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에게 투표권이 없었던 1873년 미국. 수전 앤서니(1820~1906)는 신성한 선거장에 나타나 자격도 없는 투표를 하겠다고 시위를 벌였다. 결국 불법으로 규정돼 재판정에 섰다. 그 자리에서 그는 미국 역사에 길이 남는 명연설을 토해냈다.“헌법에 명시된 ‘우리(we)’는 현재의 우리들과 후손들의 반쪽만을 위한 것이 아니며 남성은 물론 여성을 포함한 모든 사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고 묻는다. ‘여성은 사람입니까?’그녀 특유의 간단명료한 논거가 전개됐다. ‘여성은 사람이 아니다’라 말할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여성도 ‘우리’에
단언컨대 역대 봉축법어 가운데 가장 강력(?)하다.“부처님 법은 중생의 현실적 고통을 덜어주고, 실제적인 이익과 긍정적 변화를 이끌어 내는 실사구시(實事求是)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불교는 냉철한 합리적 사고와 행동을 멀리하고 마음만 깨치면 그만이라는 ‘깨침의 신화’에 매몰돼가고 있습니다.”이타(利他)를 외면한 채 자리(自利)만 구하고 있지 않느냐는 광주 원각사 회주 현고 스님의 촌철살인이다.송광사 구산스님 은사로 출가조계총림 사격 조성한 주인공불교환경·사회복지 지평 열어템플스테이 처음 착안해 실행성직자는 진리 실천하는 사람관념적
‘착하게 살아라’ 강박 관념‘내려 놓아라’에 풀려 발심‘공부하다 죽어라’ 혜암선풍달마선원 대중과 함께 진작 ‘미혹할 땐 나고 죽더니(미즉생멸심·迷則生滅心)/ 깨달으니 진여성이네(오래진여성·悟來眞如性)/ 미혹과 깨달음 모두 쳐부수니(미오구타료·迷悟俱打了)/ 해가 돋아 하늘과 땅 모두 밝도다(일출건곤명·日出乾坤明).’‘나의 몸은 본래 없는 것이요(아신본비유·我身本非有)/ 마음 또한 머물 바 없도다(심역무소주·心亦無所住)/ 무쇠 소는 달을 물고 달아나고(철우함월주·鐵牛含月走)/ 돌사자는 소리 높여 부르짖도다 (석사대효후·石獅大哮吼)’원당
부처님은 무우수 아래 태어나시고,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이루셨으며, 사라수 사이서 열반하셨다. 그러기에 무우수, 보리수, 사라수는 불교 3대 성수(聖樹)로 일컬어진다. 그 중에서불자들이 ‘애지중지’하는 나무 한 그루를 꼽으라면 단연 보리수다.불자들의 가슴에 깊이 심어져 있는 보리수지만 품종 구별이 다소 어려워 오해하고 있는 불자들도 꽤 많은 듯하다. 일례로 법주사 대웅전 앞 보리수를 보고는 ‘어렸을 때 빨간 열매 따 먹었던 보리수 잎과 왜 다르냐?’의문을 갖는 사람이 꽤 있다. 심지어는 ‘이 나무가 진짜 보드가야 마하보리사에 있는
책 첫 장을 열어 글 한 줄 직면하고는 이내 덮은 책 한 권이 있다. 허허당 스님의 잠언집 ‘바람에게 길을 물으니 네 멋대로 가라 한다’. 얼마 전, 꽃샘추위와 함께 만난 글은 이랬다.‘사막은 사람을 푸르게 한다/ 풀 한 포기 없는 사막에서 사람 스스로 푸르더라/ 두려워 마라/ 그대가 지금 황량한 사막에 홀로 있어도/ 온 세상을 푸르게 할 수 있는 주인공이다’사막 한 가운데 서 있는 쓸쓸함, 광활한 우주마저도 품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기개. 이 둘이 섞여 만들어 낸 묘한 감정의 그 무엇이 온 몸을 휘감았다. 책을 덮고 동네 야산의
경기도 화성 태봉산 자락에 자리한 무우사(無優寺)를 오르는 산길은 의외로 깊었다. 도심 한 복판에 다소곳이 앉아있는 작은 산이지만 우거진 숲이 전하는 고즈넉함은 여느 산사와 비견해도 손색이 없다. 그 산길을 오르며 뜬금없이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 ‘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원제. All The Names)’가 떠오른 건 ‘무우사’라는 특이한 사찰명 때문이리라. ‘세상 만물 각각에 이름을 부여한 건 인간이다. 제대로 지어놓기나 한 것일까? 혹 그 이름으로 인해 그 존재 의미가 퇴색되지는 않았나?’하는 의문과 동시에 ‘이름이 있기에 새로운
범어사 교수사 홍선 스님이 주석하고 있는 휴휴정사를 3월 봄비가 촉촉이 적시고 있다. ‘쉰다’는 건 쉬운데, 쉬고 또 쉰다는 ‘휴휴(休休)’는 어렵다. ‘휴거헐거(休去歇去)하면 철목개화(鐵木開花)’할 것이라 했지만, 어떻게 ‘쉬고 또 쉬어야’ 쇠 나무에 꽃이 피는 이치를 알 수 있을까? 스님이 손수 차를 내는 사이 슬며시 여쭈어 보았다.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쉴 일 없습니다.”‘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잔다’는 한 마디라도 전할 법한데 아니다. 차 한 잔 따르던 스님이 책상으로 시선을 돌린다. 저길 한 번 보라는 뜻일 터. 책상에 수
화두도 난이도가 있냐고 묻는 건 우문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선가에서도 유독 ‘어렵다’ 평하는 관문이 있는 게 사실이다. 그 하나가 ‘도솔삼관(兜率三關)’이고, 또 하나 꼽는다면 ‘덕산탁발화(德山托鉢話)’일 것이다. 그런데 40여년 전, 선가에서도 혀를 내두르는 이 두 화두를 전국 제방선원에게 던진 주인공이 있다. 설봉 스님이다. 1890년 함북 부령에서 태어난 설봉학몽(雪峰鶴夢) 스님은 1910년 조선총독부에 취직했지만, 얼마 후 항일운동에 관련되어 검거되었다. 1915년 25세 때 함경남도 안변 석왕사로 출가한 후 만공, 용성 스
법륜사에 하얀 눈이 잠시 날렸다. 소나무와 대나무가 어울려 있어서일까? 도심사찰이라기 보다는 산사 느낌이다. 해월 선래 스님이 처음 이곳에 당도했을 때도 ‘탁’ 하니 펼쳐진 경치가 마음에 들었을 것이다. 선래 스님이 주석하고 있는 요사채를 ‘학소대’라 이름한 연유가 능히 짐작 간다.출가 전 선래 스님이 고등고시를 패스해 ‘세상을 호령해 보겠다’며 운달산 김용사로 들어간 건 1957년. 시간 날 때마다 사찰업무를 봐 주던 청년은 종무일로 서울 총무원에 갔다 동산 스님을 처음 만났다. 한 눈에 보아도 거목임을 직감했다. 동산 스님 역시
올해 들어 명예퇴직을 신청한 교사가 전국적으로 5000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해를 거듭할수록 학생 지도에 애를 먹고 있는 교사들이 교단을 등지려 하기 때문이다. 꿀밤 한 대만 주어도 학부모가 교장실로 달려 가 항의하는 시대니 ‘사랑의 매’는 엄두도 내지 못한다. 대입제도 다양화에 따라 사설학원 비중이 높아진 것도 큰 요인으로 꼽힌다. 학교와 학원 비중을 50대 50으로 보지만 일각에서는 그 균형추마저 학원으로 넘어갔다고 토로한다. ‘강물은 굽이쳐도 바다로 간다’는 현 교육풍토에 비춰볼 때 캄캄한 동굴에서 들어 올린 횃불 같았다. 한
조계종 최초 비구니 강원은 현 동학사 승가대학이다. 대강백이었던 경봉 스님을 초빙하며 강원 문을 연 것이 1956년이니 58년이라는 역사가 스몄다. 현재 강단에 서 있는 비구니 강주 중 동학사 강원을 나오지 않은 스님이 없을 정도다. 그 자긍심 실로 클 터. 하지만 드러내지 않는다.동학사와 강원의 역사를 오늘 날까지 이끈 인물 한 명을 꼽으라면 단연 일초 스님이다. 일초 스님은 1980년대 중반 주지를 맡으며 대작불사를 일으켰다. 지금의 동학사 사격은 그 때 이뤄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일초 스님의 향훈(香薰)은 동학사에
‘비운의 혁명가’ 박헌영 아들아버지 사형 소식 충격에승복 벗고 산사 나와 방황절 신도 손가락질 참을만도반마저 ‘빨갱이 새끼’정부 기관 감시눈길 ‘공포’송담 스님 첫 제자로 출가한과 그리움 시심에 녹여‘500편 낙서’모아 시집 발간격동의 근현대사 고통 껴안고‘원수 갚지말고 은혜 갚아라!’ 도안(道安) 스님의 경책에 따르면 출가란 ‘어버이와 일가친척을 떠난 것이며 세속의 몸치레를 버린 것’이다. ‘쌀 한 톨에도 7근의 시주 은혜가 깃들어’ 있음을 뼈에 새기며 ‘니르바나에 이르려는 수행인’들에게 출가 전의 일을 굳이 캐묻지 않는 이유가
‘그대가 이미 출가했으니 수도인(修道人)이라 불린다. 임금에게도 신하 노릇을 하지 않는다. 온 천하가 머리를 조아려 정성스레 공경한다.’ 중국 남북조 시대의 도안 법사가 후학을 위해 남겨 놓은 이 말은 승가의 당당함을 피력 하려 할 때 종종 인용된다.상대방으로부터 무엇인가를 얻으려면 우선 내가 머리를 숙여야 하는 법이다. 하심이나 겸손과는 그 의미가 완전히 다른 거래를 위한 어쩔 수 없는 낮춤이다. 이 낮춤이 도를 넘으면 비굴, 굴욕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납자는 명예나 부귀를 구하지 않기에 임금 앞에서도 신하 노릇 할 이유가 없다.
밝음이 어둠 깨트린다. 이건 상식지혜. 밝음 어둠 동시에 보아야 불교지혜.나는 도인 아닌 도를 공부하는 수좌.장님이 눈 뜬 후 장님에게 개안 확인하는가.절박하게 찾아보라. 선지식은 이 땅에 있다. 10월11일 부산 안국선원 법당에 수불 스님의 법문 한 토막이 울렸다.염관 스님이 하루는 시자를 불러 물었다.“무소뿔 부채를 가져 오너라.”“부채가 다 부서져 버렸습니다.”“부채가 부서졌다면 나에게 무소를 되돌려다오.”시자는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벽암록에 나오는 ‘염관의 무소뿔 부채’ 한 대목이다. 일상에서도 제자를 점검해 주려 하는 스승
무상·선농일치 덕숭가풍경허·만공·원담 이어 계승일체중생 구제복덕 없으니방장직에 있어도 행자일 뿐 덕숭총림 수덕사 대웅전을 지나 정혜사 향적당(香積堂)으로 오르는 겨울 산길은 녹록치 않았지만, 푸른 소나무와 하얀 눈이 어우러진 설산이 주는 웅장함과 수려함에 힘겨움은 이내 환희로 바뀌었다. 산 중턱에 이르니 저쪽 편에 작은 암자가 보인다. 만공 선사가 수행정진했던 소림초당(小林草堂)이다. 그 곳으로 이어지는 갱진교(更進橋)도 눈에 들어온다. '다시 나아가는 다리!' 소림초당을 오가는 길목에서도 만공 스님은 ‘정진의 정진’을 다짐했으
서른 못 넘긴단 스님 말에11세 통도사로 동진출가자운 스님 40년 동안 시봉 선지식 두루 만났으니 ‘복’재가불자들과 함께 지체부자유 보호시설을 방문한 혜총 스님은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손발을 자유롭게 쓰지 못하고, 말 한마디 제대로 발음할 수 없는 아이들을 보고 있는 순간 가슴 저 밑에서 밀려오는 측은함을 주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손을 잡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자신의 이러한 행동이 어린 아이들에게 말없는 위로와 용기를 건넨 것이라 생각했다. 적어도 공양시간 전까지는 말이다.혜총 스님도 아이들과 함께 자리에 앉아 수저를
죽음 문제 풀려 철학 선택 청화 스님 만나 출가 결심보시-감사-사과-관용 4가지 덕 실천하면 완벽 대학진로를 고민하고 있던 청년은 고등학교 은사를 만났다. “무슨 학과를 지망할까요?” 철학을 전공한 은사의 답변은 간단명료했다. “거지될 각오가 서 있으면 철학이 좋지!” 어려서부터 죽음에 천착했던 그에게 죽음과 철학, 그리고 거지는 낭만(浪漫)적으로 전해져왔다. 철학과에 진학한 그는 자신의 의식변화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 두 친구를 만난다. 한 친구는 늘 『반야심경』을 독송하고 있었다. 얼마나 좋으면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읊조릴까?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