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경’의 ‘아승지품(阿僧祗品)’은 굉장히 길이가 짧습니다. 숫자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아승지에서 ‘아’는 없다는 부정사입니다. ‘승지’는 한문으로 번역하면 수(數)입니다. 아승지는 곧 무수(無數)라는 뜻입니다. 무수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숫자가 없는 것 또는 아주 많은 것입니다. 여기에서 아승지는 ‘무수히 많아 헤아릴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화엄경’에서 부처님은 단 두 품을 말씀하셨고, 나머지는 보살님이 부처님을 대신해 설하십니다. ‘아승지품’과 ‘여래수호광명공덕품(如來隨好光明功德品)’은 부처님께서 설법하신 내용입
33년 전쯤으로 기억이 된다. 군인 가족이었을 때 군법당과의 인연이 불교에 첫발을 딛게 된 계기였다. 어린 아들을 등에 업고 법당에 가면 아들은 법당에서 기어 다니며 신나게 놀았다. 이렇게 불교와 인연이 되었고, 부산으로 이사를 내려오게 되면서 불교는 내게 더욱 가까이 접할 수 있는 종교가 되었다.부산에서 지낸 이후로 틈틈이 인연 닿는 사찰을 순례하듯 찾아다니면서 기도를 이어가던 중, 한 스님의 권유로 매일 신묘장구대다라니 21독을 해보라는 제안을 통해 다라니 기도를 알게 되었다. 다라니 기도에 관심이 가기 시작하면서, 부산에서는
‘한수의 시를 적어서/ 사람들 가슴을 적시고 싶다. … 행여 내 노래가/ 감동을 주지 못하고/ 영혼을 일깨우지 못하면/ 바로 붓을 꺾어/ 입을 닫을지라도/ 오늘은 혼신으로 노래를 지어/ 그들에게 들려주고 싶다.’(‘한수의 시’ 중에서) ‘설담원 이야기’는 시집이다. 책 끝에 적힌 ‘한일여고 교사 김선홍’ 씨의 글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분의 수줍은 고백이 담긴 한 수 한 수를 시집으로 모았습니다.’ 책 편집 초기부터 저자의 허락을 얻어 출간한 건 아닌 듯하다. ‘그저 따스한 시선과 마음으로 읽고 또 읽으며 위로받고 공감하는
돌이켜보니 그 기간은 우리 부부를 공부시키기 위한 시간이었음을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남편으로부터 나의 기도 덕분이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런 남편의 변화는 오히려 나 자신을 돌아보게 해 주었다. 나야말로 남편과 아들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다. 가까운 이들을 배려하고 더 낮은 자세로 살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사무쳤다. 종무소에서 봉사 도우미 제의를 받았을 때도 감사함과 참회의 수행으로 여기며 이번에는 남편에게 허락을 받아 2년동안 종무소 봉사에도 기꺼이 참여하게 되었다.봉사 활동을 하면서 배우는 것이 더 많았다. 특히 사찰에서 진행되
아침 출근길이 쌀쌀합니다. 저는 지하철을 타고 출근하는데요, 모 역에 정차하는 동안 대합실 벤치에 앉아 계시는 어르신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 모습이 왠지 너무도 쓸쓸해 보입니다. 열린 문사이로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나이가 들수록 무엇인가 할 일이 있어야 긴 노년의 삶이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무엇인가 할 일이 있다는 것이 노년기에는 참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느끼는 순간이었습니다.그나마 복지관을 찾아오시는 어르신들은 노년을 보람되고 알차게 보내고 계시는 분들인 것 같습니다. 요즘 복지관에서는 어르신들이 어
신라 본국의 명령에 따라 자장이 급거 귀국한 선덕여왕 12년(643)은 내우외환의 국가적 위기에 직면한 시기였다.대내적으로는 진평왕대(579〜632)의 54년이라는 오랜 통치기간을 통하여 정치적 안정을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들이 없어 딸이 왕위를 계승하게 되자 ‘여왕(女王)’이라는 점에서 통치능력에 불신을 사게 되었다. 즉위 초기에는 종실의 대신 을제(乙祭)가 나라의 정치를 총괄하는 섭정을 담당하였고, 뒤이어 상대등 수품(水品)과 내성사신 용수(龍樹)가 국정과 궁중의 관리를 분담하였다. 그러나 여왕의 통치능력에 대한 불신은 해소되
한 해가 저물고 새해가 밝았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밝아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네 번에 걸쳐 새해를 맞이하는데요. 그 시작이 동지입니다. 팥죽을 먹으며 액운을 떨치는 의미를 갖습니다. 양력 1월1일에는 전국 각지의 사찰에서는 타종식을 함으로써 새해가 되었음을 알립니다. 음력 1월1일에는 떡국을 먹고 웃어른께 세배를 하면서 문안을 여쭙고 덕담을 듣습니다. 2월4일 또는 5일에는 12지지의 띠가 바뀌는 때로 ‘입춘대길 건양다경(立春大吉 建陽多慶)'이라는 글귀를 문 앞에 걸어두어 한해의 길운을 기원합니다. 여러 차례에 걸쳐 새해를
결혼 전에는 어머니를 따라 한두번 절에 간 기억이 전부였다. 결혼 후는 시어머님께서 다니시는 절을 따라가게 된 이후 초하루마다 동행하게 되었고, 절이 집에서 다니기에는 다소 먼 곳으로 이전했음에도 어머니와 함께 15년 정도 신행 생활을 지속했다. 하지만 마음속에서는 늘 부족함을 느꼈다. 사찰의 규모가 작다 보니 개인 기도를 하기에는 좋았고 그래서 기도하는 힘도 많이 길러졌지만 법문이나 불교 공부를 체계적으로 배우기에는 갈증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시간이 나면 집 근처의 다른 사찰에서 사경을 했다. 처음 다니던 절의 스님께서 숙제처럼
사경수행을 열심히 하면서 절을 좀 덜 찾았다. 그 전에는 절을 제집 드나들 듯 했었다. 하루에 5000배도 했었고, 신묘장구대다라니 기도도 3년씩 2번이나 했다. 1000개의 초를 켜고 혼자서 하루 꼬박 기도한 적도 있다. 지인과 둘이서 밤새 기도했던 기억도 있다. 백일기도, 천일기도, 합동기도 등 절에서 하는 기도에 동참한 것은 일일이 열거하기도 어렵다. 그때는 절에 가지 않으면 큰일 나는 줄 알았다. 조금만 좋지 않은 일이 생기면 ‘절에 가지 않아서 그런가’하는 생각부터 했었다. 그러나 사경을 열심히 한 이후로 큰 행사 때와 특
어린이 법회에서 봉사하시는 김보살님이 절에 올라왔습니다. 시골 사시는 친정 아버지가 전립선암 초기라 수술을 했는데, 건강하던 어머니가 갑자기 머리가 아프다며 일어나지 못한다고 합니다. 큰 병원에서도 병의 원인을 찾지 못했습니다. 얼마나 아픈지, 마약성분이 있는 가장 강한 진통제를 써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수술하러 서울에 올라오기 전에 광에 대못을 박았는데, 광을 건드려서 내가 아프다’며 이상한 이야기만 계속 하신다 합니다. 김보살님은 이런 미신적인 이야기를 스님께 하면 혼날 줄 알지만, 어머니가 너무 아파서 잠도
자장은 ‘중고’기 후반에서 ‘중대’로 넘어가는 전환기의 불교계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던 만큼 극적인 반전을 거듭한 삶을 영위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생애는 4시기로 구분해서 이해하는 것이 편리하다. 첫째는 출가와 수행 시기, 둘째는 입당 유학 시기, 셋째는 대승통으로서의 교단 통솔 시기, 넷째는 은퇴 입적 시기 등으로 시기 구분이 가능하다. 자장은 3등 관계인 소판 무림(武林)의 아들로서 진골 귀족 가운데서도 왕실과 가까운 가문의 출신이었다. 또한 그의 아버지가 천부관음(千部觀音)을 조성한 공덕으로 자장을 얻었고, 석존의 탄일인 4월 8
저녁 10시. 향을 사르고 잠시 명상에 잠겼다. 사경을 시작하기 전 몸과 마음부터 가다듬는다. 선망부모조상님들을 위한 기도를 드리고 사경에 들어간다. 대개 11시에 사경을 끝낸다. 하루 중 가장 경건한 시간이다.사경수행을 시작한 때가 1991년이었으니 28년째다. 예전 같으면 강산이 3번 변하는 시간을 거친 셈이다. 중간에 잠시 쉰 적이 있으나 거의 지속적으로 사경했다. 아는 선배의 동생이 비구니스님이셨다. 스님께서 ‘반야심경’ 사경집 10권을 주면서 인연 있는 사람에게 주라고 했다는데, 내게로 왔고 내가 사경을 접한 계기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