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허무-적응력 부족으로 마음고생봉화산 학바위에서 좌선…눈물 주르륵 오늘도 선원에는 목요일마다 열리는 정기법회에 참석한 도반들의 반가운 인사가 오가고 자리를 정돈한 후 삼귀의에 이어 법사님의 좌선 인도가 시작되었다. 날숨 3회로 좌중을 편안하게 이끄시는 법사님의 인도대로 내려놓기를 하던 중, 문득 살아온 모든 날들을 다 내려놓아 보자는 용감한 생각이 들었고 어렵지 않고 편안하게 선정에 들 수 있었다. 내가 우곡선원에 오게 된 계기는 몇 년 전에 실시한 우곡 교원직무연수에 참여하게 되면서부터이다. 교원직무연수를 받던 때의 느낌은 아직도 생생하다. 삶을 채 살아보기도 전에 삶의 허무에 더 익숙해져 있었던 때문인지 유독 세상살이에 대한 적응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던 나는, 방학을 이용하여 기존의 사찰에서 실
매주 토요일-여름·겨울엔 1주일씩 철야화두 참구하며 죽음 공포 극복…마음 출가 첫 번째 일주일 철야정진 이후 2년간 철야를 하다보니 언제부터인가 화두가 순일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참선을 시작해서 1분 여가 지나면 시계소리조차 들리지 않고 오직 화두만 들렸다. 처음으로 생각을 쉬어본 것이다. 그때에 비로소 사람은 누구나 1초도 안 쉬고 생각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동산수상행(東山水上行)’이라는 화두를 받았는데, 지속적으로 철야정진을 하면서 마치 정해진 답처럼 ‘예리한 칼을 들고 쫓고 쫓을 새, 갈곳 없는 東山水上行이 내 집안 소식을 토하는구나. 산은 푸르고 물은 맑은데 할 일도 많았던 내 집안 일이 하나도 할 일 없는 그대로구나’하는 답이 나왔다. 그리고 자성자리는 특별히 나만 가지고 있
“향후 10년을 준비하고 한국을 대표하는 청소년 단체로 발돋움 하자.” 파라미타청소년협회(회장 도후, 이하 파라미타)가 2월 3일부터 4일까지 충북 증평에서 정기총회 및 지도자 대회를 가졌다. 파라미타는 3일 오후 4시부터 대의원과 지도자를 구분, 정기총회를 진행하고 지도자 대회를 개최했다. 지도자 대회에서는 문화재 애호활동에 대한 특강 시간을 갖고 그 동안 각 지역에서 청소년 포교에 일익을 담당한 우수지도자 16명의 공로를 치하했다. 파라미타 회장 도후 스님은 “파라미타는 지난 10년간 연합캠프를 비롯해 문화재애호활동, 국제구호활동, 해외문화탐방 등 종단 내외의 관심과 지원 속에 전국조직으로 확대되었다”며 “과거의 성과에 안주하지 말고 종단에서 어린이, 청소년 포교 지원을 약속한 만큼 종단을 뛰어
초등학교 6학년 때 친구 죽음 보고 공포백봉 선생님 첫 법문 듣고 생사해결 확신 초등학교 6학년 때 앞자리에 앉던 친구가 장티푸스에 걸려서 죽는 일이 있었다. 그런데 1주일이 지나도 그 친구에 대한 생각이 떠나지 않으면서, 나도 언젠가는 죽게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됐다. 겨우 13살이었지만 친구처럼 병들어 죽거나 아니면 80까지 산다고 해도 죽는 것만은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면서 겁이 났다. 중학교에 들어가서 과학시간에 가도 가도 끝이 없다는 우주에 대해 배우면서는 죽음과 우주에 관한 생각만 하게 되기도 했다. 그런 생각은 고등학교를 가서도 마찬가지여서 죽음에 대한 공포와 죽음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는 무엇을 하던지 삶의 의미가 없어 보였다. 부
매일 3000배 절-지장보살 염불 수행이기심이 내 병의 원인 알면서 완쾌 처음 내가 그 절에 머물 수 있도록 소개해준 분은 스님에게 “이 학생 마음도 아프고 몸도 아파서 여기까지 왔다”고 하자, 스님은 “하루에 1000배씩 절을 해라, 그리고 평소에는 지장보살 염불을 죽도록 해”라고 하셨다. 1000배가 어느 정도인지 처음에는 몰랐다. 그러나 108배를 해보고 나니, 1000배라는 게 그리 만만한 게 아니었다. 1000배를 매일같이 할 생각을 하니 눈앞이 아득했다. 하지만 도량이 떠나가라 카랑카랑하게 울리는 스님의 목소리에 기가 눌려서 “네”하고 대답을 한 터라 어찌 되돌릴 길이 없었다. 그러나 며칠 지나지 않아서 나를 더 당혹스럽게 하는 일이 생겼다. 어느 날 스님은 “요즘 법당에서 매일 3000배씩
재수생 시절 얼굴에 진물 흐르는 병 생겨병원 전전하다 호남 시골의 절에 들어가 지장보살님의 미소를 보고 있으니 20여 년 전 희열로 가슴 벅찼던 발심의 순간들이 아련히 되살아난다. 당시 나는 대학 재수생이었다. 고교시절 학업은 뒷전으로 한 채 오로지 친구들과 노는 것에만 몰두했던 속칭 ‘날나리’라는 부류에 속했던 나에게 재수는 필연이었다. 또 모난 성격 덕분인지 일상적인 말에도 자존심이 상해 혼자 마음의 난행과 함께, 먼저 시비를 걸어 주먹다짐도 서슴지 않았다. 남에게 상처를 주는 폭언은 물론, 쉽게 내가 하고 싶은 데로 사는 철없는 젊은이였다. 재수를 위한 준비는 타의에 의해 이끌려 간 스파르타 형식의 모 학원이었다. 결국 병을 크게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된 곳이다. 건물 내에서의 출입통제, 한 달에
법화경 사경 33회 완성 후 빙의 사라져5년간 매일 사경…108번 사경정진 서원 광고를 보고 찾아간 선원에는 늘 법당에서 법화경 사경을 하는 보살님이 있었다. 나는 그분에게 마음을 열고 나의 아프고 괴로운 심정을 토로했다. 그 보살님은 내 눈물을 닦아주며 법화경 사경수행을 하는 분들 가운데 나와 같은 빙의를 극복하거나, IMF 위기를 넘긴 분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면서 사경수행을 권했다. 그동안 천도재를 열두 번이나 지내고 갖가지 기도를 다 해보았던 나는 선뜻 그 말을 따르지 못하고 주저하다가 6개월이 지난 어느날 서울의 법화경 사경도량인 법화정사와 새로운 인연을 맺게 되었다. 2002년 1월 6일이었다. 이 날은 내 삶에서 결코 잊지 못할 날이 되었다. 주지 도림 스님에게 사정을 말씀드리니 법화경을
결혼 후 시댁과 갈등 겪으면서 빙의 걸려병원 치료에 천도재·기도해도 호전 없어 신심 돈독한 불교집안에서 태어나 부모님 사랑 받으며 별다른 문제없이 잘 자랐고, 공무원으로 사회생활을 하다가 결혼을 했다. 그런데 이때부터 이런 저런 문제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시댁에 들어가 살았는데, 시댁은 종교부터 달랐다. 거기다가 집안 가풍이 너무나 달라서 스트레스와 갈등 속에서 매일 매일이 힘겹기만 했다. 그러던 중 시동생의 결혼식 전날 시숙모님의 무모한 행동에 크게 놀라면서 빙의라는 병을 얻게 되었다. 심한 두통과 온몸을 가누기조차 힘이 들고 내 의지대로 삶을 살아갈 수가 없었다. 아이 둘을 데리고 가정을 꾸려가기가 어려워 친정 어머니께 아이들을 맡기기도 했다. 그러면서 어떻게든 병을 고쳐보려고 병원에 다녔으나 뚜
하루에 1시간 이상 좌선-일상이 수행몸·마음 알아차리며 생활속 이익 실감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서 대상을 볼 때 일어나는 탐심을 한 번 알아차린 뒤에 마음이 고요해진 상태에서 그것이 필요한 것이면 노력해서 취하고 그것이 욕심이면 놓아버리라고 배웠으나, 실제로는 거의 알아차림을 놓치고 실컷 탐심을 냈다가 가지지 못해 끌탕을 하다가 너무 괴로우니까 그때서야 마음을 보니 그때 탐심이 있었네 하고 아는 식으로 계속 뒷 북을 쳤다. 이런 경험을 인터뷰 스승에게 말하니 지금이라도 탐심을 안 것은 대단한 것이라고 용기를 주었다. 스승은 계속 알아차리려는 노력을 하면 알아차리는 시간이 점차 빨라져 막 탐심이 일어날 때 알게 되고, 그래서 대상에 휙 넘어가지 않고 욕망을 조절하는 힘이 생겨 번뇌가 줄어든 생활을 할 수
깨달음 구하는 종교라는 말에 불교입문절 찾아 기도생활 10년 만에 수행 발심 사춘기 시절에는 하느님을 믿고 의지하면 무엇이든 다 이루어진다는 친구의 말에 교회를 다녔다. 그러던 중 19세 때 어머니가 위암 진단을 받고 수술도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면서 어머니를 살려보겠다는 일념으로 정말 열심히 기도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나는 실망감에 하느님이란 존재를 믿지 못하고 교회 다니기를 그만두었다.그러다가 대학시절 우연히 보게 된 소책자에서 ‘불교는 깨달음을 구하는 종교’라는 구절이 아주 멋있게 느껴졌다. 무조건 믿는 종교가 아니라는 말에 대한 호기심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불교에 대해 알기를 원했지만 마땅히 인도해주는 사람이 없었고 시간이 흘러 어느덧 30대 후반의 나이가 되었을 무렵,
1주일 가행정진 끝에 자성염불 성취새벽 예불·염불·좌선으로 하루 시작 철야정진 참석후 적게 먹고 조금 자고 가행정진을 해보라는 스님 말씀을 따라 아기를 안고서도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가행정진을 했다. 이상한 것은 나는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할 때와는 달리 모든 상황들이 나의 수행을 도와주는 것만 같았다. 가행정진을 시작하면서 인터넷 정토선 카페도 잠깐씩 들러 궁금한 것만 보고 나가기를 일주일 정도 지난 월요일 새벽 염불소리에 깜짝 놀라 깨어났다. 성악가의 목소리도 아니고 굵은 남자 목소리에 아름다운 음율까지. 놀랍고 기쁘고 환희로울 뿐이었다. 이렇게 정토선 1차 관문인 자성염불 단계를 성취할 수 있었다. 염불소리에 잠에서 깨어나면 세시쯤 된다. 예불과 염불, 좌선 등 새벽수행을 여섯시까지 하고 하
외손주 기형적 얼굴보며 삶의 의욕 상실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염불…이적 체험 여섯 형제의 맏며느리인 나는 시부모님께서 일찍 돌아가시면서 연로하신 시 할머님과 어린 시동생들의 뒷바라지를 맡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내 나이 겨우 스물 여섯.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하며 뒷바라지를 했지만 집안 형편이 어려워 막내 시동생을 대학에 보내지 못하면서 시고모님을 비롯한 시댁 식구들과 불화가 생겼다. 칭찬 받으려고 한 일은 아니지만 참 억울하고 이해할 수 없는 마음들을 주체할 수 없어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을 때, 부처님 전에 고달픈 삶을 맡기면 그나마 편안해졌기에 도반들을 따라 다니며 관음정근도 하고 절, 사경 등을 했다. 하지만 모든 수행이 그렇듯이 하면 좋기는 했으나 공부의 진전도 없고 생활에 지장을 주기도 해서 모
삼보법회 인연 맺으며 참선수행 시작화두참구 5년…마음여유-자비심 늘어 경전을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는 곳이 없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만 갖고 있던 중 발견한 광고는 내게는 갈증을 풀어 줄 가뭄 끝 단비와도 같았다. 이발관에서 우연히 발견한 광고는 당시 풍전호텔 4층에 있었던 삼보법회에서 금강경 법문을 한다는 것이었다. 1969년 11월 어느날, 그렇게 우연한 기회에 보게 된 삼보법회의 금강경 법문 광고를 보고 그 길로 삼보법회를 찾아 인연을 맺었다. 그리고 그 인연은 내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 계기가 되었다. 금강경 법문을 들으면서 삼보법회에서 고승 대덕 스님과 재가 선지식들의 법문을 거의 매주 빠짐없이 들었다. 처음에는 고(故) 전진한 선생님의 금강경 법문을 들었고 그 다음에는 운허 스님으로부터 능엄
교회-성당 다녀도 이렇다할 감응 없어서울서 하숙집 주인 권유로 불교에 입문 사람의 몸을 받아 태어나기가 어렵고, 사람으로 태어나서도 불법을 만나기는 더욱 어렵다고 했다. 이 말에 비교해보면 나는 상당히 행운아인 것 같다. 초등학교 5학년 때에 불심의 싹이 텃고 30세에 백천만겁에도 만나기 어려운 정법을 만나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스럽고 행복한 일인가. 어릴 때에는 동네 한복판에 있는 예배당에 이끌려 다니면서 공책도 받고 떡도 얻어먹으면서 설교를 들었지만 별로 내 마음에 와 닿지를 않았다. 또 중학교 때에는 대구에 계신 고모님 댁에 있으면서 새벽이면 고모님을 따라 성당에 나가서 미사에 참여하고 기도를 하기도 했지만 내게는 별로 이렇다 할 감응이 일지 않았다. 그런데 정작 불교가 무엇인지는 몰랐으면서도 부
두살 뇌성마비 아들 잃고 28년 속앓이사경수행하며 의욕 찾고 자신감 생겨 사경을 하면서 그저 편안하기만 할 듯하던 삶이 그렇게 한 순간 편안함으로 변하지는 않았다. 나이도 먹고 했으니 좀 더 푸근한 가슴으로 세상을 보듬으며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동안 해오던 버릇을 고치지 못하고 오히려 일을 크게 만들어 버리는 일도 종종 생겨났다. 수행을 하면서 좀 달라질 수도 있으련만, 아무 것도 아닌 일로 평생지기와 다툼을 벌이기도 하고 속 좁은 여인네는 감정의 깊은 골에 떨어져 그만 붓이 손에 잡히지 않는 순간도 있었다. 그럴 때면 생각이 ‘에이, 사경공부 그만 둘까’하는 데까지 미치면서 자신을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그때 지난날의 아픈 일들이 떠올랐다. 어릴 때야 부모님의 불교인연을 내
꿈속의 법당 현실에서 본 순간 황홀남편의 적극 지지 받으며 사경 입문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세상살이가 그리 평탄하지 많은 않았던 내 인생에서 이런 때가 오리라는 믿음이 없었기에, 요즘의 일상은 실로 꿈만 같다. 늦은 나이에 사경공부를 시작한 이후로 내 삶이 평온을 얻으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도 점점 밝아져 갔다. 나 자신은 물론이려니와 우리 가족 모두가 이 편안함을 함께 느끼면서 집안에서는 이전보다 더 크고 맑은 웃음소리가 자주 터져 나오고 있다. 어찌 부처님께 감사드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요즘의 내 기분은 정말 무엇이라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다. 어려서부터 꼭 한번은 해 보고 싶었던 서예공부를 시작한 것은 이미 손이 굳어진 후였다. 이미 굳어져버린 손으로 용기를 내어 서예
사불은 철저한 규칙-호흡조절이 필요오전 1시간 수행이 일상의 즐거움 돼 아침에 일어나면 작업실로 향한다. 향을 사르고 앉아 눈을 지긋이 감고 호흡을 가다듬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석가모니 부처님이나 관세음보살님의 불화초본을 몇 장씩 먹으로 그리는 과제를 수행하면서 자연스럽게 사불수행을 하게 된 후로 매일 아침 이런 과정을 거치며 평온한 하루를 시작한다. 수행을 하루에 몇 시간, 또는 일주일에 몇 번 하는 식으로 때를 정해서 하면 좋겠지만, 세워놓은 계획을 지키지 못하는 자책감에서 오는 피해가 클 것 같아 느슨하게 수행계획을 세웠다. 매일 어느때든 1시간씩 시간을 내어서 사불수행을 하기로 한 것이다. 내게 있어서 사불수행을 하기에 적합한 시간은 아침에 일어나 작업실에 나온 직후였다. 잠시 입정을 하고
불교 소재 졸업논문 통과 못해 방황친구따라 절 찾아 108배-사경수행 나는 매달 초하루면 절에 다녀오시는 어머니 덕에 불교가 친숙했고 다른 어떤 액세서리 보다 단주를 차고 다니는 것이 좋았다. 등산을 갈 때도 산사의 절을 찾아 예법도 모른 채 사찰 여기저기를 기웃거리거나 스님의 목탁소리와 염불소리를 들으며 편안함을 느끼곤 했다. 도예를 전공한 나는 그런 연유로 작업하는 내내 불교가 작업의 소재가 되었다. 특히 죽고 사는 것에 관심이 많아 졸업논문으로 납골용기개발연구를 했었고, 이것이 내 인생의 큰 전환점이자 불교와 직접적 인연을 맺는 계기가 되었다. 자료가 극히 부족한 상황이었고 젊은 여학생이 자료조사를 한다고 용미리 시립묘지나 벽제 화장장, 사찰 탑골묘 등을 찾아다니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3년 동안 매일 새벽에 염불수행 정진모든 장애의 실체가 ‘나’임을 깨달아 문사수법회에서 스님과 법사님들의 법문을 들으면서 ‘나’라는 생각에 갇혀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나무아미타불 염불수행을 하면서 선지식을 만나 눈을 뜬것과 같은 엄청난 변화가 시작된 것은 내 삶의 변화 자체였다. 그렇게 법문을 듣고 염불수행을 하면서 “산은 산이로되 옛 산이 아니오, 물은 물이로되 옛 물이 아니로다”라고 한 옛 선지식의 말씀이 비로소 처음으로 이해가 되었다. 내가 변하면서 온 세상이 달라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염불수행을 시작하면서 3년 동안 새벽정진을 이어갔다. 목요일 새벽에 경전을 공부하는 날과 회사 일로 지방에 출장을 가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새벽 정진을 했다.
‘변화하자’ 수 없이 다짐해도 작심삼일염불수행 후 ‘나’를 놓으면서 변화시작 누구에게나 부처님 법을 만나는 것은 가장 큰 사건중 하나일 것이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일대사 인연이라는 명확한 표현으로 말하고 있을 게다. 따라서 부처님의 정법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 일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고 소중한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 과연 부처님의 정법을 세상에 널리 알리고 펼친다는 것이 무엇일까. 구체적으로 말해 어떤 사람이 불교가 무엇인지, 염불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다가 부처님 가르침을 만나고 염불을 알게 되었다면 그 사람에게 있어서 달라지는 것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 표현으로 답변이 가능할 수 있겠지만, 내가 제일 좋아하는 표현은 바로 그 사람에게 일어나는 변화이다. 그것도 아주 혁명적인 변화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