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통찰 번뜩이는 입문서 단문-명쾌한 그림도 일품 한 편의 시가 주는 감동이 때로 한 권의 소설보다 진할 때가 있다. 이는 수행서에서도 마찬가지다. 두툼하고 어려운 수행서보다도 얇지만 오히려 많은 것을 느끼게 하는 책이 종종 있다. 불일출판사의 『관』이 바로 그러한 경우다. ‘명상을 통해 얻어지는 자유’란 부재가 붙은 이 책은 미국 샌프란시스코 스틸포인트연구소에서 명상지도자로 활동하는 수자타 씨 저술로 86년 우리나라에 처음 번역돼 소개됐다. 이후 입에서 입으로 소문이 나면서 지금까지 24쇄 째 발행하고 있는 스테디셀러다. 이 책은 지금이야 익숙하지만 초판 당시까지만 해도 낯설었던 수식관과 위파사나에 대해 소개하고 있는 수행입문서다. 그렇다고 무작정 방법만 소개하고 있는 것은
애끓는 절규와 통곡소리가 그치치 않는 장례식장. 그러나 내 앞엔 조문객 하나 없이 돌아가신 노인이 있다. 이 분도 분명 누군가의 아들로 태어나 친지도 있었고 친구도 있었고 부인과 자식들이 있었을 텐데 무슨 사연으로 이렇게 홀로 외로운 길을 가고 있는지…. 멀고 외로운 길 가는데 내 염불과 부처님 말씀이 벗이 되어 주기를 다음엔 더 좋은 곳에서 태어 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나무아미타불을 부른다. 나는 장례지도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죽은 이의 몸을 씻기고 이승에서의 마지막 옷인 수의를 단정히 입혀 극락왕생하길 기원한다. 한 달에도 예닐곱 차례씩 시체를 직접 만지는 이 일을 선택한 것은 아버지의 죽음 때문이었다. 그 전까지는 평범한 샐러리맨으로 종교란 내 일신의 평안만을 위해 있는 것이라 여겼다.
종로거리를 가득 메운 운구행렬 광경 효봉 스님은 6·25 피난길에 인연을 맺은 경남 통영의 도솔암에 머물고 계셨다. 이 무렵 우리나라 불교계에서는 동산 스님, 청담 스님을 주축으로 불교정화운동이 오월의 불길처럼 번지고 있었다. 효봉 스님도 흔쾌히 불교정화운동에 동참했고 그 일로 서울에 자주 올라와 안국동 선학원에 머물게 되었다. 불교정화운동에도 선봉 이때 선학원에는 불교정화운동을 지지하는 전국의 청정 비구, 비구니 스님들이 자주 드나들게 되었는데, 선학원이야말로 청정 비구 스님들의 유일한 의지처요, 불교정화운동의 산실이며 구심점이었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별의별 비구 스님들이 서울에만 올라오면 선학원에 머물게 되었고 방 한칸에 여러 스님들이 함께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런
부친상 이후 장례지도사 길 선택 “엄마 이제 집에 가자.” 7살 꼬마 아이는 절에 가는 길이 멀고 험하기만 했다. 아이의 손목을 낚아챈 어머니는 막무가내로 끌고 그 고갯길을 넘었다. 어머니는 절에서 다리가 휘청거릴 정도로 절을 했고 입으로는 끊임없이 관세음보살을 염했다. 지금은 나의 일상이 된 염불과 절. 어릴 적 아무것도 모른 채 어머니 손에 이끌려 도선사에 발을 디딘 게 불교와의 첫 인연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 내가 죽은 이들을 염해주는 독특한 직업을 갖게된 원인이 됐는지도 모른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가 그러하겠지만 고단한 어머니 삶에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은 구원의 빛이었다. 이렇게 평생을 불심으로 살아오신 어머니 덕에 나는 자연스레 불자가 되었고 보림청년회 활
Q. 법장비구가 마흔 여덟 가지의 큰 원(願)을 세우시고, 마침내 성취하여 아미타불이 되셨다는 것은 상식입니다. 그렇다면 석가모니불이 되신 싯다르타와 법장비구는 어떤 관계입니까? A. 먼저 『무량수경(無量壽經)』을 근거로 해서 법장비구의 프로필을 간단히 살펴봅시다. 그는 한 나라의 왕(王) 자리에 있던 분으로, 온 백성의 생사여탈권을 쥔 최고의 권력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니 생사(生死)가 너무나 뚜렷합니다. “언젠가는 권력도 없어질 것이고, 나이를 먹다보면 몸은 병들고 늙어갈 것이다. 그러다가 마침내는 죽어갈 것이다.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서 기다릴 수만은 없지 않은가?”하는 절박한 마음으로 왕위에 대한 미련을 버리십니다. 그리하여 절절한 발원을 하면서 치열한 구도의
바른 수행의 길을 걷는 수행자에게 탐욕의 마음과 성냄의 마음, 그리고 어리석음의 마음은 깊이 뿌리내릴 자리가 없다. 그렇게 번뇌와 멀어진 마음은 지혜로써 밝아지며 자애의 마음으로써 부드러워진다. 그러한 고요한 행복은 참으로 의지할 만 하다. 오래전 한 스님께서 ‘현생에서도 삼악도를 보게 된다.’라고 하신 말씀이 기억난다. 수행의 길을 걷는 지금에서야 이제 세상이 말하는 즐거움이라는 것은, 삶이라는 과정은 의지할 만한 행복이 그 어디에도 없음을 보게 된다. 얼마 전 선원에서 돌아오는 길의 지하철 안은 노조 파업의 결과로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사람들의 뜨겁고 끈적이는 몸과 몸이 짓이겨 진 듯 맞닿아 있으며, 그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가장 불만족스러운 표정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입으로는 험한 말들
2002년의 마지막 달, 지금은 ‘겨울’이라고 이름 붙여야하겠지만, 그때 내가 머물었던 그 대륙은 금방이라도 모든 것이 녹아내릴 듯 햇볕이 강하고 공기가 뜨거웠다. 점점 더해지기만 하는 삶의 무게로써 다가오는 정신적인 고뇌와 ‘나’라는 존재에 대한 의문에 대하여, 여느 젊은이들처럼 세상일의 즐거움이나 성취로써 치환시켜주지 못했던, 나는 어찌 보면 참으로 도도한 부적응자의 모습이었던 것 같다. 하여 아직 ‘학생’이라는 이름이었던 그 몇 해 동안, 그 고뇌에 대한 해답을 구하고자 많은 현자들이 머무른다는 땅들을 홀로 방랑하였다. 인도 중부의 엘로라석굴로 향하는 녹슬고 뒤틀린 로컬버스 안에서 만난 한 여인에게서 ‘위파사나’라는 것을 처음 전해 듣게 되었다. 가볍게 흘려 넘기고야 만 그 이름이 내게 크나큰 인
20세기 초 중반에 태국의 선지식 아찬 문 스님에 의해 부활된 숲 속 수행 및 두타행의 전통은 몇 몇 출중한 제자들에 의해 이어졌다. 그 가운데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분이 바로 아찬 차(1918~1992) 스님이다. 아찬 차 스님은 1918년 1월 17일에 우본 라차타니의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 관행에 의해서 어릴 때 사미생활을 경험한 후에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출가생활에 대한 매력을 느낀 청년은 20세가 되던 1939년에 다시 출가하여 비구가 되었다. 법명은 보딘야나(Bodhinyana)이다. 비구가 된지 몇 년동안 팔리어와 교학을 공부하였으나, 비구가 된지 5년이 지난 해 아버지와의 사별을 계기로 수행에 대한 절실함을 느끼고 두타행을 시작하게 된다. 아찬 차 스님과 제자들.
몽중일여 단계 아니면 입도 열지 말라 간절하게 끊임없이 참구하면 한 소식 화두는 어떻게 지어 가는가. 목숨 걸고 화두를 들면 분명 소식이 있을 것이라 하지만 이 또한 처음부터 쉬운 것은 아니다. 초심자들로서는 선지식들의 가르침에 따라 드는 수 외에 별다른 방법이 없다. 『화두 짓는 법』은 나옹, 허운, 성철, 만공, 한암, 서암 스님 등 한구고가 중국 대표 선승 14명이 설한 ‘화두 짓는 법’을 담고 있다. 성철 스님은 화두를 지어가는데 있어서 꿈에서도 화두가 성성하는 ‘몽중일여’ 단계에도 미치지 못한 사람은 아예 입도 열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다. 나아가 깊은 잠에 들어서도 여여한 ‘숙면일여’가 되어도 거기에 머물지 않고 더욱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백척간두에서 한 걸음 더
사리자와 목건련이 붓다와 조우한 땅에 서니 긴 대숲바람 순례자를 반기누나 1만여 학인 스님들이 기숙하며 공부했던 세계 최대·최고의 대학 나란다 전경. 마가다(Magadha) 왕국의 수도 라즈기르(Rajgir)는 붓다의 일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곳이다. 우리에게는 왕사성(王舍城)으로 더 잘 알려진 라즈기르는 가는 곳마다 붓다의 흔적이 가득한 불교 8대 성지 중의 하나이다. 그 유명한 최초의 불교사원 죽림정사(竹林精舍)가 위치해 있고, 붓다와 깊은 인연을 맺고 외호자가 되었던 빔비사라 왕, 그의 아들 아자타샤트루, 붓다의 수제자로 승단에 큰 영향을 미친 사리푸트라(사리불)와 목갈랴야나(목건련), 붓다 입멸 후 교단을 이끈 상수제자 마하 카사파 등이 이곳에서 붓다와 인연을 맺었다. 『
강진 백련사 전경. 염불 중심의 백련사결사가 시작된 곳이다. 서울에서 강진까지 천리 길. 꼭두새벽에 길을 나서 백련사(白蓮寺)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점심을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잘 닦인 아스팔트가 끝나는 곳에서 백련사의 명물 동백 숲길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사계절 푸른빛을 띠고 있는 동백들이 절 마당까지 긴 터널을 이루고 있다. 일주문인 셈이다. 긴 장마 뒤에 내리쬐는 따가운 햇살에 터널 안 여기저기서 동백 잎이 생선비늘처럼 반짝인다. 다시 300여 미터 동백 길을 오르자 수십 미터는 족히 될 팽나무 뒤로 천년가람이 펼쳐져 있다. 백련사는 만덕산(萬德山)이 가람을 보듬는 형상이고 앞으로는 툭 트여 개간지와 강진만이 비단 띠마냥 휘돌고 있는 천혜의 도량으로 손꼽힌다. 백련사의 옛 이름은
북한동포를 돕기 위한 우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두만강변에 굶주려 죽은 시체가 쌓이고 TV를 통해 젖먹이에게 먹일 젖조차 부족하여 아이를 밀쳐내는 부인이 방영되는 것을 보게 되었다. 민족의 대수난의 늪 앞에서 우리들은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사회적 냉담함 속에서, 그리고 남·북한 정부끼리의 치졸한 밀고 당기기 싸움 앞에서 내 맘속의 분단 의식을 돌아보고자 시작한 것이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위한 24시간 1000일 정진”이었다. 2000년 3.1절을 기점으로 시작된 입재식에 참여한 모두는 기필코 당시의 얼어붙은 마음들을 녹여 통일을 이루리라는 비장함까지도 배어있었다. 1000일 정진 기간 중 100여 일이 지났을 때 남과 북의 전상들의 만남이 이루어 졌으며 차츰 차츰 화해의 분위기가 피
염불은 일체 인연에 감사·보은하는 것 칭명·관상염불 전통 수행법 소개 범부도 지극정성 염하면 윤회 끊어 “염불은 진실한 믿음으로 보리심의 꽃인 정토를 염원하여 일심으로 명호를 부르고, 자연과 생명의 청정광명을 관찰하는 수행이다. 염불은 부처님을 우러러 생각하고 그 지혜를 한결같이 엎드려 믿어, 믿음을 성취해 안심을 얻고, 일체 인연의 은혜에 감사하고 보은하는 수행이다.” 정목 스님의 염불에 대한 이 한마디는 우리가 왜 염불수행을 해야 하는지를 전하고 있다. 금정산 범어사에서 출가한 정목 스님은 쌍계사와 범어사 강원에서 수학하고 강사 소임을 지낸 후 중앙승가대를 졸업했다. 계정혜를 온전히 닦아야겠다는 일념에 따라 수행법을 고민하다가 염불수행을 선택한 정목 스님은 1998년 하안거 정진
38세 늦깎이로 삭발 출가하여 우리나라 불교의 대표종단인 대한불교조계종 종정(宗正)까지 지내신 이효봉(李曉峰)스님은 구산(九山)스님과 법정(法頂)스님의 은사로 잘 알려져 있다. 효봉 스님에게는 '엿장수 중', '판사 중', '절구통 수좌'등 별명이 많았다. 1888년 평안남도 양덕군에서 태어난 스님은 일본 와세다대학 법학부를 나와 조선인으로는 최초로 판사가 되었고 평양 복심법원에 근무하다가 ‘사형선고’ 내린 것에 회의를 품고 홀연 가출, 부귀영화를 미련 없이 내던지고 엿장수로 변신하여 3년여를 떠돌다가 나이 38세에 금강산 신계사 보문암에서 석두화상을 은사로 삭발 출가하였다. 평생토록 무(無)자 화두를 들고 참구했던 효봉스님에게는 ‘엿장수 중’, ‘판사 중’, ‘절구통 수좌’, ‘너나잘해라
암바팔리 미성 유마힐의 침묵 7백비구 격론이 생생히 되살아나고… 바이샬리 결집이라고도 불리는 제2결집터 전경. 커다란 호수 옆의 숲속이 제2결집터로 추정되는 곳이다. 붓다가 각별하게 사랑했던 지역답게 바이샬리에는 붓다와 관련된 유적이 즐비하다. 붓다가 바이샬리를 애틋하게 여긴 이유로는 특유의 자유롭고 열린 분위기를 갖고 있는 이 지역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에서 기인했을 것이다. 붓다는 이 지역 사람들이 화합하고 함께 모여 의논하며 토론하는 모습을 보고 이들이 이런 태도를 버리지 않는 한 쉽게 패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붓다가 가장 즐겼다는 과일은 망고이다. 어쩌면 붓다가 바이샬리에 애틋한 정을 갖게 된 원인 중의 하나에 망고가 많다는 점도 포함될지 모를 일이다.
방장과 매일 독참 “無를 꿰뚫어라” 600년 청정 가풍 유지…아직도 탁발 宋代 선 수행-선원 생활 그대로 계승 평소 참선 점검은 하루 한 번씩 이뤄지지만 용맹정진 때는 하루 다섯번씩 독참이 진행된다. 사진은 방장 스님과의 독참을 기다리고 있는 수행자들. 로오하츠 오오젯신의 혹독한 수행을 한 사람의 낙오자도 없이 처음부처 끝까지 모두 다 거뜬히 마쳤다. 비결은 무엇일까? 그것은 미야모토 방장 스님과 각 수행자 사이에 개별적으로 이루어지는 하루 다섯 차례의 참선 점검, 즉 독참(獨參)에 있다. 하루 다섯 차례이니, 4∼5시간마다 독참이 있는 셈이다. 평상시에도 독참은 하루 한 차례씩 있다. 독참 시간에 수행자는 방장 스님과의 일대일 선문답을 통해 화두에 대해 자신이 깨달은 바를 점검받는
차(茶)란 ‘①차나무의 준말 ②차나무의 어린잎을 따서 만든 음료의 재료 ③차를 우린 물’이란 사전적 정의를 가지고 있으나 일반적으로 두 번째와 세 번째의 의미로 많이 사용하고 있다. 차나무의 잎으로 가공한 것만 차라는 명칭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차나무잎으로 만든 차 이외의 모든 마실 거리도 차라는 말을 붙여서 무슨 무슨 차라고 쓰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것은 대용차로서 통용 될 뿐 바른말이 아니며, 커피, 탕, 죽, 즙 같은 마시고 먹을거리 전부를 차(tea)라고 부르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차(茶, tea)는 세계 공용어이기 때문이다. 차나무는 우리나라에서는 남부지역에서만 생육되듯이 아열대성 상록수이다. 식물학자간의 오랜 논쟁이 되어 오던 차나무의 분류는 국제식물명명법(Inter
茶. 이제 차는 불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차 마시는 것과 참선을 하나로 보는 불가의 독특한 선다일여(禪茶一如)의 전통이 불자들에게서부터 일반인에 이르기까지 대중들에게 크게 어필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차를 배우는 예절은 까다로워 스타크래프트 등 인터넷 게임과 햄버거, 피자 등 인스턴트 식품에 젖어있는 요즘 어린이들의 정서교육으로도 크게 도움이 돼 관심을 끌고 있다. 역사의 향기가 가득한 사적 257호 운현궁 노락당에서 어린이들이 민속다례춤을 선보이고 있다. 한국 전통다례의 맥을 잇고 있는 명원문화재단이 사회적 흐름에 발 맞춰 어린이 민속다례춤을 처음으로 일반인들에게 선보였다. 7월 21일 종로구 운니동에 위치한 운현궁 노락당에서 열린 ‘제 1회 어린이 민속다례춤’은 다례를 행하는 예를 음
자우차회 회원들의 차회 모습. 자우차회(회장 이순희)는 불교신도들을 중심으로 1979년 창립돼 현재까지 한국의 전통차를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리는데 주력하는 전남의 대표적인 차회다. 1979년 우록 김봉호, 행촌 김재현 선생과 더불어 20여명의 창립회원들로 꾸려진 해남 자우차회는 20대 새댁부터 70대 이르기까지 100여명의 다양한 연령층의 회원들로 구성돼 있다. 자우차회에서는 매달 일반단체 및 주부들을 대상으로 실생활에 필요한 기초적인 차 끓이는 방법, 마시는 방법 등 기초적인 차 강좌를 정기적으로 열고 있다. 또 지역주민들을 위해 다도강연회를 개최해 한복 바르게 입기, 절하는 방법 등과 기본예절까지 교육하고 있다. 자우차회를 이끌고 있는 이순희 회장은 한국차인연합회의 이사와 부회장을
차 품평회에서 참석자들이 차를 맛보고 있다. 한국차의 우수성과 차 품질의 기준을 마련하는데 초석이 될 ‘제 1회 대한민국 차 품평회’가 경주보문단지에서 성황리에 개최됐다. 지난 7월 17일부터 18일까지 양일간 열린 이번 대회는 일반인들에게 한국차의 기준을 제시하여 차 애호가가 믿고 살 수 있는, 소비자와 생산자의 관계를 선명하고 깨끗하게 한다는데 목적이 있어 그 의미가 깊다. 차 대회에는 봉황다원을 비롯해 다우제다, 쌍계제다, 곡천다원 등 300여개의 차 생산농가들을 비롯해 일반대중과 차 애호가 2000여명이 참석했다. 이번 품평회에서 가장 우수한 성적을 거둔 농림부장관 우수품질상에는 봉황다원의 ‘월광차’가 차지했으며 우수상은 천보다원의 ‘보성천보녹차’가 선정됐다. 품질상에는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