病-死 겪은 후 수행이 삶의 1순위 나와 금강정진회-금강강독회의 도반님들은 청화 큰스님의 수행과 인격, 자비에 매료되어 큰스님법을 따르는 제자들이다. 금강도반님들은 현재 천일기도 중이다. 지난 2006년 11월 25일 해인사에서 아미타불 천일기도 정진을 입제했다. 천일기도 염불선수행 중 나의 목표 가운데 하나였던 아미타불 염불 1만념을 마쳤다. 새벽 2시40분에 깼다가 4시에 일어난다. 안방이 예불기도도량이다. 아미타부처님 사진과 청화 큰스님 사진이 놓인 조촐한 예불법상. 새벽에 일어나자마자 엎드려 ‘부처님 감사합니다. 자지 않고 공부해야하는데 잠자고 나서 죄송합니다. 참회합니다. 밤마다 부처님 안고 자고 아침마다 부처님과 함께 일어난 부대사처럼(夜夜抱佛眠 朝朝還共起 야야포불면 조조환공기)하지 못하고 부
경향 각지에서 도반들이 지리산에 모여 여름 정진법회를 열었다. 나는 갈피가 잡히지 않는 ‘이것’을 잊어버리고는 오랜만에 출몰한 은하수도 보고 물소리도 들으며 혼자만의 시간을 즐겼다. 저녁 무렵 멍하게 대나무 숲가에 서 있었다. 개구들이 엄청 큰 악다구리 소리로 울어대고 있었다. 마침 그 옆을 지나가시던 선생님께서 갑자기 물으셨다.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엉겁결에 불쑥 나도 모르게 대답이 나와 버렸다. “개구리 소리 아닙니까?”나의 당연하다는 이 답변에 선생님께서, “그래요? 나는 새소리인 줄 알았습니다!”어쩌면 천연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오히려 반문하는 것이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어떤 썰렁한 것이 가슴을 쓰윽 스치고 지나가는데, 무엇을 놓쳐버린 듯 너무도 안타까웠다. 하지만 깜깜 무소식이었다.
노환으로 거동이 불편하신 아버지 병수발을 3년 쯤 들었는데, 아마도 이것이 이 공부를 하게 된 단초가 된 것 같다. 그 당시 심신이 몹시 지친 나에게 동료가 명망 높은 어느 스님의 『금강경』 강의를 들어보라고 권유하였다. 종교적 위안도 받고 싶고 또 불교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고 싶은 호기심도 작용해서인지, 이끌리듯 자연스럽게 그 설법 자리에 참석하게 되었다. 나는 처음으로 접한 불법에 큰 감동을 받게 되었고, 내침김에 2년제 불교대학 공부를 비롯하여 수년간 경전공부를 하였다. 특히 ‘무상’, ‘무아’, ‘무주상’, ‘연기’, ‘중도’라는 교리를 피상적으로나마 이해하게 되면서 마치 우주를 얻은 듯 자만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신, 이데아, 자아에서부터 니이체의 ‘해체’나 하이데거의 ‘무’에 이르는 서구철학의
자비수관 수행을 시작한 지 4년이 가까워온다. 30년이 넘도록 사회에 대한 불만족, 가족에 대한 불만족,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한 불만족 때문에 모든 사람을 친구 아니면 적으로 바라보며 심지어는 나 자신조차도 적대시하며 살아왔었다. 그런데 자비수관 수행을 하면서 가장 먼저 나를 입체적이고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되었고, 나 자신에 대한 연민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를 볼 수 있게 되자 서서히 다른 사람들이, 주위 환경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부정적으로만 보이던 사람들의 심리가 그 원인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말과 태도가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렇다! 원인과 조건을 보지 못하면 내 문제이든 남의 문제이든 현상적인 것, 결과적인 것만 놓고 잘잘못을 가리
젊은 시절, 오로지 사회개혁에 뜻을 두고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을 하면서 간간이 직장생활을 했지만 결국 몸과 마음이 너무도 지친 상태에서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었다. 우연히 지인의 소개로 옥포 용연사 불교용품점이라는 걸 인수하게 되었고, 38세에 오로지 ‘은둔’과 ‘칩거’라는 단어만 떠올리며 7평 가게 안에 꼼짝없이 앉아서 그해 겨울을 지내게 되었다. 그런지 얼마 안 되어 지운 스님이 주지 스님으로 오시면서 용연사에는 경전강의와 수련회가 시작되고 점점 절을 찾는 사람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새로운 걸 알게 되는 게 귀찮았던 터라, 강의 한 번 수련회 한 번을 참석하지 않고 반 년 정도가 흘러갔다. 서른아홉 무더운 여름날, 경내 스피커를 통해 지운 스님의 강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침 손님이 없어 가게에
열심히 사경수행에 정진하다보니 1년 반이라는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화살처럼 지나갔다. 그 사이 극락사 사경반은 극락사의 도심 포교당인 대구 이웃절로 자리를 옮겼다. 조금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법할 수 있는 시내로 나온 것이다. 이웃절에서 다시 시작한 사경수행은 나에게 더욱 특별하게 다가왔다. 극락사 사경반에 꾸준히 다니며 정진을 거듭한 인연으로 금강경 사경순례단에 동참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1000일 간의 정진기간은 나 뿐만 아니라 내 주변에도 좋은 기회가 됐다. 사경순례단에서 사경수행을 처음 시작한 어머니와 큰어머니도 사경수행이 이렇게 좋은 것인지 이제야 알게 됐다며 무척 기뻐하셨다. 수행을 함께 하며 서로를 더 이해하고 아낄 수 있는 기회가 된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배워
우연히 배운 한지 공예로 사경과 첫 인연수행하며 자신감 충만…인생 공부 기회로 불교를 처음 접한 것은 어릴 때 부모님을 따라 1년에 한두 번 절에 간 일이 전부였다. 그러나 어느 불자에게나 부처님과의 인연이 과거 어느 생의 일처럼 자연스럽게 느껴지듯 나에게도 아주 오래된 일처럼 불연이 다가왔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인해 대학을 포기하고 직장을 다니면서 우연한 기회에 한지 공예를 배우게 된 것이 불연으로 이어졌으니 여러 생에 걸친 인과에 따른 결과이리라. 사찰에 사는 친구에게 가끔 놀러갔을 때 한눈에 들어 온 금니 병풍은 어린 나의 눈에 너무나 아름답고 장엄했다. 무작정 병풍을 만들고 싶을 만큼 금니 병풍과의 만남은 깊은 감동을 주었다. 친구의 아버지에게 간곡히 부탁한 끝에 금니 병풍을 복사해 처음으로
상기병 이겨내며 지장경 1000독 회향인생 스승 입적에 방황…수행으로 극복 수행이란 목표를 세우고 한번 시작을 했으면 끝까지 밀어 붙어야 한다고 들었다. 도중에 어떤 이유에서든 그만두게 되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지금껏 쌓아온 모든 것들을 포기하고 마냥 쉬라니…. 선뜻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나도 내 목표를 이루고 싶었다. 지금껏 살아온 삶 속에 이처럼 내 스스로의 목표에 매진해온 기억이 얼마나 있던가. 때론 지나친 집착인가 싶어 버릴 줄도 알아야 한다고 내 스스로 수없이 되뇌이기도 했다. 하지만, 차돌과 같이 단단한 신심과 모든 것을 녹여버려야 얻을 수 있는 뜨거운 구도열을 가진 수행자들을 내 목전에서 봐오며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우연히 만난 정일 스님 권유로 지장경 독경3년 목표로 1000독 도전…눈 혈관 파열도 나를 이끌어줄 스승을 만나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내가 올바른 길을 따라 수행을 이어갈 수 있도록 나를 인도해주는 스승을 만난다는 것은 아마도 수많은 전생의 인연이 있어야 가능할 것이라 믿는다. 모든 것을 걸고 수행의 길을 걷겠다고 다짐한 나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어릴 적부터 나는 절에 다닐 기회가 많았다. 하지만 누구나 그렇듯 나 역시도 아무 것도 모르고 그저 철딱서니 없이 그저 그렇게 지인들과 몰려다니기만 했다. 어려서부터 몸이 유난히 약했던 나는 갈 곳이 절 밖에 없었다. 그렇게 지인들과 함께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던 어느날 지금은 입적하신 정일 스님이 계시던 보광사를 찾게 됐다. 처음 만난 정일 스님은 우리에게
사경 전시작품 보며 편견-오만 깨달아 차근히 다시 쌓은 수행 공덕 회향 발원 지난 6월 한국사경연구회 김경호 회장의 개인전을 통해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김경호 회장의 작품들은 미세한 선 처리, 깔끔한 마무리 과정 하나하나가 경외심을 불러일으켰다. 작품들을 대하며 한 순간에 나의 오만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7월에는 국립박물관에서 주최한 ‘사경변상도의 세계’라는 삼국시대 사경변상도 특별전시회를 보게 됐다. 이 전시회를 보며 사경에 대한 내 태도가 확실하게 변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전까지 나를 지배해오던 편견들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절감했다. 6월과 7월 두 달 사이에 사경에 대한 많은 편견들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한때 기초과정을 소홀히 했던 내 자신을 반성하게
지난해 5월 길상암 법회에서 사경 첫 체험 나는 첫 돐 직전 열병을 얻었다. 그로 인해 아주 오랜 세월동안 온몸에 통증을 겪어야했다. 10년 이상 투병을 계속해야 했고, 그 결과 장애를 얻게 됐다. 그 이후 나의 생활은 당연히 남들과 같을 수 없었다. 남의 도움 없이는 움직이는 것조차 힘들었으니 마음의 고통은 그 어떤 것보다도 컸다. 덕분에 행복한 유년시절의 기억 같은 것들은 온데간데없이 오로지 진로나 현실을 헤쳐가야 하는 현실적인 번민만이 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절망과 실의에 빠져 위로 받고 싶을 때, 종교가 필요함을 느꼈다. 그러나 그 틈을 비집고 나를 유혹하는 것은 이웃종교의 전도사며 선교사들뿐이었다. 그들을 접하면서 ‘왜 전지전능하다는 성자는 어린 양들의 육신이나 마음의 고통을 해결해주지 못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남편이 원자력 관련 연구소로 취직하게 됐다. 남들은 부러워하는 ‘꿈의 직장’이었지만 남편은 일상에 쫓기며 수행에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다. 남편이 수행에 소홀해지면서 기다렸다는 듯 많은 어려움과 난관들이 우리 부부에게 찾아왔다. 1986년경부터 본격적인 고난이 밀어 닥쳤다. 친구의 사업을 돕겠다며 남편이 상경을 결심한 것이다. 친구의 회사는 당시 정권을 등에 업고 전도가 유망할 것만 같았다. 대한민국의 모두가 아시안게임으로 들뜬 축제 분위기에 취해 있을 때, 우리에게는 고난이 시작됐다. 남편이 상경한지 한 달 만에 그 회사가 부도가 난 것이다. 여러 악재가 겹쳤고, 결국 남편이 회사의 모든 빚을 떠안게 되면서 빚잔치에 시달려야 했다. 너무 힘든 시간이었다. 불광의 도반들이 내 소
인생에 대한 번민 속에 광덕 스님 만나염불 수행 권유 받고 ‘불광회’서 정진 1975년. 당시 20대의 한창 나이였던 나에게 인생은 번민의 대상이었다. 누구에게나 20대는 꽃다운 청춘의 시절이지만, 나의 20대는 인생과 삶에 대한 고민으로 점철된 시기였다. 당시 나는 광화문에 있는 회사를 다니고 있었다. 직장동료들과 달리 나는 끈질지게 나를 따라다니는 고민들을 해결해줄 무언가를 찾아다니기만 했다. 나를 알고 있던 직장동료들은 나에게 종교를 권했다. 누군가는 나에게 대한성공회를 소개시켜 줬고, 또 다른 누군가는 나를 청담동 성당의 미사로 이끌었다. 새로운 곳을 소개받을 때마다 나는 번민들을 떨쳐낼 무언가를 얻게 되길 기대했다. 그러나 매번 지인들의 소개로 찾아간 곳의 문턱을 넘는 순간 그런 기대는 무참히
사불하며 주력-염불 병행…24시간 정진인내 통해 내 몸-가족 소중함도 깨달아 잘 그리고 못 그리고를 따지는 것은 집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잘 그리자는 생각은 내가 화가가 되고자 하지 않는 이상 애초부터 접어둬야 할 것이었다. 붓을 들고 있는 동안 나는 수행으로써 한초 한초를 뜨는 그 순간을 즐겼다. 내 호흡과 함께 화선지에 나투시는 부처님은 그 날 그 시간의 내 모습을 만나는 것 이여서 나를 속일 수도 없었고 남도 속일 수도 없는 것이었다. 참선, 염불, 간경 같은 것은 밖으로 드러내 보이기가 힘들다. 하지만 한 순간의 호흡과 마음을 모아 사불을 해서 벽에 붙여 놓으면 남편과 아이들이 보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불은 나 혼자만의 수행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붓 한 자루 잡고 마음을 내는데 석
‘개종도 불사’ 원력 세워 기도…실패만 반복우연히 만난 사불수행으로 마음의 조복 받아 부처님 법을 만나고 나서 내가 가장 좋아하게 된 노랫말이 있다. “오늘 세운 이 서원은 끝 없사오리” 이 구절처럼 부처님을 향해 나아가는 나의 서원은 흔들림 없이 나아가리라 생각 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내 수행은 많은 마음의 갈등을 겪으면서 더는 앞으로 나아가기 힘들게 됐다. 그 후로는 이 이상 앞으로 더 나아가지 못한다면 개종도 불사하겠다는 결심까지 해야 할 만큼 힘든 시간을 보냈다. 어떻게 부처님께로 더 나아가고 깨달음을 이룰 것인가? 내 삶에 의미 있는 기도 방법을 찾아서 큰 스님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흔들리는 내 발심의 행로에 대한 답을 구했으나 나에게는 그 답들이 공허하게만 느껴졌다. 기도도 되
매일 새벽 1시간 좌선-1시간 어록 공부100일 정진 정해 놓고 입재·회향 반복 바른 스승을 만나 바른 가르침을 바르게 배우고 바르게 익히는 것은 공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관건이다. 물론 바른 스승 만나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내가 백봉 김기추 선생님을 만났듯이 인생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지극한 원력이 있으면 바른 스승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초심을 잃지 않고 지극하게 꾸준히, 하기 싫은 마음이 일어나더라도 줄기차게, 여유같은 의심이 들끓어도 과감히 떨치고, 어려움을 당해서도 꺾이지 않고 굳건히, 공부의 초점을 정확하게 맞추어서 명료하고 분명하게, 좋은 도반들과 함께 나아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30여 년을 수행하면서 하루하루 지나는 일상 속에서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는 나’
‘나는 누구인가’ 의문…대학 3년 때 불연백봉 선생 無色 법문에 눈물, 정진 시작 청소년 시절 ‘인생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누구나 한번쯤은 고민해 보았을 것이다. 나 또한 ‘나는 누구인가’와 같은 고전적 의문에서부터 세상에 태어난 이유와 가치를 찾아보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 ‘성인도 위인도 아닌 평범한 내가, 기껏해야 80년 정도 살아가는데, 내가 태어나고 죽는다고 세상이 바뀌는 것도 아닌데, 왜 부질없이 왔다 가는 것인가.’‘내가 보고 듣고 인지하는 것이 과연 존재하는 것인가, 그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이 세상은 정말 있는 것인가.’ 등 스스로 해결할 수도 답을 얻을 수도 없는 요상한 물음 속에서 헤매고 또 헤매었다. 그러다가 대학 3학년 때인 1975년 5월 어느 날 남동생과 함께 울타리에
10만 독 후 탐·진·치 삼독심 점차 소멸2010년 5월까지 다라니 100만 독 발원 나에게도 기도의 힘이 생기면서, 종교와는 거리가 멀었던 여동생도 지금은 매주 금요 철야에 함께 수행한다. 부모님을 벼랑 끝까지 몰아가며 방황하던 남동생도 마음을 잡았다. 조상님께도 온 식구가 참석하여 여법하게 천도재를 모셔드렸다. 재를 지내며 나는 끝없이 우러나는 환희심으로 부처님께 감사드렸다. 처음 이 기도 수행을 할 때는 언제나 잠과의 싸움, 게을러지는 마음, 하기 싫은 마음들이 무한히 올라오기도 하였지만, 기도가 계속되면 될수록 그 마음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발원하는 마음도 예전에는 “부처님께 ~ 해주세요” 하는 기도에서 이제는 “부처님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라는 마음으로 변화 되었다. 무엇보다도 수행 후에
스님 권유로 철야 1000독에 도전자신감 얻어 올해엔 10만독 회향 매주 금요 철야기도 시간 어김없이 스님의 목탁소리에 맞춰 신묘장구대다라니 독송이 이어진다. 그 열기는 금요 철야기도에 직접 참석해 본 분들은 아실 것이다. 쌀쌀한 가을밤에 에어컨과 여러 대의 선풍기를 작동해야 할 정도의 열기다. 내가 결혼도 뒤로 하고 이렇게 기도에 매달리는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 스스로 되물어 본다. 2001년 여름쯤으로 기억된다. 지금의 스승님을 처음 뵈었을 때가…. 어릴 적, 부모님 따라 가끔 절에 다닌 부처님과의 인연이 있었다. 물론 “부처님 ~ 해주세요.” 하는 기도였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금강경 사경하고, 독송하기도 하고, 엄마 따라 그 추운 겨울날 조계사 법당에서 손과 발이 꽁꽁 얼 것 같은 추위 속에서
묘원법사 글 통해 ‘진짜 수행’만나좌선과 경행은 삶의 유일한 활력소 지난해 3월 29일, 위빠사나를 기초부터 차례대로 배울 수 있는 한국위빠사나 선원을 찾아갔다. 강의를 들으면서 ‘몸과 마음은 있지만 내 몸과 마음이 아니다’라는 말이 강렬한 여운으로 남았다. 그리고 위빠사나 수행을 배우려면 직접 수행처를 찾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선원을 찾아가기에 앞서 문명의 이기를 누릴 수 있었다. 한국위빠사나 선원의 인터넷 카페를 방문했는데 여러 게시물 중에서도 ‘옹달샘’이라는 코너를 보고부터 나는 그 코너에 중독이 되었다. 묘원 법사님이 수행자들에게 주는 글들이 올라와 있었는데, 삶과 수행이 일치한 글이었고 균형 잡힌 글이었다. 3일에 걸쳐 그 글들을 보면서 머리 속에 있던 먹구름이 확 걷혀나갔다.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