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대학을 다닐 때만 해도 능엄주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고 정확하게는 능엄주라는 것이 있는지도 몰랐던 나. 그 때부터 능엄주가 무엇일까 파고들며 지금처럼 열심히 수행했다면 공부가 진척되었을 것 같다는 아쉬움도 생긴다. 하루 겨우 몇 독, 처음에는 읽어도 하품이 나고 잠이 왔던 시절이 있었다. 겨우겨우 수행해도 되는 것인지 스님께 여쭤보면, 그래도 하라고 하셨다. 한 번씩은 머리가 무척 아팠는데 그럴 때는 잠시 쉬어도 된다고 조언을 해주셨다. 때때로 스님께서 어떤 변화가 있는지 물어보시기도 했지만 특별한 마장이나 상기도 경험하지 못했
스스로 불자라고 하면서도 딱히 불교를 아는 바 없고 누군가 불교를 물어온다면 무슨 말부터 해야할 지 막막한 모습을 보면서 달라지기로 했다. 불자로 살아가려면 적어도 누군가 내게 왜 불교를 믿는가, 불자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물어올 때 보다 명확하고 알기 쉽게 전해야 한다는 각오가 생겼다. 무엇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분명하게 알지 않으면 힘들다고 절감했다. 고민을 거듭하던 중 1996년 9월, 공부의 길을 정했다. 한국불교대학 대관음사다. 대구에서 살고 있는 나에게 적합한 곳이라고 판단하고 이 도량에 등록하여 불교 공
물론 경전의 한 구절, 한 구절 모두 보석과도 같은 귀한 말씀이다. 그런데 ‘법화경’ 중에서도 ‘보문품’에는 유달리 마음을 두드리는 말씀이 있었다. “어떤 중생이 성내는 마음이 많더라도 항상 관세음보살을 생각하고 공경하면 곧 성내는 마음을 여의게 되느니라.” 유독 그 말씀을 통해 나는 생활에서 자신도 모르게 올라오는 화를 가라앉힐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었고 일상생활에도 큰 도움을 얻었다. 이 ‘보문품’의 말씀을 매일 쓰고 새기며 하루를 시작하고자 하는 발원으로 본격적인 ‘보문품’ 사경을 시작했다. 눈을 뜨면 자리에서 일어나, 1
이제는 자연스러운 일이 됐다. 매일 새벽 4시가 되면 어김없다.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조용히 108배 올리고, ‘천수경’을 읊는다. 그리고 ‘법화경’의 ‘관세음보살보문품’을 한 자 한 자 마음에 새기듯 사경한다. 내면의 흐름과 마주하는 소중한 순간이다. 한 자 한 자 경전에 있는 부처님 말씀에 자신을 비추고 참회해본다. ‘자리이타’의 발원이 익어가는 시간들이 쌓여가고 또 그렇게 하루의 문을 연다. 언제 어디서부터일까. 아니면 어떤 인연이었을까. 내 삶에서 부처님과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다.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 손에 이끌려
내 어엿한 기도와 수행도반인 아들과 딸은 어린이법회 출신이다. 중고교는 물론 대학생법회까지 마치고 사회에서 제몫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지금도 1년 중 서너 차례 정도 딸과 함께 청도 운문사 사리암을 오르곤 한다. 이제 자녀들을 어린이법회에 보내고 있는 동림 자모회 불자들도 세월이 흘러 자신의 자녀들과 지금 이 순간들을 떠올리면서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으리라 믿는다. 20년 전 나처럼, 그리고 20년 후 지금 나와 자녀들 모습처럼. 아니다. 어쩌면 지금 자모회 불자들은 10만배 공덕을 쌓으며 20년 전 나보다 훨씬 더 활동적인 여성
어릴 때부터 절에 다니시는 친정어머니를 보면서 커왔다. 해마다 부처님오신날이 되면 어머니와 절에 가곤 했던 시간들이 유년시절의 따뜻한 추억으로 자리하고 있다. 결혼을 하면서 신심은 더욱 증장되었다. 대불련 출신의 남편 덕분이었다. 남편뿐만 아니라 시어머니께서도 신심이 지극한 분이셨다. 남편을 만나 함께 신행 생활을 하며 우리의 아들과 딸도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절에 가는 것을 좋아했다. 결혼과 함께 우리는 이미 불자 가족이 되었다. 31세가 되던 때, 불교합창단 활동을 시작하게 된 인연도 무척 자연스럽게 다가왔다. 백중 날 가까운
한 번에 많은 절을 한 뒤, 길게 쉬는 식의 방식의 횟수는 줄었지만 그만큼 한 번에 몸에 가는 부담이 줄었기에 꾸준하게 절을 해나갈 수 있었고, 나중에 가서는 오히려 처음 기도 할 때 보다 일찍 그날의 절을 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편해진 마음은 절을 하는 동안 많은 것을 살피고, 느끼고, 생각할 수 있게 해주었다.원주 스님께선 내게 본인이 생각하시기에 절은 “세상의 모든 존재들과 내가 서로 따로가 아닌 하나이며, 그것을 느끼는 행위가 절이다.”라고 하셨고, 어느 거사님은 “21일 기도 후, 모든 것을 끊고 출가할 결심이 서지 않으
지난해 여름 산 중 밖의 날씨는 정말 무더운 날씨가 계속되었다고 들었다. 폭염의 날씨에 백련암이라는 좋은 환경의 공간에서 21일 동안 신경 쓸 것 하나 없이 맘 편히 기도만 하면 됐던 내가 이런 후기를 적는 것이 조금은 부끄럽기도 하고 맞는 일인가 싶기도 하지만, 도반 분들이나 기도에 관심 있으신 분들이 잠시나마 부담 없이 보시고 그 분들께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작성해보려 한다.지난해 초, 평소 읽어 보고 싶었던 한경혜 작가의 ‘오체투지’라는 책을 읽은 후 마음 속 작은 울림을 느꼈었다. 그 작은 울림은 혜국 스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며 오만하더라도 사회성이 좋아 주변에 인정받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많은 사람이 그 사람을 인정하고 좋아하지만, 그 사람과 아무 관련 없는 나는 주는 것 없이 이유 없이 그 사람이 밉고 싫다면, 그 사람의 특성은 내가 인정하기 싫은 또 다른 ‘나’일 수 있는 것이다. 무의식적인 자기방어인 셈이다.“나는 오만하지 않아.” “나는 겸손해.” “나는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야.” 이렇게 자각하지만, 오만함과 안하무인의 태도는 내가 인정하기 싫은 또 다른 내 모습인 셈이다. 따라서 내가 아주 미웠던 그 사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말했다. 이 문구는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귀감이 되어 많은 사람들이 피상적으로 가볍게 일상생활에서 쓰곤 한다. 또한 상대방의 태도나 말에 대해서도 보이는 그대로 가볍게 “너 자신을 알고 있니?”라고 하며 상대적 비교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과 ‘알라’의 단순한 단어에 참으로 귀하고 심오한 뜻이 있음을 깊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그 이유가 ‘나’ 또는 ‘삶’ 자체를 상대적이고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건 지극하게 나의 개인적
평지에서도 보행이 자유롭지 못했던 아내가 보통 성인의 걸음으로 오르막길을 올라야 하는 전각에 다녀왔다니….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그 순간 아내가 완쾌될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다. 이루 말할 수 없는 환희심에 젖게 되었다. 여러 병원에서도 치료 효과를 보지 못했는데 이런 믿을 수 없는 경험을 하게 되다니 그동안 쌓아온 지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의심할 수 없는 체험을 통하여 필연적으로 부처님 가르침에 귀의하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부처님께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기도를 마치고 가벼운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
유교 집안에서 출생하여 40대 초반까지는 종교에 대해 무관심한 평범한 생활을 해왔다. 1960년대 일본 유학 중 지도교수로부터 ‘반야심경 입문(마쓰바라다이도松原泰道 저)’을 선물로 받았다. 하지만 일본의 발전된 불교학 연구에도 시간에 쫓기는 여건 속에서 도저히 책 읽을 기회를 만들기 어려워 거의 읽지를 못하였다. ‘반야심경 입문’은 늘 마음 한 곳에 숙제처럼 남아있었다. 마침 명절 연휴가 됐고, 시간을 내서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아인슈타인이 20세기 초에 발표한 상대성원리 가운데 하나인 ‘에너지와 물질(질량)의 등가성의 법칙’을
다시 굳은 결심을 했다. 2013년 7월부터는 법왕정사 청견 스님의 절하는 방식대로 10일 동안 매일 1000배, 한 달 보름 동안 500배씩 해나갔다. 절을 다시 시작한 이후 목 디스크, 허리 디스크, 손목관절, 족저근막염 등 각종 질병으로 성치 않던 팔다리가 건강하던 때처럼 조금씩 회복됐다. 확실히 절은 건강에 도움이 되는 수행임을 스스로 확인할 수 있었다.2013년 10월, 성철 큰스님 열반 20주기를 기념하는 삼천배 정진 공지가 카페에 올라왔다. 다시 삼천배를 해보리라는 결심이 들었다. 성철 큰스님 부도탑 앞에 도착하니 역시
결혼을 하면서 남편과 함께 성당을 다녔다. 교리를 배우고 세례도 받았다. 나름 만족하며 순탄하게 일상을 이어왔지만 IMF가 오면서 경제적으로 힘든 현실에 직면했다. 성당을 다녀도 마음 한구석이 항상 허전하고 편하지가 않았다. 그 시기 시어머니와의 갈등도 힘든 요인이었다. 결국 아파트와 자동차를 정리하며 그나마 빚을 정리했지만 여전히 많이 남은 상황이었다.그러는 사이 큰아이가 교통사고가 나는 등 집안의 모든 것이 엉망이 됐다. 힘이 들어 무속인도 찾았다. 무속인이 시킨 대로 기도를 하며 온갖 방법을 동원했다. 성당은 더 이상 다니지
울산 해남사의 ‘금강경 대정진 법회’. 지난해 신임 주지로 취임하신 혜원 스님께서는 “금강경만을 주제로 정진하는 것은 처음”이라고 하셨다. 물론 나도 나름 오랜 기간 절에 다녔지만 이 같은 정진은 처음이었다.시작할 때에는 아무 생각 없이 그저 매일 ‘금강경’ 독송을 했다. 그런데 19일째 되던 날, 스님께서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을 정도로 힘들어하시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무척 아팠다. 그리고 왜 그렇게도 눈물이 났는지 모르겠다. 읽으면서 나 역시 힘들었지만 무척 재미있고 즐겁고 소중한 경험이었다.막막한 두려움과 설렘으로 시작한 ‘금
울산에 살면서 통도사 울산포교당 해남사를 다닌 지는 어느덧 20여년의 인연이 되었다. 누구나 그렇듯 나에게도 처음 절은 생소한 곳이었다. 그러나 사람이 살다 보면 계기를 만나게 되는 것처럼 나 역시 이런저런 상황에 부딪히면서 그 일이 계기가 되어 기도하게 되면서 절은 점차 친숙한 곳으로 바뀌어 갔다. 부처님께 귀의하는 삶을 살겠다고 발원한 것도 우연한 계기에서 시작됐다. 물론 단순히 부처님을 무조건 믿는다고 해서 마음먹은 대로 뜻하는 대로 모든 것을 이룰 수는 없다. 그래도 부처님을 믿고 의지하며 기도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인생의
사실 자주했다. 그동안 108배는 몸에 익숙한 수행이기도 했다. 하지만 1000배를 하루 만에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1000배를 올리는 동안 온 몸에서 땀이 비가 오듯이 흘러내렸고 다리는 후들거려 제대로 서있기도 힘들었다. 그러나 부처님의 보살핌과 가족들의 화합 덕분에 무사히 끝낼 수 있었다. 뭐랄까. 1000배를 마친 내 마음은 형용할 수 없는 뿌듯함으로 가득 차올랐다.그래서다. 한 번 더 도전했다. 지난해 연말 두 번째 1000배 정진법회에 동참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역시 그 과정은 힘들고 어려웠지만, 성심성의껏 임하며 10
누군가에게 목요일은 한 주의 마감으로 바쁜 날일 수 있다.적어도 내게 목요일은, 행복한 요일이다. 바쁜 직장생활에도 목요일만큼은 불교대학으로 공부하러 가는 날이기 때문이다. 기초반이 끝나고 경전반에 등록할 때만 해도 남편은 직장일도 바쁘고 힘든데 공부까지 한다고 싫어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지금은 목요일 오전이 되면 지각하겠다며 먼저 전화해주고, 힘들어서 빠지고 싶다고 넋두리를 할 때면 오히려 독려해주는 남편이 요즘은 너무 고마울 뿐이다.내가 불교대학에 다닌 후부터 우리 부부의 신심은 더욱 깊어졌다.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주말마다
서운한 감정 알아차리기를 수차례. 그 서운한 감정은 그 친구의 잘못이 아니라 내가 만든 집착의 결과임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수행을 반복하던 어느 날, 친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통화를 하며 나의 감정을 지켜보았다. 그 친구에게 가졌던 서운한 감정은 눈 녹듯 사라지고 없었다.이렇게 명상수행을 거듭하면 할수록 의사소통은 물론, 가족과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회복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항상 나로 인한 조건의 대상에서 떨어져서 보게 되니, 어떤 경계에 걸림이 있는지를 온전히 만나게 되므로 훨씬 자신의 마음
불교 인연은 참 오래되었다. 25년 전으로 기억된다. 첫 딸이 아직 어릴 때, 몸이 약한 아기가 안쓰러워 이런저런 용하다는 방법을 찾아 헤맸다. 굿을 하기도 했지만, 이 방법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도도량을 찾아 열심히 기도해 보라는 주변 권유에 찾아간 포교당에서 아기를 업고 그저 기도하며 매달렸다. 어느새 딸은 건강을 되찾았고, 이것이 부처님의 가피라 여기며 절에 더 열심히 다녔던 것 같다.하지만 채워지지 않는 답답함이 있었다. 그저 소원을 빌기만 하는 신행 생활이 과연 올바른 불자의 삶인지 의문이 생겼다. 불교대학에 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