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월 첫째 주 토요일 오후가 되면 능엄주로 시작해서 저녁 8시가 되면 비빔밥도 꼭 공양하고, 다시 밤을 꼬박 새며 정진 또 정진한다.산천이 변한다는 10년. 그 오랜 기간 동안 부산 재송동에 위치한 재적사찰 옥천사에서 매월 한 차례 밤을 새워가며 대불정능엄신주 108독을 정진하는 시간이 마련되어왔다. 그동안 수많은 도반들이 스쳐 지나갔다.마치 갖가지의 나물들이 어우러진 비빔밥이 보약이 되어 다음 정진 시간을 더욱 집중케 하는 것처럼, 우리들의 여러 소원들이 모이고 모여 108독 능엄주 독송을 하고, 그 수행자들은 다시 세상으로 나아
사바세계에서 살아가는 불자들은 지나간 허물을 깨닫고 그걸 밖으로 드러내 불보살님께 참회하며 계율을 잘 지키겠다고 서원하는 참법 수행의 공덕이 상당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돌아가신 영가들의 정해진 업까지 소멸시키는 공덕도 있다는 ‘지장경’ 독송이 참법기도의 가장 기본적인 수행 방법이며 이와 함께 자비도량참법은 참회기도를 통한 추모기도로 널리 일반화되어 있는 최고의 의식집이라고 표현해본다.앞서 언급했지만 자비도량참법에 대해 조금 더 덧붙인다면, 지금부터 1500여년 전 달마대사와 황제 간 대화에서 비롯됐다. 도량을 짓고 스님들을 양성하는
결혼과 함께 시어머님을 따라 부산 범어사를 찾은 시기가 대략 1985년 6월 즈음이다. 초여름 바람에 조금씩 뜨거워지던 시기, 마침 범어사에서는 백중기도를 100일 동안 진행하고 있었다. 시어머님은 불심이 무척 깊었다. 나는 그저 시어머님을 따라, 때로는 혼자서 도량을 찾아 기도하며 선망 부모의 극락왕생을 발원하게 된 것이 신행 생활의 시작이었다.돌이켜 보면 원망과 다툼으로 덧없이 흘려보낸 시간도 많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불교 인연을 맺게 해주신 시어머님에 대한 감사함이 저절로 흘러나왔고, 시어머님을 떠올리는 지금은 한없이 뜨
정토 공부와 기도를 겸하면서 백중을 맞이하게 되었다. 백중기간 동안 초청 법사와 스님들의 법문을 들으며 또다시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법당 안은 보살들로 빼곡하고 법문을 듣는 다른 분들은 의연할 뿐인데 왜 나만 이렇게 또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인지…. 백중기도 회향을 하면서 그동안 사경했던 사경노트를 연화대 속에 넣고 태웠다. 활활 타오르는 불꽃들을 보면서 다시 한 번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흘렀다. 가슴에서 올라오는 그 뜨거움이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의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너무 후련했다.백중기도를 마친 이후에도 매일 신
소리 없이 계절이 흐른다. 눈처럼 내려앉은 뽀얀 봄이 화사하더니 장맛비가 도량을 촉촉이 적신다. 겨울에서 봄으로 그리고 이제는 여름을 향하며 계절은 끊임없이 바뀌지만 다시 봄이 돌아옴을 알면 이 장맛비도 결코 지루하지 않다.계절의 순환조차 견디기 힘든 때가 있었다. 언제부턴가 일상생활이 무료하게만 느껴지고, 무의미하다는 생각들이 스멀스멀 올라오면서 점점 무기력해지기 시작했다. 퇴근해서 오는 남편도 반갑지 않았고 아이들도 각자의 목소리를 내면서 감정을 자극시키는 말들로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 빈번해졌다. 아내, 엄마로 부족함 없이
삼천배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조차 몰랐다. 해인사 백련암의 많은 불자들 사이에서 삼천배 수행을 시작했다.천배는 두 시간 만에 마쳐야 했다. 그 이후에는 오백배씩 끊어서 진행된다는 설명에 두려움이 앞섰다. 하루 동안 시간 여유를 갖고 느린 속도로 천배를 한 기억은 있지만, 그때까지 단 한 번도 이백배 이상 연속으로 절을 해 본 적이 없었다. 막막했다. 다행히 천배는 무사히 마쳤다. 일찌감치 포기할 줄 알았던 남편도 무사히 천배를 마쳤다. 아들도 기특하게 육백배 정도까지 마무리를 했다.본격적인 절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고통의 시작이기도
절 수행의 위력은 익히 알고 있다. 각종 도서와 매스컴을 통해 감탄을 하면서도 선뜻 실천은 되지 않았다. 그래도 삼천배에 도전하기 위한 워밍업으로 5년 전부터 매일 천배씩 10일 정도 절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1만배의 절을 채우고는 며칠을 완전히 쉬어버렸다. 그나마 꾸준히 하던 108배 수행으로도 돌아오기 힘들었다. 삼천배는 그렇게 먼 훗날의 아득한 계획으로 영영 멀어지고 있었다.2년의 세월이 흘렀고, 필연은 우연처럼 갑자기 찾아왔다. 지나간 방송이었지만 ‘0.2평의 기적’이라는 SBS 스페셜 방송 프로그램을 보면서 용기를 냈다.
2011년, 두 번째 선 수련회에 참여했다.‘스님과의 대화’ 시간에 절실하게 질문했다. “스님, 내가 누군지 모릅니다. 정말 너무 힘들어요.” 눈 푸른 외국인 스님께서 “바로 그것이다. 오직 모를 뿐!”이라고 답하셨다. 모르겠다는 질문에 바로 그게 정답이라니…. 무슨 뜻인지 잘 몰라 어리둥절했다.내 질문과 스님 대답을 화두로 잡았다. ‘내가 누군가…, 오직 모를 뿐….’ 참선, 경행, 참선으로 이어지는 시간 내내 꼼짝 않고 집중된 상태가 유지되는 짧은 경험을 했다. 하지만 이 경험 역시 일상을 변화시키기엔 역부족이었다.참선의 세 번
46살에도 입학 축하 꽃다발은 기분을 들뜨게 한다.2018년 3월, 불교상담학 전공 대학원 수업이 시작됐다. “왜 이 공부를 하나요? 계기나 목적은 무엇인가요?” 질문부터 날아든다. 머뭇거리지 않았다.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었다.“참선수행으로 우울의 올가미를 끊어버린 경험 이후 불교는 삶의 방향성이 됐어요. 벗어나고 싶지만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은 반복되는 우울과 허무에서 자유롭고 싶은 사람들에게 꼭 알려주고 싶습니다. 환하게 웃을 수 있다고!”이제는 우울이나 허무가 더 이상 내게 살아있는 단어가 아니다. 하지만 30년 가까이
2016년 여름은 정말 무더웠다. 당시 홍법사 동림 어린이법회의 어린이들은 90일 동안 108배 수행을 하는 것이 재가안거 과제였다. 할까 말까하는 여지의 고민도 없이 딸과 함께 108배 재가안거 수행을 시작했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면서 절을 했다. 나는 딸에게, 딸은 나에게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면서 가족신행공동체의 힘을 키울 수 있었다.여름 재가안거 동참하면서고민 없이 딸과 108배 정진두 아들 단기출가 인연까지가족신행공동체 거듭난 계기가족신행의 폭은 두 아들의 단기출가를 계기로 더 넓어졌다. 2017년 4월, 부처님오
아무것도 몰랐다.부모·시어머니와 다닌 사찰나만의 절·신행에 깊은 열망아이 셋을 키우는 엄마로서홍법사 어린이법회와 인연어린 시절부터 부모님 따라 영문도 모른 채 절에 다녔다. 지금도 부모님은 매주 팔공산이니 사리암이니 보리암이니 전국 사찰을 두 분이 함께 다니신다. 아무튼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했고, 이번엔 시어머니와 함께 절을 다녔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했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른다. 누군가의 손을 잡고 누군가에 이끌려 다니기보다 나만의 절을 다니고 싶어졌다.친언니처럼 다정하게 잘 지내는 인향지 언니 소개로 절을 한 곳 알게
기도는 이제 남편을 위한 기도가 되었다. 참회기도를 거듭했다. 남편에게는 미안함뿐이었다. 남편과의 삶에서 떠오르는 일들은 모두 남편의 포용과 배려 그리고 사랑이었음을 왜 이제야 느끼는 것일까. 눈물밖에 나오지 않았다. 눈물의 기도를 거듭하던 어느 날, 기적 같은 말을 들었다. 통풍은 병원 측의 오진이었다. 몇 차례의 약 복용으로 남편의 통증은 서서히 사라졌다. 남편은 직장에도 복귀하여 이제 우리 가족에게는 건강한 삶이 이어질 것만 같았다.남편의 사랑 깨닫고 참회기도슬럼프 겪다 사경하면서 극복자궁선근증 수술 예후도 좋아가족이 부처님이
지금으로부터 15년 전. 남편과 불화로 인하여 시어머니와도 불편해지면서 사는 게 지옥이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들 만큼 삶은 너무도 힘들었다. 그렇게 힘겹게 지내던 어느 날 부터인가 밥을 먹을 수조차 없을 만큼 목에는 대못 같은 가시가 콱 박힌 듯 불편함이 커졌다.남편·시어머니와 불화로 불행호흡 멈출 것 같은 경험 겪어기독교 믿다 다시 삼보에 귀의‘법화경’ 접하는 시절인연 만나무더운 여름, 제대로 먹지 못해 기운이 없는 상황에서 또 남편과 말다툼을 했다. 결국 남편은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나는 온 몸의 기운이 빠져 침대에 그대로 눕고
한번은 자모회 기도반 도반의 아이가 높은 곳에서 떨어진 일이 있었다.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광명진언이 쏟아졌다. 힘든 상황에 눈물을 흘리면서도 광명진언을 읊다보니 마음이 차분해졌다. 물론 매사에 항상 차분함을 유지하기란 누구에게나 힘든 일이다. 나 역시 아이들에게 화를 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과거에는 그 화에 갇혀 있었다면, 지금은 화를 내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빨리 평정심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모두 수행의 힘이라고 생각한다.힘든 상황엔 곧바로 광명진언화 갇혔다가 빨리 평정심으로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 늘어감사수행·108배
따뜻한 4월의 봄날이었다. 보건소서 간호사로 직장생활독거노인 보며 생로병사 직면어린이법회 지도교사로 봉사천일기도 후에 광명진언 지속벚꽃이 꽃비처럼 내렸다. 천일기도를 회향한 지도 어느덧 한 달이 지났다. 그 동안 기도를 하면서 느꼈던 생각을 부족한 글로나마 표현하고자 한다. 누군가 글을 읽고서 기도 혹은 수행을 발원한다면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불연이 되리라 믿는다. 보건소에서 간호사로 일을 하고 있다. 주로 기초생활수급자나 차상위계층, 독거 어르신들을 만난다. 매일 어르신들을 만나다 보니 늙음에 대해 많은 생각을 갖게 되었다.
어색함은 잠깐이었다.‘지심귀명례’ 소리 가슴 설레다리 쥐·숨 턱밑까지 차올라삼천배 회향 기쁨 감사 기도가족 모두 불법승 삼보 귀의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해인성지(海印聖地) 가야산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어느새 나타난 백련암은 고졸했다. ‘白蓮庵’이라 쓰인 입구 앞에 놓은 돌계단이 정겨웠다. 걸어서 오르는 길 중턱에서부터 “지심귀명례” 소리가 들렸다. 어느 합창단의 노래보다 더 아름다운 합창이었다.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설렌다. 백련암의 상징이라는 불면석(佛面石)도 마주했다. 성철 스님이 1967년 해인총림 방장에 취임하면서
참 귀한 인연이다.신증후군 앓던 막내 간호삼천배 시절인연 빗겨가조계사서 100일 기도 중2009년 백련암과 첫 인연2009년 해인총림 해인사의 성철 스님 사리탑 기도가 시작이었다. 처음으로 해인사 백련암과의 인연이 움텄다. 지금 돌이켜봐도 그 먼 곳까지 혼자 가게 된 것이 신기하기만 하다. 알 수 없는 어떤 인연이 나를 끌어 준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늦둥이로 낳은 막내가 아팠다. 두 돌 지났을 무렵 아이에게는 신증후군이란 병마가 찾아왔다. 서울대병원에서 두 달 동안 생사를 넘나들었다. 지켜보는 부모에게도 병상에 누워있는 아이에게도
동생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황망함이 컸다. 하지만 ‘금강경’을 쓰면서 동생의 죽음을 받아들였다. 점차 마음도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절에 머물며 무료할 땐 사경재가동안거 땐 ‘금강경’ 사불잡념 비우는 사경 적극 권선노보살 모임 삼생회서 울력도개인적으로는 주로 매일 오전 10시 전후로 대광명사에 도착한 뒤 법회에 동참한다. 오후 3~4시 즈음 집으로 돌아간다. 절에 머무는 시간 중 무료한 시간이 생기면 언제든 사경을 할 수 있도록 평소 머무는 대광명사 옷 방에는 항상 벼루와 먹을 준비해 놓고 있다.대광명사 주지 목종 스님은 일체 이런
세월이 나이와 같은 속도로 지나간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정신 차릴 여유조차도 없이 어느덧 여기까지 왔다.40년 교편생활 후 삼보에 귀의불교대학 입학 불교공부 시작취미 서예여서 사경수행 관심‘반야심경’ ‘금강경’ 한문 사경여태 뭘 하면서 그 긴 시간들을 보냈는지 감이 잡히질 않는다. 젊을 땐 희망에 산다던 옛 시절도, 추억에 산다는 지금의 이 나이도 눈코 뜰 새 없이 지나가니 도대체 종잡을 수가 없다. 그나마 가는 세월이 안타까워 무엇이든지 의지해 보고 싶은 아쉬움에 부처님을 만나는 것이 위로가 된다.이건 정말 나에게 주어진 좋은
아비라 카페에서 본 내용 그대로 먼저 삼배를 하고 예불문에 이어 대참회문으로 108배를 했다. 108배에 이어 천천히 또박또박 대불정능엄신주를 독송했다. 그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일과 수행을 하는 내내 과연 이 수행을 지속할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감이 떠나질 않았다. 땀은 비 오듯 쏟아졌고 편하게 잘 있던 두 다리의 투덜대는 불만도 타일러야 했다. 첫째 날 절수행은 몸도 머리도 우왕좌왕하면서 끝났다. 하루하루 겨우 이어가던 일과 수행은 연말을 맞아 많은 약속들과 독감으로 삼, 사일을 비몽사몽하며 시간을 흘려 보냈다. 독감의 잔재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