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몇 주 우리 사회는 한강에서 사망한 한 전도유망한 젊은이의 안타까운 죽음에 많은 이들이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며 애도와 함께 여러 의견을 내놓았다. 그러나 그와 비슷한 시기에 보도되었으나 이내 포털 대문에서 자취를 감추었던 또 한 명의 젊은 죽음은 크게 기억되지 않았다. 심지어 그이의 빈소에 대통령이 몸소 방문해 조문을 했음에도 이 또한 단발의 기사로만 보도되었던 그 죽음은.기사에 공개되었으니 여기에서도 그이의 이름과 신상을 밝히겠다. 이선호씨. 1998년생 올해 나이 23살. 대학 3학년. 등록금 마련을 위해 평택항 부두 야적
오월이면 무엇보다 초파일의 연등 축제를 생각하게 된다. 오방색으로 화려하게 장엄한 등의 축제는 봄의 꽃잔치와 어우러져 생명의 약동을 축복한다. 온갖 생명이 저마다의 향기를 뽐내며 법계를 장엄하지 않는가? 모든 생명은 행복하라, 모든 생명은 자유로워라. 어떤 것이든 생명 그 자체는 경이롭고 존엄하지 않은가? 연등을 꾸미는 오방색이란 온 우주를 상징하는 색깔이다. 오방색에 나의 주체적 색깔을 더하면 시방세계를 상징하는 색깔이 된다.하지만 금년의 초파일 연등 행사도 간단하게 치러야 한다고 한다. 오방색으로 서울의 밤하늘을 축복하는 일도
불기 2565년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붓다의 삶과 길을 생각해본다.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붓다처럼 사는 것인가. 어떻게 살아야 붓다같이 위대한 삶을 살 수 있는가. 깨달음과 진리만 추구하며 관념적으로 사는 것이 붓다 같은 삶인가, 아니면 ‘낡은 수레바퀴’가 되어서도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온몸으로 헌신하고 자비를 행하며 실천적으로 사는 것이 붓다 같은 삶인가.며칠 전, 훈훈한 뉴스 하나가 가슴을 적시고 지나갔다. 5월4일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진 뒤, 뇌사 판정을 받은 20대 여성이 인하대병원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던 말기환자 4
“그 사람은 이미 용서를 받았대요. 그런데 내가 어떻게 다시 그 사람을 용서하냐고요!”이것은 영화 ‘밀양’에서 아들을 유괴 살해한 범인을 자신이 믿는 종교적 신앙심으로 용서해 주려고 찾아갔다가 오히려 범인의 예상 밖의 말에 여주인공이 절규하는 대사이다. 이 장면에서 범인은 “하나님이 이 죄 많은 놈한테 손 내밀어 주시고, 그 앞에 엎드려서 지은 죄를 회개하도록 하고 제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라고 태연하게 말한다. 그리고 자신은 하루하루를 감사히 여기며 살고 있다고 마치 성자처럼 말한다. 용서라는 단어를 이 영화에서만큼 머리가 아니
퀘이드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낯선 이에게 건네받은 노트북의 화면에서는 자신과 똑같은 모습을 한 과거의 자신이라는 자가 ‘미래의 나에게’라며 현재의 자신에게 말을 건넨다. 네가 아는 너는 네가 아니라고. 나인 너는 독재자의 하수인이었으나 이제 잘못을 깨닫고 반군이 되었으니 독재자를 처치하는 것이 나이자 너의 임무라고. 존재하지 않는 기억으로 갖은 난관을 뚫고 만난 반군의 두목은 그에게 말했다. “그대가 누구인지 몰라서 괴로운가? 하지만 그대를 규정하는 것은 기억이 아니라 행동이다.”영화 ‘토탈 리콜’(1990)의 장면이다
꽃샘 추위처럼 정치 바람은 지나갔다. 어느 때보다 폭풍우와 거친 회오리를 동반했다. 이제 지나간 흔적을 정리하는 일만 남았다. 그렇지만 이런 정치 폭풍이 지날 때마다 씁쓸한 광경을 마주하게 된다. 불교적 신념과 가치를 공유하거나 지향하지 않는 사람들이 불교행사의 앞 자리를 차지하는 일이다. 더구나 그런 일이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스님과 신도들의 모습을 보면 한국불교의 현실과 잠재된 DNA를 연상하게 된다. 새삼스럽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신념과 세속적 가치의 만남과 어울림이 어디까지 가능한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특히 신도를 팔아 상응
‘미얀마 사태’에 관한 글을 또 써야하는 마음이 퍽 참담하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을 몸소 겪은 세대이기에 그 마음은 더욱 참괴하다. 전쟁에서도 사람의 목숨을 그렇게 ‘막’ 대하지는 않는다. 전범 재판이 두려우므로. 동물에게조차 동물권이 있다. 하지만 지금 미얀마 국민에겐 법도 없고 인권도 없다. 오직 (짐승만도 못한) 무참한 살육과 도륙만 있을 뿐이다. 안타까운 것은 ‘인간이 망각의 존재’라는 것이다. 불과 2년 전(2019년), 중국으로의 범죄인 송환법 철폐 등에 반대하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벌인 홍콩 민주화 시위(10명 사망
대중을 이끌어 가는 사람을 흔히 ‘지도자(指導者)’ 또는 ‘리더(Leader)’라고 한다. 두 단어 모두 ‘~이끌다’라는 동사에 사람을 뜻하는 단어(者, ~er)가 붙어서 만들어진 말이다. 불교 경전에서도 지도자와 같은 의미를 가진 표현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소를 치는 사람’, 목우자(牧牛子)다.‘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 제39권과 제46권 ‘마혈천자품(馬血天子品)’과 ‘잡아함’ 47권 1248, 1249, ‘목우자경(牧牛子經)’에서 첫 번째는 어리석은 목우자(牧牛子)로 우기를 맞아 이쪽 강가의 언덕도 잘 살펴보지 않고 저쪽 강가
꽃이 피었다. 둥실둥실 꿈무더기 같은 뽀얀 목련들이 망막에 들어와 알알이 꽂히더니, 여기저기 담벼락을 노랗게 물들이며 개나리들이 제 기색을 드리운다. 급기야 가지 끝마다 수다스럽던 벚꽃의 봉오리가 우수수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그들보다 부지런한 매화와 산수유가 인사를 청해온 게 벌써 수주 전이다. 꽃이 피었다. 봄꽃이 피었다. 일제히. 봄이다.그런데 얘들이 벌써 이럴 때가 아닌데. 달력을 본다. 3월 하순. 서울에서 나고 자란 내가 수십 년을 살아오면서 3월 안에 이 기세의 봄꽃을 보는 게 처음이다. 매년 두근거리는 마
불교의 최대 장점은 자유와 자율을 중시한다는 점이 아닐까 생각한다. 혹자는 자유와 자율은 불교의 장점이면서 동시에 최대 약점으로도 평가한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활동하시던 당시 인도를 생각하면 이보다 더한 장점은 생각할 수 없다. 출가자의 나이나 성별, 신분을 논하지 않았다. 누구나 부처님의 품 안에서 자유롭게 수행을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수행자가 지켜야 할 규범은 자율적으로 지켜야 했다. 계율이 성립하고 교단이 발전하면서 출가의 자유에는 제동이 걸렸다. 누구나 원하면 출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출가를 금지하는 예
미얀마가 연일, 시민들로 강을 이루고 있다. 2월1일 일어난 군부 쿠데타 때문이다. 지난 2월28일, 내·외신엔 큼지막한 사진 한 장이 떴다. 미얀마 군부가 평화시위대를 향해 쏜 실탄과 최루탄에 사상자가 속출하자, 무장한 채 평화시위대를 향하는 군경을 도로에 혼자 앉아 막아선 스님의 사진이었다.(5·18 광주민주화운동과 중국 천안문 사태 등) 어디선가 보았던 듯한 기시감(旣視感)마저 들었다.근대 들어 미얀마에서 군부 쿠데타가 일어난 건 벌써 3번째다. 1948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미얀마(버마)는 당시 아웅산이 이끄는 반 파시스트
출가수행자를 나타내는 상징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을 꼽는다면 바로 머리카락을 짧게 자르는 ‘삭발(削髮)’일 것이다. 삭발은 그 자체로 출가를 뜻한다. 또 삭발은 번뇌를 끊임없이 끊어내는 일에 대한 상징적인 표현이다. 그래서 머리카락을 무명초(無明草)라 부르기도 한다. 삭발은 끊임없이 자신을 비워내는 일이기도 하고 또 끈질기게 달라붙는 훈습과의 절연을 뜻하기도 한다.삭발에 담긴 이런 지중한 의미때문인지 삭발에 관한 이야기는 율장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사분율’의 ‘잡건도(雜犍度)’ 가운데 그때에 어떤 비구가 머리가 기니 부처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