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人天)의 스승’이신 부처님의 모습에 대한 형상화는 시대와 국가, 민족의 구분없이 신심을 표현하는 엄중한 행위이며 오랜 고민과 정성의 총화였다. 인도에서 탄생한 불교는 이후 전래 과정에서 각 지역과 민족의 문화와 전통, 고유의 사상을 흡수해 나갔다. 그렇게 조성된 불상은 불교의 전파와 발전 과정이 고스란히 담긴 타임캡슐과도 같다. 하지만 ‘깨달은 이’의 모습을 인간 형상으로 표현하는 일은 석가모니부처님이 열반에 든 이후 무려 400여년이 되도록 감히 시도되지 못했다. 그 오랜 금기는 기원 전후 인도의 북부에서 깨졌다. 인도 북
부처님 입멸 후 2600여년 동안 불교가 그 전통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은사‧상좌 제도 때문일 수 있다. 기록문화가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 은사의 말과 행동은 곧 법이었고, 깨달음으로 향해가는 지침이 됐다. 출가수행자로서 위의를 갖추고 여법하게 승단의 일원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이끄는 은사는 갓 출가한 발심자의 의지처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은사와 상좌가 인연을 맺는 것은 부처님 법을 잇고 승단을 유지하는 불교의 오랜 전통이었다.그러나 현대에 들어 이 같은 전통은 옅어지고 있다. 산업화에 따른 핵가족화로 전통적인 가족관계가 흔들
스님은 스승이다. ‘인천(人天)의 사표(師表)가 스님’이라는 말이 이를 대변한다. 참다운 스님은 상좌, 후학, 재가불자가 불법을 따라 살도록 알려준다. 경책하며 교육을 시킨다. 자신의 상좌가 승려 본분을 행할 수 있도록 안내하며 그 연후에는 다수의 후학, 재가불자에게 법을 일러주고 가르친다.근현대기 불교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나라를 빼앗겼고 승가공동체는 무너졌으며 계율은 이완됐다. 이에 산중불교에서 도회지 불교로, 대중과 함께하는 불교로 나가야 한다는 슬로건이 강력히 제기됐다. 승려 정체성 회복을 위한 정화운동과 교단 재건을 위한
영수여민 선사에게 어떤 제자가 물었다.“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선사가 잠시 말없이 있다가, 제자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내가 나의 행장비(行狀碑)를 세우려고 하는데, 비에 쓸 한마디 말을 지어 보라. 만약 들어맞는다면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를 물을만한 자격이 있다고 할 것이다.” 제자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했지만 아무도 스승의 뜻에 들어맞지 않았다.나중에 영수여민이 세상을 떠난 뒤한 제자가 운문 선사에게 물었다. “누군가가 열반하신 스승을 위해 비를 세운다면 무어라 해야 하겠습니까?”운문이 대답했다. “스승[師]이니
속담에 ‘삼대 가는 부자 드물고, 큰 권세도 10년을 지속하기 힘들다’고 했다. 하지만 불교교단은 2600여년이나 지속됐고 교주를 숭상하고 그 가르침을 실천하고자 매진하는 교도들이 세계에 퍼져 있다. 지금도 교세를 만방에 떨치고 있으니 실로 세상의 통념을 뛰어넘는 큰 부자요 큰 권세를 누리고 있다 하겠다.불교가 이렇게 오래토록 세상에 큰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물론 교주이신 석가모니 부처님의 위대한 행적과 시·공간을 뛰어넘는 보편적 가치가 구현된 가르침 때문이란 건 재론의 여지가 없다. 명백한 사실이다. 하지만
부처님은 삼계의 중생을 해탈로 인도하는 위대한 스승[三界導師]이다. 뭇 중생의 스승인 부처님은 모든 중생이 고통을 여읠 수 있는 정법을 제시했고, 그 법은 다시 스승에게서 제자에게로 끊임없이 이어오며 진리의 등불을 밝혀왔다. 부처님은 “만약 수행자가 올바른 스승(선지식)을 만났다면 도의 절반을 이룬 것이겠습니까?”라는 아난의 질문에 “아니다. 도의 전체를 이루느니라”고 답했다. 법보신문은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스승의 의미를 되짚어보았다. 편집자종교적 의미의 스승이란 단순히 지식이나 기술만을 가르쳐주는 이가 아니라 세계와 인생의 궁극적
수많은 날 가슴 졸여가며 발버둥 치고, 눈코 뜰 새 없이 힘겹게 살아온 삶의 무게에 짓눌리고 있다. 맹구우목(盲龜遇木)보다 더 어려운 몸으로 잉태 되고서도 기억되는 인연의 바람조차 느끼지 못했다. 깊은 어둠이 내리면 복받쳐 오르는 울혈로 시든 꽃 영혼 없는 박제마냥 가위눌리다 스스로 지쳐갔다. 실낱같은 미련을 아픈 마음 가리개 삼아 이 어둠이 걷히기를 울타리 없이 떨고 있는 초라한 별빛으로 위안을 삼았다. 스스로 도진 병은 온 몸 구석구석 메말라 뒤틀어지고 엉클어진 가슴으로 시린 아픔과 함께 누구를 향한지 모를 한숨 섞인 기도만이
포교사가 된 이후 일상에서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을 꼽는다면 장례식장 출입이 잦아졌다는 것이다. 포교팀 총무가 염불봉사 시간을 알려준다. 그러면 가장 먼저 하는 것은 일상복에서 포교사복으로 갈아입는 일이다. 옷이 바뀐 것 말고는 달라진 게 없는데도 근엄한 포교사의 마음가짐으로 변한다. 약속된 시간에 늦지 않으려 바삐 서두른다. 그러다 현관문 신발장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본다. 짧은 머리를 손빗으로 다듬고 옷 매무새를 살핀다. 오늘은 어떤 주검을 만날까. 봉사에 임하는 자세가 달라진 스스로를 보며 만감이 교차한다. “사바 세계에 머무느라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여기저기에서 큰 비명이 들렸다. 길 가던 행인들이 사고 난 곳으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과속으로 달려오던 오토바이는 나의 옆구리를 세게 치고 쏜살같이 사고 현장을 빠져나갔다. 나는 몇 바퀴를 차도에서 구른 후 내동댕이쳐졌다. 그날은 부처님 탄생지인 룸비니를 다녀오면서 네팔 국경에 들러 반납했던 여권을 찾아야 했다. 국경이어서 그런지 꽉 찬 사람들로 정신없고 자동차와 오토바이가 서로 엉켜 경적까지 울려 대는 바람에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촉각을 곤두세우며 몇 번이고 확인하며 건넌 길이었다. 도대체 알 수 없었다
“용왕전에 가자.” “네? 용왕전이 어딘데요?”“날 따라와라. 절에 오면 반드시 용왕전에 가서 절을 해야 한다.”“왜 거기서 절을 해야 하는데요?”“너그 신랑이 ‘용띠’라서 너는 꼭 ‘용왕전’에 절해야 한다.”결혼 후 첫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시어머니와 가까운 절에 갔을 때 나눈 대화다. 결혼 전 10여년간 교회를 다녔다. 중고등학생 시절은 물론 청년예배에도 참석했고, 성가대 활동도 열심히 했다. 친정어머니가 믿은 불교는 무속신앙에 가까웠고, 그 무속신앙이 싫어 교회에 발을 들여놓았다. 무엇보다 8남매 여섯째 딸로 태어나 사랑에 목말
“삼계개고 아당안지(三界皆苦이니 我當安之).”“온 세상의 모든 고통을 내가 마땅히 해결하여 편안케 하리라.”부처님의 탄생게(誕生偈)입니다. 2천6백여 년 전, 부처님께서는 어찌도 이리 정확히 오늘의 인간세상을 잘 내다보셨을까요. 한 치의 틀림도 없는 부처님의 탄생게를 볼 때마다 저는 부처님의 깊고 심오한 법안(法眼)에 감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존경하는 불자 및 국민 여러분, 부처님의 탄생게처럼 우리는 올해도 역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라는 삼계개고 속에 부처님오신날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녹음은 더욱 짙어지고,
오신 바 없이 오신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세상에 펼치시니 부처님오신날은 우리 불자들이 가장 환희롭게 맞이하는 날입니다.이러한 기쁨은 어둠을 없애고 비로자나의 맑고 깨끗한 광명이 나타나도록 우리 불자들이 함께 노력할 때 더욱 의미 있는 기쁨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불자여러분! 작금의 세상은 인류가 생각한 그 이상으로 빨리 변하고 있습니다. 미래는 현실에 벌써 와 있지만 그 변화에 발맞추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변화의 특이점에 서 있는 지구 환경문제와 인공지능 AI로 대표되는 과학기술, 어느 때 보다 과잉된 개인의 이기주의에서 오는 인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