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방송에 오기 전에 대각사 법당에 앉아계신 부처님께 “오늘 불자님들에게 어떻게 법을 설하면 좋겠습니까?”하고 여쭈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웃으면서 하시는 말씀이 “나처럼 법을 설하라”라고 조언해 주시더군요. 원고 없이 법을 설하라는 주문이셨습니다. 부처님 재세 시 부처님의 법석은 항상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습니다. 나무 아래 부처님께서 앉아서 수행하신 그곳이 바로 법석이었으며 수행자들이나 불자들은 부처님께서 계신 바로 그곳에서 법을 청하고 수행에 관한 지혜에 대해 여쭈었습니다. 어디서든 부처님의 법석이 펼쳐졌던 것입니다.오늘 인연 공덕으
울산에 살면서 통도사 울산포교당 해남사를 다닌 지는 어느덧 20여년의 인연이 되었다. 누구나 그렇듯 나에게도 처음 절은 생소한 곳이었다. 그러나 사람이 살다 보면 계기를 만나게 되는 것처럼 나 역시 이런저런 상황에 부딪히면서 그 일이 계기가 되어 기도하게 되면서 절은 점차 친숙한 곳으로 바뀌어 갔다. 부처님께 귀의하는 삶을 살겠다고 발원한 것도 우연한 계기에서 시작됐다. 물론 단순히 부처님을 무조건 믿는다고 해서 마음먹은 대로 뜻하는 대로 모든 것을 이룰 수는 없다. 그래도 부처님을 믿고 의지하며 기도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인생의
새해가 밝았습니다. 이제 입춘(立春)도 얼마 남지 않았으며 한여름인 하지(夏至)까지 낮은 계속 길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굳이 뉴스나 주변에서 소식을 전하지 않아도 낮과 밤의 길이와 체감온도만으로도 계절의 변화와 해가 달라짐을 알 수 있습니다. 늘 그랬듯이 계절은 변하고 시간은 흘러갑니다. 내 밖의 세상이 변화무쌍하게 모습을 바꾸듯이 나의 내면세계와 삶의 모습도 점차 변화해 나갈 것입니다. 이러한 안팎의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떤 생각을 하며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야 할지 생각하게 됩니다.한 해를 마무리하고 시작하는 시점에서 삶의 전
신라에서는 23대 법흥왕 14년(527) 이차돈의 순교라는 희생을 치른 이후에 비로소 불교가 공인될 수 있었다. 이 해는 고구려에 대항하여 동맹관계를 맺고 있던 백제가 국가부흥을 이루면서 웅천주에 양나라의 무제(武帝)를 위해 사찰을 세우고 대통사(大通寺)로 이름한 때였다. ‘대통’이라는 사찰 이름은 양의 무제가 동태사(同泰寺)에 사신(捨身)하였다가 환궁하여 새로운 연호로 선포한 것이었다. 이로써 신라에서의 불교 공인은 법흥왕 8년(521) 양의 승려 원표(元表)의 사신 파견, 그리고 백제와 양에서 일어난 불교 흥륭의 사건들과도 무관
사실 자주했다. 그동안 108배는 몸에 익숙한 수행이기도 했다. 하지만 1000배를 하루 만에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1000배를 올리는 동안 온 몸에서 땀이 비가 오듯이 흘러내렸고 다리는 후들거려 제대로 서있기도 힘들었다. 그러나 부처님의 보살핌과 가족들의 화합 덕분에 무사히 끝낼 수 있었다. 뭐랄까. 1000배를 마친 내 마음은 형용할 수 없는 뿌듯함으로 가득 차올랐다.그래서다. 한 번 더 도전했다. 지난해 연말 두 번째 1000배 정진법회에 동참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역시 그 과정은 힘들고 어려웠지만, 성심성의껏 임하며 10
누군가에게 목요일은 한 주의 마감으로 바쁜 날일 수 있다.적어도 내게 목요일은, 행복한 요일이다. 바쁜 직장생활에도 목요일만큼은 불교대학으로 공부하러 가는 날이기 때문이다. 기초반이 끝나고 경전반에 등록할 때만 해도 남편은 직장일도 바쁘고 힘든데 공부까지 한다고 싫어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지금은 목요일 오전이 되면 지각하겠다며 먼저 전화해주고, 힘들어서 빠지고 싶다고 넋두리를 할 때면 오히려 독려해주는 남편이 요즘은 너무 고마울 뿐이다.내가 불교대학에 다닌 후부터 우리 부부의 신심은 더욱 깊어졌다.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주말마다
눈물이 난다. 이 말이 어떻게 들리느냐는 사람마다, 상황마다 다르다. 터져 나는 슬픔일 수도 있고, 가슴 벅차 말을 잊을 정도의 기쁨일 수도 있다.젊은 시절 인류의 대량 학살사를 접하고 모든 의식이 일순간 마비가 왔다.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고, 할 수도 없었다. 오랜 진통 끝에 조금은 생뚱할지 모르겠지만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이성을 거부하고 감성적 낭만주의를 접하면서 그 답을 찾았다. 오랫동안 감정적으로 살지 말고 이성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가르쳐 주었고, 배워왔다. 하지만 차디찬 이성은 경직된 사회 질서를 더욱 공고히 할 수는
신라의 불교공인은 3국 중 가장 늦은 23대 법흥왕 14년(527)에 이루어졌다. 고구려는 소수림왕 2년(372), 백제가 침류왕 원년(384)에 불교를 공인한 사실과 비교하면 150여년이나 늦은 것이었다. 그러나 신라에 불교가 전래된 시점은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그렇게 늦은 것은 아니었다. 신라 하대에 김용행(金用行)이 찬술한 ‘아도화상비(我道和尙碑)’에 의하면, 고구려 승려 아도(我道)가 13대 미추이사금 2년(263) 신라에 와서 불교를 전하려다 죽음을 피하여 일선군의 모례의 집에 숨었다는 설화를 전하고 있는데, 역사적 사실로
서운한 감정 알아차리기를 수차례. 그 서운한 감정은 그 친구의 잘못이 아니라 내가 만든 집착의 결과임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수행을 반복하던 어느 날, 친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통화를 하며 나의 감정을 지켜보았다. 그 친구에게 가졌던 서운한 감정은 눈 녹듯 사라지고 없었다.이렇게 명상수행을 거듭하면 할수록 의사소통은 물론, 가족과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회복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항상 나로 인한 조건의 대상에서 떨어져서 보게 되니, 어떤 경계에 걸림이 있는지를 온전히 만나게 되므로 훨씬 자신의 마음
무술년 한 해를 시작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결에 한 장의 달력을 남겨놓고 있다. 2018년을 돌아보니 참 많은 일을 했다. 이 많은 일들의 대부분은 어르신들과 함께한 시간들이 차지한다. 우리 센터에서의 일상은 어르신들이 채워 나가는데 요즘은 센터가 텅 비어 있다. 항상 활기가 넘치고 이런저런 일들로 눈코 뜰 새 없던 날들이 지금은 너무 고요하다. 왜냐하면 우리 센터의 건물이 나보다 나이가 많기 때문이다. 내진 설계가 되어 있지 않은 건물이라 내진보강공사로 인해 잠시 휴관한 상태다. 매일 3000여명이 넘는 어르신들로 북적거리던
불교 인연은 참 오래되었다. 25년 전으로 기억된다. 첫 딸이 아직 어릴 때, 몸이 약한 아기가 안쓰러워 이런저런 용하다는 방법을 찾아 헤맸다. 굿을 하기도 했지만, 이 방법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도도량을 찾아 열심히 기도해 보라는 주변 권유에 찾아간 포교당에서 아기를 업고 그저 기도하며 매달렸다. 어느새 딸은 건강을 되찾았고, 이것이 부처님의 가피라 여기며 절에 더 열심히 다녔던 것 같다.하지만 채워지지 않는 답답함이 있었다. 그저 소원을 빌기만 하는 신행 생활이 과연 올바른 불자의 삶인지 의문이 생겼다. 불교대학에 문을
2500여년 전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쿠시나가르에서 입멸하신 후 제자들은 왕사성 인근 칠엽굴에 모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집대성합니다. 이를 불교사에서는 1차 결집이라고 합니다. 결집을 주도한 인물은 부처님의 십대제자 가운데 두타제일로 불렸던 마하가섭존자였습니다.십대제자 가운데 사리불, 목건련, 마하가섭존자와 가섭 삼형제(우리빈라가섭, 나제가섭, 가야가섭) 등은 모두 왕사성과 그 인근지역 출신이었습니다. 그에 비해 아난존자와 가전연, 아나율, 라훌라 존자 등은 부처님과 같은 석가족 출신이었습니다. 즉 교단은 마하가섭을 중심으로 하는 왕사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