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조계사 불화반 수업을 부러움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곤 했다.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사불에 열중하는 불자들의 얼굴에는 환희심과 편안함이 묻어났다. 그렇지만 나에겐 그 문을 열고 들어가 함께 부처님을 그릴 용기가 나질 않았다. 결정을 하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과 숙고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던 중 평소 알고 지내던 스님께서 나에게 사불 수행을 해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해 왔다. 또다시 부처님을 그리는 일을 해보라는 제안인 것이다. 보통 인연은 아닌 듯 했으나 여전히 망설여졌고, 이에 보다 못한 도반은 사불수행연구회 법인 스님을 찾아가려 하니 자신을 따라 나서라고 했다. 법인 스님이 계신 수원 참마음선원을 찾았다. 사불-부처님을 그리는 수행은 참으로 놀라웠다. 붓으로 그려낸 선에는 사람의 마음 상태가
대부분 불자들이 부모님의 영향으로 처음 불교를 접하듯, 나와 부처님과의 인연도 예외는 아니었다. 나를 부처님 곁으로 안내한 것은 바로 어머니다. 어머니의 독실한 불심은 30여 년 전 갑자기 찾아온 아버지의 죽음에서 비롯됐다. 당시 어머니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자동차도 다니지 않는 경기도 동두천의 작은 사찰을 찾았고, 차가운 법당 마루에 무릎을 꿇고 앉아 아버지의 극락왕생과 자녀의 무탈함을 부처님께 간절히 기원했다. 당시 고등학교 1학년이었던 나에게 아버지의 죽음은 감당할 수 없는 커다란 충격이었다. 지금 돌이켜 보건데, 내가 나쁜 길로 빠지지 않고 별 탈 없이 학창시절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어머니의 간절하고 지극한 기도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어머니의 이 같은 간절한 모습에서 나
그럭저럭 2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나의 모습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절에서 무슨 행사라도 한다면 이리 빼고 저리 빼고 도망 다니기 일쑤였다. 그렇지만 다라니 기도는 놓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도량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다라니 1000독 가행정진에 한번 동참해 보고 싶다는 마음이 일었다. 더욱이 “혼자서 하는 것 보다 도반과 더불어 수행해야만 닦을 거리를 알 수 있고, 다라니 숫자를 정한 만큼은 꼭 할 수 있다”는 스님의 말씀에 자신이 생겼다. 1000독 다라니 기도의 도전을 시작했다. 신기한 것은 지겹고, 조급하고, 하기 싫고, 숫자를 채워야 한다는 마음들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참으로 이해하지 못할 신비한 경험이었다. 1000독 다라니 정진은 16시간을 꼬박 채운 후에야 끝을 맺을
부처님이 계신 법당을 향해 가는 길이 요즘처럼 즐거운 때가 없다. 거리에 지는 아름답게 물든 낙엽들을 보면서도 쓸쓸하다는 예전의 마음이 아닌 참으로 즐거운 마음이다. 기도 정진하는 도량까지 집에서 지하철, 버스를 타고 2시간 정도 가야한다. 그러나 내가 지금 이렇게 걸어 다닐 수 있다는 게 꿈만 같다. 거슬러 올라가 보니 덕양선원 법상 스님과의 인연은 10여 년 전인 것 같다. 딸아이 문제로 고민 하던 중 절에 다니시고 계시던 외숙모님께서 선원으로 인도해 주셨다. 그때만 해도 절에 다닌 적도 없었으니, 부처님께 오체투지 하는 것은 더더욱 해 본적도 없었다. 스님을 친견하자 방하착 수행을 권해주셨다. 6개월 정도 했는데 어느 정도 일이 해결되니 발을 뚝 끊고 잊어버렸다. 그 후에는 1년에 한 번 절을 찾을
매주 목요일 탁발 법회는 또 다른 경험과 감동이었다. 부처님께서는 오직 탁발로만 공양하셨기에 불자들이 잊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행사다. 스님은 “탁발은 돈이나 물품보다는 음식물이 더 큰 공덕이 된다”고 하셨다. 집에서 음식을 정성스럽게 준비해 절에 갈 때의 마음은 또 하나의 즐거움이다. 탁발 게송을 하고 스님 앞에 놓인 발우에 공양물을 넣고 나면, 스님께선 빨리어로 축원 게송을 해주신다. 첫 탁발 때의 환희심을 잊을 수가 없다. 지극히 고요한 마음으로 스님의 법문을 듣는 나의 머릿속은 마치 넓은 초원에 부처님과 마주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난 올해로 세 살이 됐다. 세 번의 안거를 지냈으니 이제 세 살이라는 의미다. 선원에서는 매년 하안거에 들어가는데, 음력 5월 보름부터 8월 보름까지다. 결제에 들어가
붓당 사라낭 가차미(부처님을 의지하여 나아가겠습니다)/ 담망 사라낭 가차미(부처님의 가르침을 의지하여 나아가겠습니다)/ 상강 사라낭 가차미(부처님의 성스러운 제자들을 의지하여 나아가겠습니다) “붓다를 알면 법을 알고, 법을 알면 괴로움에서 벗어난다.”위빠사나 수행도량 ‘붓다의 길따라’ 선원장 진용 스님이 늘상 불자들에게 하는 말이다. 정말 그렇다. 이제 위빠사나 수행을 시작한지 3년 여. 그렇지만 내 입가에는 언제나 미소가 떠나질 않는다. 3년 전 분식집을 운영하고 있는 나는 몸도 마음도 심하게 지쳐있었다. 유일한 위안은 절에 가서 부처님을 뵙는 것. 부처님은 나에게 희망의 끈을 놓지 않게 하는 유일한 존재였다. 아무리 바빠도 초하루와 보름법회에는 빠지지 않고 참석하며 어서 빨리 이 힘든 상황에서 벗어
참선반 총무 소임을 맡게 된 후, 나는 한 가지 실천사항을 스스로 약속했다. 그것은 선방 청소 소임을 맡겠다는 것이다. 여러 사람이 사용하는 선방을 깨끗이 관리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으나, 그보다는 매일매일 청소를 통해 마음 속 번뇌를 쓸어내고 닦아내겠다는 초발심을 되새기기 위해서였다. 또 1080배를 통해 배운 아래로 향하는 마음과 참회의 마음을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도 담겨있었다. 어느 날 선방을 청소하던 중 선방에 모셔진 달마대사 그림을 우연히 바라본 적이 있다. 그런데 달마대사의 모습이 마치 한 송이 연꽃처럼 보이는 것이 아닌가. 선방 청소 소임을 자청하지 않았다면 달마대사 그림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 터이니, 이 또한 부처님의 가피는 아닐런지. 언제부터인지 선원에 들어서면 법당에 모셔진 부처님과
공생선원을 처음 방문했을 때의 느낌은 실망에 가까웠다. 공기 좋고, 경치 좋은 산사를 생각했던 기대와는 달리 서울 도심 한복판 현대식 건물 7층에 자리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마음만 내면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언제든지 찾아갈 수 있는 곳에 위치해 있다는 것이 참으로 고맙고 귀하기만 하다. 내가 공생선원을 찾게 된 것은 3년 전 서울노인복지센터에서 시작된 공생선원장 무각 스님과의 각별한 인연 때문이다. 한국전통택견협회 서울시지부장인 나는 어르신들의 택견 지도를 위해 서울노인복지센터를 방문했고, 그곳에서 명상 수업을 진행하는 무각 스님을 만났다. 당시 나는 정신 수련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기 때문에, 무각 스님의 명상 수업은 큰 관심의 대상이었다. 마침 무각 스님도 전통무예 택견에 많은 관심
1만 배 10만 염불 정진기도 동참을 공지한 후 걱정과 기대가 교차했다. 과연 내가 해낼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와 함께 과연 어떤 사람들이 그런 엄청난 일을 해내는지 궁금했다. ‘일단 가보자. 부처님께 의지해 용기를 내보자’는 다짐 속에 1만 배 10만 염불 정진의 현장인 강원도 영월 만경대산 만경사로 길을 나섰다.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 50분의 정진과 10분의 휴식이 24시간 내내 계속됐다. 아침 점심 저녁 공양시간을 제외하고는 오직 정진뿐이었다. 동참자들은 모두가 대단한 분들이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시간이 갈수록 ‘나무아미타불’ 염불 소리는 더욱 커져갔고, 지친 기색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자정 무렵, 영월 만경대산 만경사 앞마당에 모인 대중은 너나 할 것 없이 땀으로 흠뻑 젖은 옷, 소금기 가득한 얼굴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오늘도 좋은 하루가 되게 하소서.”아침에 눈을 뜨면 자연스레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이다. 아직은 초보 불자인지라 감사의 마음을 표현할 줄 몰라 그저 아미타 부처님을 염송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내가 불자로 거듭난 것은 온 나라가 IMF라는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다. 모두가 힘들고 어렵던 그 시절, 건축 자재업을 하던 남편의 회사는 부도가 났다. 어렵게 장만한 집과 노후를 위해 마련한 작은 땅을 모두 정리하고 나서야 간신히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그래도 전생에 지은 복이 있었던지 자그마한 전셋집 마련할 만큼의 재산은 남아 있었다. 그 시절, 남편과 나는 가족이 함께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는 마음을 놓지 않았다. 힘들고 어려운 시절, 지금 생
나와 불교의 인연은 아주 오래전 내가 기억이라는 것을 가지기 이전부터였다. 하지만 나는 철이 들어갈 나이가 되면서 그런 불교에 거부감을 가지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부터 무속신앙과 불교를 동일시해왔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것은 내 어머니가 집안에 어려운 일이 생기면 사찰에 가서 기도를 하고, 그것도 모자라 무속신앙에 의존하는 모습을 종종 봐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부처님오신날이면 어머니의 손을 잡고 연등을 달러 사찰을 찾기는 했다. 그렇게라도 부처님과의 인연을 이어간 것을 보면 아마도 마음 한 구석에는 불교에 대한 연(緣)이 살아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렇게 세월이 흘러 결혼을 하게 됐다. 생활에 치여 살다보니 부처님과는 더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에 남편이 사업을 시작하면서 내 마음을 편안케 해
그러던 어느날 인터넷에서 독서를 통해 부처님 가르침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려는 모임인 ‘붓다와 떠나는 책 여행’이라는 불서읽기 모임을 알게 됐다. 그 모임에서 나카무라 하지메의 『붓다, 그 삶과 사상』을 읽으며 느꼈던 환희심은 나를 부처님의 가르침 저 깊숙한 곳까지 끌어들였다. 책장을 덮는 순간 나를 휘감았던 한없는 희열감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모임에서 원효센터 공파 스님의 『부처님의 유언』을 읽으면서 어쩌면 이미 오래전부터 원효센터와의 인연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책에서 느꼈던 강렬한 느낌을 이어가고자 수소문 끝에 원효센터의 위치와 전화번호를 얻게 됐고, 어느 해 가을 초하루 마침내 부산 대연동의 원효센터 문을 두드리게 됐다. 공파 스님에게 원효센터에 다
매주 목요일 저녁 니까야독송 모임에 참석하면서 전재성 교수님과 이미령 교수님을 만나 지도를 받게 된 것 또한 관세음보살님의 가피이리라. 두 시간여 동안 진행되는 강의 내내 나와 도반들은 강의를 경청하며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나 평소 궁금했던 내용들까지도 스스럼없이 질문하며 남아있던 의문을 풀어나간다. 그렇게 꾸준히 단 한 번의 결석도 없이 처음 동참할 때의 결심을 지켜가다 보니, 스스로 남는 것이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 정도다. 물론 도반들과 함께하면서 서로에게 의지와 힘이 된 것이 지금껏 결석 없이 결사를 이어 올 수 있는 원동력임에 틀림없다. 수행과 공부를 병행한다고 했지만 나에겐 여전히 부족함이 존재했다. 그것은 부처님의 제자로서 알아야 할 기본적인 것들을 체계적으로 교육받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렇
세상의 모든 소리를 살펴본다는 뜻의 관세음보살님. 관세음보살님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자재롭게 관조(觀照)해 보살핀다는 의미로 관자재보살님이라고도 부른다. 다양한 모습으로 몸을 나투며 천개의 손과 천개의 눈으로 중생의 아픔을 보듬는 관세음보살님. 나의 주변에는 여러 모습의 관세음보살님이 계신다. 아마도 이 세상에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관세음보살님이 우리와 함께 울고 웃으며 공존하고 계시리라. 내가 염불수행을 시작한 것은 10여 년 전 외환위기라는 사회적 혼란기를 겪으면서다. 사업을 하던 나는 당시 IMF라는 거대한 장벽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고, 하루하루 휘청거리며 암흑뿐인 절망의 터널 속을 헤매고 있었다. 절망과 고통으로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아내가 『천수경』 독경테이프를 건네
시아버지의 49재를 계기로 세월이 흐르면, 아니 어느 한 순간 사라지고 없어질 나의 이 목숨이 참으로 덧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 불쌍한 중생이 극락세계로 나아가기 위해 더욱 더 열심히 장엄염불을 해야겠다는 발심의 계기가 됐다.그렇게 마음을 내고 100일 동안 장엄염불을 멈추지 않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러나 쉼 없이 정진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었다. 마음을 내기도 어렵지만 그 마음을 끝까지 지니고 꾸준히 밀고 나간다는 것은 더더욱 어렵고 힘든 일이었다. 더욱이 교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기에 하루 가운데 시간을 정해 염불에만 전념한다는 것은 실상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 100일 간 시간이 날 때마다 경전을 꺼내 염불을 하기로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경전을 꺼내 펼쳐들고 마무리할 때까지 한 번
“염불공덕수승행(念佛功德殊勝行) 아미타불진금색(阿彌陀佛眞金色) 상호단엄무등륜(相好端嚴無等倫)…” 매주 화요일, 부산 남구 대연동에 위치한 원효센터에는 낭랑하면서도 우렁찬 장엄염불의 소리가 법당을 가득히 메운다. ‘나무아미타불’을 염송하는 많은 대중들이 모인 그 자리 한 모퉁이에 나도 앉아 일심으로 합장하고 염불삼매에 들어간다.어린 시절 나는 어머니의 새벽 기도소리에 잠을 깨곤 했다. 막내 동생을 낳고 건강이 좋지 않으셨던 어머니는 우연한 기회에 절을 찾았고, 무엇보다 마음의 병을 먼저 이겨내야 한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한 후 새벽마다 염불을 하시곤 했다. 아침 마다 반복되는 어머니의 염불소리를 듣고 자라서인지 나에게 스님들의 염불 소리는 낯설지 않았고, 오히려 정겨운 음악소리처럼 들렸다. 그렇게 나를
지금까지 나는, 이 공부를 나(我)라는 존재를 그럴싸하게 포장하는 한낮 액세서리 정도로 취급해왔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내 자신이 너무나 부끄럽고 한심했다. 그리고 관연 이 공부를 할 자격이 있는지에 대한 의문과 자괴감이 몰려왔다. 그러나 한 가지 선생님의 설법만은 결코 포기할 수가 없었다. 그동안 습관적으로 알아왔고 알게 된 것이 모두 나의 것이 아님을 인정하고, 그 어떤 기대 없이 그저 마산과 부산을 오가며 오직 선생님의 법문에만 집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님은 법문 도중 “이것은 마치 도둑놈이 찾아오듯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도대체 무슨 소리일까. 돌이켜 보면 선생님은 항상 손을 들어 올리면서 이것이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또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궁금해졌다. 그래서 더욱 더 집중했다.
어린 시절 나에게 절은 어머니와 함께 가는 놀이터와도 같은 장소였다. 이후 사찰을 몇 번 옮겨 다니면서 어린이회와 학생회, 청년회를 두루 경험했다. 따라서 머리 깎은 스님들은 나에게 너무나 친숙한 대상이었고, 스님들이 해주는 말씀을 항상 가슴에 새기고 다녔다. 그래서인지 머리를 깎으려고 결심했던 적도 있다. 무심선원을 알게 된 것은 친오빠 덕분이다. 오빠는 어느 날 집에 찾아와 설법 테이프 하나를 놓고 돌아갔다. 당시 다니던 사찰이 있었던 터라 선뜻 그 테이프에 손이 가지 않았다. 6개월 정도 손도 대지 않고 식탁 위에 방치해 두었는데 오빠는 한 번씩 집에 들를 때마다 제대로 마음공부를 하려면 테이프를 꼭 들어보라고 권했다. 썩 마음은 내키지 않았지만 오랜 기간 마음공부를 한답시고 해왔었는데 항상 제자리
올해는 더욱 반가운 소식을 접하게 됐다. 미얀마 파욱센터에서 외국인들의 수행을 담당하는 우 레와따 스님이 올 5월 남양주 봉인사에서 직접 수행을 지도한다는 것이었다. 만사를 제쳐두고 1차부터 3차까지 한 달간 동참을 신청했다. 미얀마를 방문하지 않고도 부처님의 정통 수행 방법을 그대로 가르치고 있다는 파욱센터의 수행법을 직접 지도받게 된다는 것만으로도 참으로 좋은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1차 기간에 함께 수행한 한 도반은 나에게 “이런저런 수행을 하면서 오랫동안 헤매고 다녔는데 당신은 불과 몇 년 만에 바른 법을 만났으니 참으로 많은 공덕을 지었던 것 같다”며 부러워하기도 했다. 그러나 처음 수행에 동참한 2~3일은 집에서 수행을 할 때보다 집중하기가 더 힘들었다. 몇 년 동안 혼자서 짧은 시간만 수행
개신교 집안에서 태어난 나는 태어나면서 유아 세례를 받았고, 개신교 교육을 받으며 독실한 개신교인으로 성장했다. 신앙심 역시 다니던 교회에 학생회장직을 맡을 만큼 다른 이들과 비교해 결코 부족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작은 의문이 생겼다. 그 시절 개신교가 아닌 종교와 철학에 관심을 갖게 됐는데 성경에서 말하는 창조론, 부활론, 천당과 지옥 등에 대해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러한 의문에 대해 목사님이나 선배들은 신앙심이 부족해 그러는 것이니 무조건 믿으면 된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신앙심만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결국 의문은 의심이 됐고, 의심은 부정을 낳을 만큼 종교에 대한 불신은 커져 갔다. 하지만 이러한 고민은 커가는 과정에 겪게 되는 하나의 성장통일 뿐. 보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