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확실하게 자신감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고 본다. 나 역시 우물쭈물하는 그런 분류의 사람이었다.선지식들 법문 귀동냥하며‘참 나를 보라’ 당부 각인퇴직 후부터 적극 화두참구아침마다 ‘금강경’도 독송70년대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활동을 하던 시절에는 정기적 점검을 받을 지도법사가 없었다. 시민선방이나 불교대학도 드물었다. 불교를 공부할 수 있는 시스템과 공간은 더 부족했다. 여기저기 절을 다니면서 큰스님들의 법문을 귀동냥으로 듣는 것이 점검의 전부였지만 그래도 좋았다. 무엇보다 구산 큰스님께 화
새해에도 변함없이 독거 어르신들을 위한 반찬 만들기가 이어졌다. 매월 첫째 주 금요일마다 재료 다듬기와 밑반찬 만들기가 진행되고 다음날인 토요일에는 도시락을 장만해서 봉사자들이 직접 어르신들의 가정으로 배달을 한다. 부산 대광명사의 봉사 신행단체인 사무량심회에서 매월 꾸준히 이어 온 주요 봉사활동이다. 금요일에는 주간 참선반 도반들도 봉사에 동참해준다. 수행과 봉사를 둘로 생각하지 않고 정성을 다해주는 도반들이기에 함께하는 시간이 더 소중하다.주말마다 사찰 가는 즐거움망설임 없이 대불련에 가입구산 스님에 ‘시심마’ 화두참나를 찾아가
불교공부는 점점 재미를 더해갔다. 수행의 즐거움도 조금씩 느끼면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런데 풀지 못하는 숙제 같은 수행이 있었다. 바로 3000배다. 언젠가는 꼭 한번 해봐야지 하고 생각했지만 좀처럼 인연이 닿지 않았다. 밀린 숙제를 걱정하듯 마음속으로 다짐하며 기회를 찾던 중 여래사불교대학 소식지 ‘좋은 인연’에서 참회정진기도 3000배를 한다는 공지를 보게 되었다. 금요일 저녁 7시부터 토요일 아침 7시까지라는 안내문을 보고 다른 일정과도 중복되지 않아 신청을 하였다. 통도사 서운암서 중단한3000배 재도전해 성공스스로 뿌듯
‘무소유(無所有).’ 고1 때 들은 말이었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학교였는데 한 방에 있던 3학년 선배가 어느 날 법정 스님의 ‘무소유’라는 말을 했던 것이었다. 지금 기억으로는 그것이 법정 스님의 수필집을 말한 것인지 대화 속에서 나온 말인지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그 이후로 ‘무소유’라는 말은 나의 머릿속에서 하나의 화두처럼 계속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것이 불교와의 첫 인연이 아니었던가 생각한다.운전면허 취소로 삶 반추하고 싶은 일로 불교 선택여래사불교대학에서 공부아침마다 108배하며 정진대학을 졸업하고
야간 참선반을 맡아 진행해 보라는 제안에 아는 것을 많은 도반들과 나누는 기회가 되리라는 확신과 희망을 가졌다. 하지만 참석 인원이 적어 늘 마음이 쓰였고 안타깝기까지 했다. 오늘은 몇 명이나 올까 하는 마음 졸임과 찜찜함이 가시지 않았다. 그래도 4년이라는 세월이 지나면서 이런 마음에 휘둘리지 않고, 내려놓는 나를 바라볼 수 있으니 이 또한 내 공부였다.선어록 반복해 읽다 보니제법 읽는 재미도 생겨나삼라만상 실체 아니란 말 못 박듯 새겨가면서 공부언제쯤 구하는 마음 없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까? 부지런히 공부하고 닦아 나가는 방
사실 이 도량이 아니었다. ‘선림고경총서’와 만남에본격적인 불교공부 몰입화두참구에 목마름 느껴정진력 얻은 참선반 결성부산 대광명사에 오기 전 다른 사찰에 다녔다. 8년 정도였던가. 그 사찰에서 불교기초교리와 경전 공부를 꽤 오랫동안 해왔던 기억이 있다. 집안 자체가 부처님 가르침을 믿고 따라왔기에 신앙은 불교에 가까웠다. 하지만 평소 내 모습은 불자라고 하기에는 좀 거리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경책이라고나 할까. 부처님은 불서로 이끌었고, ‘장경각’에서 발행된 ‘선림고경총서’를 마주했다. ‘선림고경총서’를 무심코 꺼내 읽으면서 부
평소보다 더 부지런해지는 날이 있다. 수행에 의기양양하던 중남편 병마 소식으로 상심간절히 다라니기도·사경불교로 오는 남편에 감사다라니기도를 하는 날이다. 곧잘 미뤄두곤 하던 설거지도 즉각 해결한다. 다라니기도가 있는 날이면 오히려 시간을 더 아껴 쓰게 됐다. 미루던 일들을 한꺼번에 처리하면 쌓이던 피로도 물리칠 수 있었다. 기도를 시작한 지 어느덧 1년을 넘겼다. 그러면서 언제부터인가 매월 다라니기도 날짜를 손꼽아 기다리게 됐다. 차츰 수행이 무르익어간다는 느낌도 있었다. 수행하는 스스로를 대견해하면서 의기양양 하루하루 보내고 있었
추석을 보냈다. 그리고 오랜만에 10월 다라니기도에 참석했다. 5년전 부산 여래사와 인연불교대학·산사순례로 발전명상 때 흘러내렸던 눈물일일수행 등 불연 깊어져축원문을 찾아도 없기에 그냥 기도를 했다. 박동범 부산불교교육원장이 병중에 있는 남편을 염려했다. 그동안 참석하지 못한 나와 남편을 위한 축원을 해주고 있었다. 지금도 귓가에 그 축원이 맴돈다. 참 감사하다. 인연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계기로 삼고, 선한 인연이 법보시가 될 수 있다는 믿음으로 글을 쓴다. 부산 여래사와 인연은 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수덕행 법
2017년, 올해는 변화가 찾아왔다. 지난 5년 동안 쉼 없이 이어 온 일과 수행이 달라졌다. 마침 윤달이 있는 해다. 생전예수재를 지내게 됐다. 생전예수재는 살아 있는 사람의 사후를 위해 공덕을 미리 쌓는 의식이다. 49재나 수륙재가 죽은 이의 명복을 빌고 고혼이 극락왕생할 수 있도록 하는 반면 예수재는 살아 있는 동안 공덕을 미리 닦는 일이다. 그래서 고통의 세계에 떨어지지 않도록 노력하는 일인 셈이다. 이 시기에 자비도량참법 기도에 집중했다. 곧바로 백중을 맞이했는데 우란분절이라고도 불린다. 많은 불자들이 알다시피 백중 기간은
불교는 어릴 때부터 결혼 후에도 자연스러움이었다. 유년 시절부터 어머니의 손을 잡고 절에 다녔다. 가정을 꾸린 뒤에도 집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절을 찾아가는 일이 내겐 결코 어색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절에 자주 간다고 생활에 큰 변화가 있진 않았다. 불교를 잘 아는 것도 아니고 부처님 가르침을 새기고 수행을 실천한다고 단언할 수도 없었다. 누구보다 내 경우가 그랬다. 부산 해운대 신시가지에 생활터전을 잡고 가까운 절을 찾아 신행생활을 했다. 초하루면 절에 가서 법회에 동참하고, 부처님오신날이면 매년 연등도 밝혔다. 꾸준히 법회에
동산불교대학 학장 및 동산반야회 법주스님으로 무진장 대종사님 뒤를 이어 동국대불교대학장을 역임한 경일법산 스님이 우리를 지도한다. 매년 염불정진대회에 정토법문으로 우리를 일깨워주고 있다. 동산불교대학 동산반야회 이사장은 3년의 임기로 이종현 이사장이 염불에 동참 중이며 나 역시 동산불교대학 동산반야회 이사로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그러면서 염불행자로서 수행과 정진에 한 번도 소홀한 적 없다고 자부한다.온 산이 떠나갈 정도로 나무아미타불 명호를 부른다. 가슴이 후련하고 벅찬 감흥이 일어난다. 부처님이 응답하시고 정토세계가 눈앞에 펼쳐
죽음은 삶을 드러내기도 하는 모양이다. 할머니·아버지와 사별 뒤죽음·인생 등 가치관 고민집안 대대로 이어온 불연동산·염불만일회로 싹 터고모와 아버지를 키우며 모진 생활 다 겪으신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가슴 한 구석이 허전했고 인생의 고뇌가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나는 누구인가? 왜 사는가?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더 많이 가지고, 더 잘 먹고, 더 지위가 올라가고, 보란 듯이 남보다 더 잘사는 것이 삶의 목적인줄 알았다. 오욕락을 즐기는 것이 성공한 삶이고 인생의 목적이라는 단견으로 종교에 별 관심이 없었으나, 부친과 조모의 별세로
일기는 아이들과 함께 적었다. 나머지 기도는 다음날 아이들이 학교에 간 뒤에 했다. 촛불을 밝히고 감사수행 노트에 나와 있는 대로 부처님 전에 예경을 올리고 발원문도 했다. 시간은 15분도 채 걸리지 않았지만 그렇게 혼자만의 시간 동안 감사수행을 완성하는 기도를 했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지 않는 주말에는 두 아이가 모두 잠자리에 들고 나면 늦은 밤에 수행을 완성했다. 그리고 기도를 마친 뒤 비로소 아이들이 쓴 일기를 보고 사진을 찍어서 홍법사 밴드에 올리고 한 번 더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렇게 수행을 이어온 지 40일이 넘어선
기독교, 그러니까 예수교장로회 신자였다. 선교사 꿈꾸던 기독교 신자두 아이와 함께 계 받은 뒤불자로서 공부·신행 시작입시기도 계기로 기복 탈피불교에 처음 들어선 것이 9년 전이었나 보다. 지금 고등학교 3학년 큰 아이가 10살 때였으니까 말이다. 대략 6살 즈음부터 할머니 손에 이끌려 교회를 다녔다. 꿈이 결혼을 하지 않고 선교사가 되어서 봉사하는 것이었다. 주일학교 교사를 하기도 했다. 그러던 내가 어찌하다보니 지금은 두 아들의 엄마인 재가불자가 되었다.아주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녀서 그런지 사실 여전히 기독교가 더 익숙하다. 5
2013년부터 ‘금강경’ 사경을 할 때였다. 도반들과 그들의 가까운 이들 중에서 누군가가 아프다고 하면 도반들이 함께 기도를 드리며 쾌유를 기원하면 기적처럼 반가운 소식을 듣곤 했다. 7시간이면 된다던 수술이 8, 9시간을 넘기면서 불안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던 2015년 남편의 뇌수술 때에도 도반들 기도 덕분에 평안을 되찾고 다시 원력을 다잡았다. 그렇게 무사히 수술을 마친 기억이 있었다. 도반 응원으로 흔들림 없이‘금강경’ 독송해 안정 찾아1일 5독씩 3000독 넘기면서고통 극복 가능하다 자신감이번에도 나는 도반들을 찾았다. 얼마
“카톡.”, “카톡.”‘금강경’ 사경 108권 회향1만번 독송 발원으로 정진남편 특이한 암 진단 받자문득 ‘금강경’ 독송 떠올라우리 가족 채팅방 울리는 소리에 전화기를 열어 본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채팅방에 올라온 내용은 ‘관세음보살’ 문자 정근이다.타지에서 대학에 다니는 아들도, 직장에서 아직 집에 오지 못한 딸도, 아빠가 보내는 관세음보살 정근에 이어지는 응답 메시지 또한 관세음보살 문자정근이다. 이렇게 가족 모두 각자 문자 정근 10독을 릴레이로 이어서 하면 정근이 마무리된다. 정근은 곧
그런데 이를 전하는 분들이 중국출신 법사님들이어서 언어 소통이 어려웠다. 우리말이 서툴러서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는 잘 표현할 수 없는 내용이 있으면 나를 쳐다보고 중국어로 말하면서 한국어로 어떻게 표현해야 되느냐고 묻곤 했다. 그렇지만 무척 검소한 생활을 했다. 추운 겨울 슬리퍼를 빨아 신고서 우린 교육을 마친 늦은 시간에도 병원에 입원한 사람들에게 갔다. 가피를 해야 한다고 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그분들이 정말 남을 돕는 것을 행복으로 느끼는 분들 같았다. 중국 법사 통역 인연으로수행기 ‘가사’ 한국어 번역감동 받았다는 독자 말에조
2006년이었다. 이 해는 30여년 간의 교직생활에서 정년한 해이기도 하다. 그러나 매일 아침 학교로 출근하여야 하는 일상이 학교 밖에 새로 마련한 연구실로 나가는 것으로 바뀌었을 뿐 별로 달라진 것도 없는 생활의 연속이었지만 일단 정년이라는 한 고개를 넘은 시점에서 스스로 돌아보게 되는 것도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교직 정년한 해 참선 접해아내와 보리선수에 입문오체투지·팔괘 수행 병행일상체험 가능성도 엿봐돌이켜 보면 지난 20여년 간 김천에 있는 직지사 조실 관응 스님을 뵐 겸 한 달에 한 번 관음재일이면 그 어른이 계신 중암을 찾
수행법회에 동참하기 위해 절에 자주 나가다 보니 대광명사의 봉사단체인 ‘사무량심’에 눈길이 갔다. 수행과 봉사를 겸할 수 있는 기회를 지나치고 싶지 않았다. 봉사는 젊은 시절부터 늘 마음으로 발원해 온 일이기도 했다. 아무런 조건 없이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는 사실은 정말 감사한 일임이 분명하다. 불교를 모르는 상황이거나 수행을 잘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봉사만큼은 가장 먼저 권할 수 있고 누구나 계속할 수 있는 최고의 포교 방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봉사단체 ‘사무량심’ 활동가피에 회의 들어 상심도초심 새겨 광명진언 염송재가불자 하안
몇 해 전, 시어머니께서 돌아가신 뒤 49재를 마쳤을 즈음이었다. 시어머니에 대한 추모의 마음을 갖기 위해 부산 해운대에 있는 폭포사라는 절에 갔는데 당시 나는 불교에 대한 교리 공부가 전무한 상황이었다. 그런 나를 스님께서는 한 눈에 알아보시고는 포교당에 가서 불교교리 공부를 해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하셨다. 마침 폭포사와도 멀지 않은 곳에 대광명사가 있었다. 시어머니 49재 치르면서도불교에 문외한이었던 시절불교대학 인연에 기도정진매일 1000독씩 광명진언 대광명사에는 대광명불교대학이 있었다. 이곳에 등록해 교리공부를 시작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