 위해 지역과 계층을 초월한 저항, 근대 민족의식 성장의 기폭제, 대한민국의 법통을 세운 출발점 등 3‧1운동이 한국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사건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한국불교계에 있어서 3‧1운동은 무엇인가, 더 나아가 근현대불교사에서 항일독립운동은 어떤 모습으로 기억되고 있으며 그것의 의미는 어떠한가. 지금까지 우리에게 불교계 항일운동의 자취를 남기고 기억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몇몇 인물들이다.불교계 항일독립운동이라 했을 때 전제되어야 할 것은
노학자의 실루엣은 여전히 우뚝했다. 줄무늬가 살짝 보이는 셔츠 위로 반듯하게 자리 잡은 넥타이와 짙은 회색 머플러, 챙이 그리 넓지도 좁지도 않은 패도라를 쓴 모습은 멀리서 보아도 흐트러짐 없이 단정했을 그의 인생을 대변해주고 있었다.세수 여든에 이른 권기종 교수. 현재 동국대 명예교수인 그는 누구보다 많은 타이틀을 지니고 있다. 천태종 원각불교사상연구원장, 한국불교학회장,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장을 역임했고 대한민국 1기 군법사이자 1기 교법사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해인사강원(승가대학) 3기 졸업생이기도 하다. 그의 발자취는 그대
1945년 8월15일 해방과 함께 한국불교계에도 큰 변화의 바람이 일었다. 선학원을 중심으로 한국불교계에 짙게 드리웠던 일제의 어두운 그림자를 걷어내려는 혁신의 움직임이 시작됐다. 이 무렵 선학원에는 조명기, 정두석, 백석기, 장상봉, 곽서순 등 젊은 개혁가들이 불교계 친일청산과 불교혁신을 위한 제도 개선 등을 논의하고 있었다. 부산 범어사에서 해방을 맞은 석주 스님도 선학원에 합류했다. 스님은 이들과 매주 만나 불교혁신안을 연구하고 그 내용을 총무원에 건의했다. 그러나 당시 교단 집행부의 반응은 냉랭했다.‘교단 개혁운동의 명암(김
“지혜의 향기로 마음과 마음을 잇겟습니다.”법보신문의 출판브랜드인 ‘도서출판 모과나무’의 발원이자 지향점이다. 2014년 출범한 모과나무는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스님과 불자들의 신해행증(信解行證)을 책으로 엮어 출간하고 있다. 지난 3년간 출간한 33권에 달하는 부처님의 책(佛書)으로 세상과 소통하고 있다.출범 5년 만에 한해 10~15권의 불서를 출간하는 중형 출판사로 성장한 모과나무는 ‘성철평전’으로 2017년 불교출판계 최고 영예인 불교출판문화대상을 수상했으며 이 책은 2017 교양부문 세
1971년 11월19일 서울 도선사에서 열린 다비식을 끝으로 청담 스님의 장례는 마무리됐다. 그러나 조계종은 한동안 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불교정화운동을 이끌고 통합종단의 기틀을 다졌던 청담 스님의 갑작스런 입적은 망망대해에서 조타수를 잃은 격이었다. 종단 최고 실력자의 공백을 누가 메울 것인지에 대한 관심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곳곳에서 ‘포스트 청담’에 대한 논의로 수군거렸다. 이 무렵 중앙종회는 11월22일 제27회 정기회를 소집한 상태였다.‘동아일보(1971년 11월25일)’에 따르면 11월22일 열린 중앙종회에서는
불자들로부터 ‘역경보살’로 칭송받는 봉선사 조실 월운당 해룡 강백은 통도사 강원을 시작으로 중앙승가대, 봉선사 능엄학림에 이르기까지 긴 세월 학인들을 제접했고, 스승 운허 대종사에 이어 동국역경원장을 맡아 ‘한글대장경’을 완간했다.스님은 역경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변천을 몸소 겪는 동안 사유하고 글 쓰고 행동하는 시대의 지성으로 사부대중의 존경을 받았다. 더불어 불교계 현장 속에서 언제나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하고 관철하려 노력해온 실천가이기도 했다. 때문에 스님이 직접 저술한 책의 머리글을 비롯해 다른 이의 책에 쓴 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