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위주의 남편 탓에 하루하루가 고통 매주 3000배 하다가 아미타염불 시작 지난 96년 불교에 처음 입문 했을 때 처음 만난 노스님께서는 “너는 놋그릇과 같다. 놋그릇은 닦으면 닦을수록 빛이 난다. 잘 닦으면 극락에 갈 것이다”라고 하시며 『아미타경』을 한권 주셨다. 하지만 그때는 무슨 뜻인지 몰랐고 그저 덕담이라고 생각하고 잊어버렸다. 그리고 얼마 후 가까운 곳에 사시던 한 분이 해인사 백련암에 다니셨는데 그 분을 따라 매주 토요일마다 절에 다녔다. 108배도 해 본적 없는 나에게 무작정 3000배를 시작했고 매주 토요일 밤이면 삼천 배를 하면서 전생의 업장이 두터운 탓인지 따르는 고통이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같이 삼천 배 수행하던 분 중 성철스님께서 아끼시던 보살님의 아드님을 알게
1960년대 말부터 인도를 여행하던 서양인들에게 명상수행을 통해서 마음의 안정을 찾게 해주던 재가 스승들이 몇 분 있다. 본지를 통해 소개된 바 있는 S. N. 고엥까-지는 1969년부터 서부 인도를 중심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한편 인도 북동부 지역에서는 미얀마에서 9년간 수행과 교리를 공부하고 돌아온 아나가리카 문인드라 바루아 법사(Achariya Anagarika Munindra Barua, 1914~2003)였다. 이 분을 사람들은 문인드라 선생님이라는 의미로 문인드라-지라고 불렀다. 문인드라 지는 방글라데시의 치타공 출신이었다. 방글라데시의 치타공은 12세기 이후 이슬람의 침탈로 인도불교가 모습을 감춘 후부터 현재까지 인도불교의 명맥이 이어져온 곳이었다. 문인드라 지는 인도불교의 전통을 이어온 바루
매일 금강경 15독…시어머니도 변화 “밥은 굶어도 금강경은 꼭 독송” 다짐 나는 매일 4시 30분경에 일어나 제일 먼저 금강경 1시간 독송으로 하루 생활을 시작한다. 출근해서 일과 시작 전, 점심, 그리고 저녁시간을 이용하여 15독까지 독송을 하기 시작했다. 많게는 20독을 넘길 때도 있다. ‘여시아문 일시불 재사위국 기수급고독원…’ 머리속에서 늘 금강경 글귀를 떠올리며 생활해 온지 2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보면 나는 너무도 많은 것을 부처님께 받았다. 금강경을 독송하면서 내가 입은 가장 큰 가피가 나의 병을 일찍 발견한 것. 언젠가 꿈에 넓고 넓은 하천에 서 있었는데 발아래 물이 아닌 뱀이 끝없이 꾸물거리며 기어가는 것을 보았다. 뱀은 업장소멸이라고 하였는데, 내 업이 그렇게 녹아내리고
만암 스님은 백양사에 주석하며 계율청정을 엄격히 해 칼날같은 승풍을 확립했다. 만암 스님은 흉년에 끼니를 굶는 백성들의 참상을 가장 마음 아파 하셨다. 그래서 당신이 해결해주실 수 있는 정도면 늘 백양사 안에서 도와주려고 애썼다. 개울에 보를 쌓게 하고 양식을 품삯으로 준 것도, 산에 나무 심는 일을 시키고 품삯을 양식으로 준 것도 모두 굶고 있는 농민들을 돕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한 해의 흉년이 아니라 2년, 3년 계속된 흉년은 만암 스님의 도움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창고 속 곡식 자갈과 뭐가달라 흉년이 거듭된 어느 해 보릿고개를 당해서 만암 스님은 소달구지에 자갈을 담은 가마니를 몇 개 싣고 어떤 부잣집을 찾아갔다. 그 부잣집 곡식창고 안에는 해묵은 벼가 가득 쌓여 있
고부 갈등으로 지옥 같은 10년 금강경 독송하니 ‘모든 게 내 탓’ 누가 그랬던가. 인생은 살아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지금 내가 그렇다. 그러나 예전 결혼이란 새 옷을 입고 살아온 그 세월을 거슬러 돌아가 보면, 그것이 ‘정말 내가 살아온 모습이었던가?’ 하며 스스로에게 반문하게 된다. 겉으로 보면 나는 팔자 좋은 여자였다. 그러나 그 누가 알았으랴, 10년의 긴 세월동안 시집살이로 인해 시름시름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시어머니의 끊임없는 욕설, 억장 무너지는 억지, 욕심, 아들에 대한 지나친 집착. 그 많은 것들을 속으로 삭히려 했지만 나의 몸과 마음은 점점 병들어가고 있었음을 주변의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지금으로부터 2년 전인 2003년, 겨울도 다 끝나가던 2월이었다. 결혼을
1967년 인도로 돌아온 디파 마는 전문적인 수행처에서 행해졌던 전통적인 위파사나 수행법을 바쁘게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서 특별한 수행법으로 정교하게 바꾸어 가르쳤다. 디파 마는 마음챙김 수행은 말하고, 다림질하고 요리하고, 쇼핑하고, 아이를 돌보는 등의 모든 행동의 매 순간에 적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디파 마가 말하는 마음챙김 수행의 전 과정은 ‘우리가 무엇을 하더라고 그것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디파 마는 시끄러운 일상생활 속에서 수행의 힘이 발휘될 수 있다는 믿음을 굳게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그녀를 존경하는 어떤 사람은 “가정생활을 하는 이들의 수호성자”라고 불렀다. 정기적인 수행과 일상생활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느냐는 질문에 디파 마는 “삶에서 수행을 분리할 수 없습니다.”라고
처음 3개월 고행이 삶의 즐거움 잡념 크게 줄고 늘 가피 속 생활 사경은 나에게 새로운 삶을 가져다주었다. 물론 처음 한지에다가 붓으로 선도 직접 긋고 그림도 그리고 글까지 쓰는 힘든 과정이었다. 붓을 잡아서 힘이 드는데다가 먹물조절이 어려워서 선 긋기는 고행 중의 고행이었다. 잠시 한눈이라도 팔면 선이 삐뚤게 그어지고 먹물이 퍼져서 글도 뜻대로 쓰이질 않았다. 도중에 몇 번씩이나 포기하고 싶었지만 이걸 못 이기면 다른 어려움은 어찌 이겨내랴 하는 생각으로 마음을 다잡았다. 그렇게 3개월 쯤 지나니 가장 고통스럽던 일이 가장 큰 즐거움으로 찾아왔다. 선과 그림도 자연스럽게 그려지고 먹물 조절도 적절하게 되어갔다. 사경은 마음을 한 곳에 모음으로써 다른 온갖 잡념들을 털어버릴 수 있도록 만들었다.
굶는백성 구하려 일시키고 양식 줘 어린 나이에 만암 스님이 출가한 1880년대의 우리나라는 말 그대로 초근목피로 연명하던 가난한 형편이었다. 더더구나 네 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열한 살에 어머니마저 별세했으니 만암 스님의 소년시절은 그야말로 궁핍의 연속이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이 설움 저 설움 해도 배고픈 설움이 가장 크다”는 옛말이 있듯이, 만암 스님은 어린 나이에 혹독한 가난과 배고픔을 뼈저리게 겪었기에 훗날 스님이 된 후 흉년이 닥치면 가장 먼저 걱정하는 것이 굶주리는 백성들의 호구지책이었다. 근대화되기 이전의 우리나라 농촌은 아직 수리시설도 형편없었고, 영농기술도 발전되지 못했고, 비료, 농약, 농가구 어느 것 하나도 변변치 못했다. 그래서 걸핏하면 가뭄이 들어 농사
절-참선수행 하다가 사경 시작 전통방식 사경은 참나 찾는 길 이유 없는 외로움이 밀려온다. 나는 누구이고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이렇게 막연한 외로움이 밀려오면 책상에 앉아 향을 하나 사루고 먹을 갈면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사경을 시작한다. 그러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몇 시간이 훌쩍 지나버리기 일쑤다. 내가 처음 절에 발을 디딘 것은 사실 기복으로부터 시작된다. 남편의 승진 시험이 코앞에 다가오자 같이 시험 치는 사람의 부인과 함께 한 절을 찾게 되었다. 그 스님은 나를 보고 가까운 절에 가서 신중단에 절을 하라고 가르쳐주셨다. 같이 놀자고 보채는 어린 아들을 등에 업고 맹목적으로 절을 했다. 매일 삼천배씩 일주일도 하고 그것도 부족해서 아예 절에 가서 며칠씩 있으면서 새벽부터 밤까지 절
병들어 슬픔에만 젖어있던 디파 마는 수행으로 모든 것을 극복한 후 타인에게 정진의 원력을 심어주었다. 1960년대와 70년대에 걸쳐 많은 미국인들은 정신적 가치와 평화를 찾아 동양을 방문하였다. 그 문화적인 배경에는 인간성 회복과 자연회귀를 주장하며 탈사회적(脫社會的) 활동을 한 히피(hippie)의 가치관이 있었을 것이다. 이번 호에 소개하고자 하는 수행자는 그러한 미국인들에게 진실한 삶의 행복을 찾는 일을 도와준 디파 마(Dipa Ma 1911-1989)로 불리운 인도의 한 여성 수행자이다. 어린 두 아이를 잃고, 고혈압으로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있던 여인이 사랑하는 남편까지 잃고 난 후 위파사나 수행을 만나게 된다. 그 수행을 통해 깨달음의 행복을 경험한 후 한 아이의 어머니로
수행은 양파껍질 벗기듯 번뇌 씻는 일 깨달음 기대보다 있는 그대로 관찰 노력 수행을 시작한지 반년이 넘어서부터는 본격적으로 수행하려는 마음을 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면 통증과 감정 상태에 집중하고, 불안의 원인을 찾아가면서 마음이 점차 편안해지자 나의 수행은 일상성 속에 매몰되어 습관화되어갔던 것 같다. 올해 들어서 알게 되었지만 나의 수행의 중대한 장애요인은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상상으로 소설 쓰는 버릇과 관련되어 있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상상내지 공상을 할 것이라고 당연하게 생각했고, 또 혼자 생각하는 것은 남에게 피해주는 일도 아니기 때문에 괜찮지 않을까 하는 안이하고 어리석은 생각 때문에 앉아 있는 시간동안 나는 계속 생각으로 짓는 업(意業
한영스님 문하에서 정진 종정 내던지고 도제양성 날짐승 겨우살이도 걱정 11세 고아돼 동진출가 만암 스님은 전라남도 장성에 있는 백양사 중흥조로 추앙받는 분이다. 스님은 1876년 전라북도 고창에서 태어나 네 살 때 아버님이 세상을 뜨셨고, 열한 살 때 어머니마저 돌아가시자 곧바로 열한 살의 어린 나이에 백양사로 들어가 취운 도진 선사를 은사로 모시고 삭발 출가하셨다. 최근 필자가 확인한 문헌에 의하면 만암 스님 보다 네 살 위인 형이 있었는데 속명은 진섭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 진섭이 훗날 전남 영광군에 있는 불갑사 주지로 재임 중에 열반에 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으로 보아 아마도 셋째 아들 진섭과 넷째 아들이었던 만암 스님(속명은 宗憲)을 한꺼번에 사찰에 맡긴 것으로 보인
밝고 명랑함 속에 깔린 산만함 인식 나와 남이 하나임을 수행하며 체득 글을 쓰려고 하니 우선 수행하기 전의 나의 생활과 현재의 생활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불교학을 전공으로 공부했지만 나는 이론이 아닌 수행이나 수행하는 사람들에 대해 이유 없이 부정적인 마음이 많았다. 그러나 막상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그래도 실제로 수행을 전혀 해보지도 않고 가르칠 수는 없다는 생각에서 수행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순전히 그런 의도에서 시작된 수행은 내게 많은 것을 알게 해주었다. 수행하기 전의 나는 새벽별 보기 운동을 하는 사람처럼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하루 종일 뭔가를 열심히 하면서 살았다. 대학 다닐 때도 새벽반 학원가고 학교 가서 공부하고 아르바이트도 몇 개씩 하면서 늘 바쁘게 살았고,
금강경 독송하며 마음 너그러워져 적연법사 법문 듣고 사구게로 생활 금강경을 독송하는 동시에 집에서 백일기도를 했다. 한 번은 관음정근을 마치는 과정에 얼마나 눈물이 나오는지 배에서 끌어올라 나오는 눈물, 참회의 눈물, 두터운 업을 녹이는 눈물 등 정말 많은 눈물을 흘렸다. 금강경 독송을 중심으로 관세음보살 보문품 백일을 마쳤고 신묘장구대다라니경을 백일 마쳤다. 또 홍산 스님께서 지장기도를 하라고 하셔서 『지방보살보원경』 백일기도를 들어갔는데 마장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집에 불이 두 번씩이나 날 뻔 했으며 그래도 다행히 불은 기적적으로 끌 수가 있었다. 두 번씩이나 일어나고 보니 백일기도를 마치기가 무서워서 스님께 말씀드렸다. 천도식을 해드리고 백일을 마치라고 하시면서 기도 중에는 지장 기도
6.25한국전쟁 후 운허 스님은 경기도 양주의 봉선사 주지 발령을 받아 봉선사로 돌아왔다. 봉선사를 떠난 지 10년만의 일이었다. 그러나 봉선사는 옛날의 그 봉선사가 아니었다. 6.25한국전쟁 통에 대웅전은 불타버렸고 절 모습은 황량하기 짝이 없었다. 교사들 먹이려고 양식 탁발 그 뿐만이 아니었다. 운허 스님이 심혈을 기울여 설립했던 광동중학교 역시 전쟁중에 폭격을 맞아 학교건물은 폐허로 변해 있었고 임시 가건물을 지어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런데 학교살림이 어려워 교사들 월급도 주지 못하는 형편이라 교사들이 끼니를 굶어가며 아이들을 가르치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봉선사의 살림형편도 말씀이 아니었으니 절에서 도와 줄 수도 없었다. 운허 스님은 드디어 비장한 각오로 양식 탁발에 나섰
세계의 수행자를 소개하는 본 코너를 통해서 처음으로 스리랑카 출신의 스님을 소개하게 되었다. 바로 헤네폴라 구나라타나(Henepola Gunaratana 1927∼)스님이다. 스님은 작년에 서울 보리수선원의 초청으로 한국에 오셔서 약 한 달 정도 집중수행지도를 하셨고, 가양동 홍원사의 초청으로 10월 하순 다시 한국에 오셔서 7일간의 집중수행지도와 학술대회의 기조 법문을 해주실 예정이다. 미국에서 10만부 이상 보급된 『가장 손쉬운 깨달음의 길』(손혜숙 옮김, 아름드리미디어, 2001)이라는 책으로 한국의 수행자들에게도 이미 알려져 있는 스님이다. 반테 지(Bhante G)라는 애칭으로 서양인들은 부르고 있는 이 스님은 1968년 이후 미국에서 머무시면서 전 세계에서 수행을 지도해 오고 있는 분이다. 197
고된 시집살이에 절로 관음보살 염불 神病 앓다 금강경 만나 10년째 독송 오남매에 외아들인 남편을 만나 스물여섯에 결혼했다. 시집을 와서 보니 시어머님께서는 신병(神病)으로 앓으시어 여름에도 이부자리를 개어 본적이 없었다. 시름시름 앓으시는 어머님은 늘 무당을 불러 굿을 하시면서 한평생 신에 시달리다가 돌아가셨다. 시골에서 논밭일 밖에 모르시는 시아버님을 따라 논밭 일을 배우며 호미자루 들고 고추밭 고랑이 얼마나 길었던지 처음과 끝이 보이지 않는 밭을 매면서 어느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관세음보살님 명호를 찾으면서 일하다보면 일이 쉬웠고 힘이 들지 않았다. 그러면서 서른 살이 되던 해에 불법의 인연이 있어 조그마한 암자에서 토속신앙과 기복으로 절과 인연을 맺어 7년 세월을 무언가에 쫓기듯
서른 살에 대학졸업후 미얀마행 몸-마음 관찰로 ‘자의식’ 깨달아 서른 살 여름, 10년 만에 늦은 대학 졸업을 한 나는 더 이상 학생도 사회인도 아닌 경계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가족들의 기대도 선후배들의 바람도 모두 내 것이 아닌 것만 같았다. 아침이 오는 것이 두렵고 불안했다. 점점 사람들을 만날 자신이 없어 골방으로 골방으로 몸과 마음을 숨겨갔다. 마침 주말 위파사나 수행을 함께 다니던 친구가 미얀마에 먼저 갔고 이내 나를 불렀다. “모든 것을 잠시 멈추고 지금 수행을 해 보자. 그리고 미래는 그 다음에 결정해도 된다”는 말과 함께. 나는 동의했다. 그동안 수행은 나중에 때가 올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더 이상 내가 한국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보였다.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운허 스님이 통도사에 머물며 후학들에게 교학을 가르치고 있을 무렵, 이 나라 불교계에서는 ‘왜색불교를 몰아내자’는 ‘불교정화 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번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 불교정화운동은 청담, 효봉, 동산, 금오 등 기라성 같은 수좌들이 모두 들고 일어나 ‘청정비구가 이끄는 불교’를 목표로 삼고 있었다. 이 때 불교정화운동의 중심이었던 서울 안국동 선학원으로부터 운허 스님에게 연락이 빗발쳤다. 하루 속히 서울로 올라와 불교정화운동에 동참하라는 독촉이었다. 그러나 운허 스님은 초연한 자세로 오직 불교사전 편찬을 위한 원고작성과 후학양성을 위한 강의에만 전심전력을 쏟고 있었다. 그러자 선학원 측의 대의 스님이 운허 스님을 설득하기 위해 통도사까지 내려왔다. “나는 이쪽저쪽 다 자격이 없네”
산을 오르는 데는 여러 길이 있다. 길마다 특색이 있고, 오르는 사람도 각자의 일정과 등산 경험, 육체적 차이가 있다. 하지만 어떤 길을 따라 오르던지 정상이라는 목적을 향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제각기 다른 길을 가지만, 행복을 이루고자하는 공통된 목적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그 행복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서로 의견이 다를 수 있다하더라도 행복을 추구한다는 점은 공통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트야 나라얀 고엔카 부부(사진 왼쪽에서 첫번째와 두버째)가 도반과 함께 산책을 하고 있다. 불교의 수행은 바로 행복을 추구하는 직접적인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 행복은 물질적인 행복이 아니라, 정신적인 행복이다.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재물의 상속자가 되지 말고,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