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자들과 대화하다 보면 당혹스러울 때가 많다. 언젠가부터 절 집안에서는 스님들에게 언제 출가했는지, 왜 출가했는지를 묻지 않는다는 것이 불문율같이 되어있다. 특히 왜 출가했는지를 누군가 물으면 오래 절에 다닌 불자들이 얼른 신입 신도를 제지하기까지 한다. 물론 출가의 인연은 스님들의 지극히 사적인 영역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같이 부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불자들에게 출가를 비밀의 영역으로 남겨두는 이유가 무엇일까?도반이라는 말의 어감이 참 좋다. ‘도를 향해 함께 가는 반려자’라는 뜻이다. 부부를 ‘인생의 반려자’라고 하는 말도 세
발심하자마자 바로 출가한 행자는 불교 공부 하는 수요일이 제일 즐겁다고 합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숨 돌릴 틈 없이 바쁜 일과 속에서 수요일만 기다린다고 하니, 대견하고 기특합니다.연기법과 ‘모든 것이 변한다’는 주제의 강의를 듣고, 사는 것이 참으로 허무한 것이 아닌가 하며 묻습니다. “어제 강의 들은 신도님들은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사는 삶이 억울할 것 같습니다. 결혼이나 자녀, 사랑의 약속들 모두 변하고 덧없는 것이니 허무할 것 같습니다.”저는 웃으면서 “그래서 다음 시간 강의를 꼭 들어야 합니다”라고 답했습니다.한 시간 동안
코로나19가 좀 잠잠해진다 싶더니 조금씩 해이해진 틈을 타 또다시 우리를 긴장하게 만듭니다. 그간 환자 발생이 없다고 하니 괜찮아졌으려니 생각하고 사회적 거리두기와 마스크 착용이 느슨해져 이런 사태가 또 발생하게 된 것 같습니다. 평소 ‘나 하나쯤 안 한다고 뭐 어찌 되겠어’라는 생각이 많은 사람을 힘들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이번 이태원 사건으로 다시 경각심을 가지게 하고 있습니다.혼잡한 출퇴근길엔 이제 마스크 착용을 하지 않으면 탑승하지 못하게 하는 강력한 조치를 한다고 합니다. 성숙한 시민 의식이 발휘되어야 할 것입니다. 평소
초하루 불공이나 사시불공 등 기도를 집전하다 보면 가장 신경이 많이 쓰이는 것이 축원할 때다. 기도 올린 모든 분들을 다 축원해 드리려면 긴 시간이 걸린다. 그러면 법회가 끝나지 않았는데도 가버리는 분들이 많이 생긴다. 독송이나 정근은 같이 따라 하지만 축원할 때에는 각자 알아서 그 시간을 견뎌야 하기 때문이다. 축원은 기도 시간을 지루하게 만드는 요인 중 하나이지만 그렇다고 줄이기도 쉽지 않다.이런 현상에서 벗어나려면 불자들이 축원의 의미와 기도의 마음가짐을 넓고 크게 가지도록 이해시켜야 한다. 기도할 때 축원이란 누군가의 인생이
코로나19에 세상이 지배당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듯하다.죽음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고 했던가.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야 지위고하와 빈부격차가 있을지 몰라도 일개 바이러스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하게 생존을 갈망하는 나약한 생명체일 뿐이다. 선진대국이라며 한 세기가 넘도록 어깨 힘을 주고 뽐냈던 서구 문명도 이토록 초라한 모습으로 추락하였다.일상적인 방역과 치료, 경제적 타격 등이 모든 이야기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가시적인 변화와 액션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우리들이 인식하지 못했던 무수한 일들이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를 엄습
세상의 불평등함은 존재의 시작과 함께 해 왔습니다. 모든 생명들이 다르게 태어났기에, 불평등이 평등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생명의 근원인 자연은 만물에 평등합니다. 수많은 생명들이 각자 근기에 맞게 가져갈 뿐입니다.그러나 사람들의 평등과 불평등의 기준은 모호합니다. 의식주를 비롯해 부(富)와 명예, 권력 등 모든 것이 각자의 욕망에 따라 ‘평등’과 ‘불평등’의 이름이 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평등과 불평등을 판단하는 것은 매우 복잡합니다. 불평등에는 기득권자와 비기득권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역사적인 최초의 평등이 이루어
요즘 날씨가 너무 좋습니다. 여기저기 어여쁜 꽃들이 나들이 나오라고 유혹을 합니다. 여느 때 같으면 지금쯤 어르신들 모시고 봄나들이로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을 테지만 지금은 코로나19로 복지관이 조용하기만 합니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어르신들이 오십니다. 어제는 모처럼 어르신들을 만나 뵈었습니다. 코로나19로 저소득어르신들께 대체식을 드리고 있는데 월요일인 어제가 대체식이 나가는 날이었습니다. 모처럼 어르신들을 만나니 그리 반갑더라고요. 건강하게 계신 것 같아서 고맙고 감사했습니다. “어찌 지내시냐”고 안부를 여쭈어 보니, “그냥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 같다. 사랑의 방법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자기 자신을 긍정적으로 사랑하면 자존감이요, 자기식대로 사랑하면 자존심이 되기 쉽다. 자존심은 자신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것이고, 자존감은 대상과의 관계에서 자신과 남이 모두 존귀함을 아는 일이다. 모두들 자식을 사랑하지만 그 방법에 차이가 있듯 자신의 내면도 마찬가지다.자존심(自尊心)과 자존감(自尊感)을 한자로 살펴보면 자신을 존귀하게 여기는 뜻은 같지만 자존심이란 말속에는 아만, 고집 등 부정적인 뜻이 많이 포함된 지 오래다. 자존심을 지키는 것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미국의 사회학자 데이비드 리스먼은 산업화 사회에서 타인 지향적인 유형의 사람들이 늘어나고 예전에 누릴 수 없었던 다양한 대중과 함께하면서도 끊임없이 내적 공허감을 갖는 고독한 인간의 심리에 관해 이야기했다. 참 낯설었지만, 가끔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허전함을 달래며 독백처럼 중얼거리던 일이 생각난다.정보화시대가 펼쳐졌다. 한 세대가 산업화시대를 거쳐 정보화시대까지 단숨에 달려와 버린 대한민국은 외적 성장이 주는 달콤한 풍요에 너무 취해 있는 듯도 하다. 외적인 성장과 번영에 비해 우리들의
코로나19로 인한 비상사태로 우리 절의 모든 기도와 법회, 행사를 멈춘 지 벌써 두 달째입니다. 경전 공부반과 어린이, 청소년 법회까지 모두 중단된 상태입니다. 금방 지나갈 듯했던 혼자만의 시간이 언제 끝날지 감이 잡히질 않습니다. 일상의 일들이 일상이 아니게 되자, 비로소 그 가치를 느낍니다. 봄꽃 소식이 들려오는데, 마음은 겨울 속에 멈추어 있습니다. 심리적인 고통이 심해지는 우리 절 가족들에게 조금이라도 힘이 될 일을 생각했습니다. 핸드폰으로 사시기도를 녹음해서 모든 신도님들께 톡으로 보내드렸습니다. 지난 관음재일에는 노트북으
새해의 시작과 더불어 발생한 코로나 사태가 계속 확산되어 가고 있습니다. 2월23일에는 코로나19가 ‘심각’ 단계로 격상됐습니다. 3월11일에 세계보건기구(WHO)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에 대해 팬데믹(pandemic, 세계적 대유행)을 선언하기에 이르렀습니다.중국 후베이성의 우한에서 시작된 코로나19는 국내의 경우 대구를 비롯해 청도대남병원을 거점으로 경북지역에 확산되었습니다. 이제 전국이 코로나 바이러스로 들썩이며 신음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확산의 기폭제가 된 것은 31번째 확진자였던 신천지 교인이었습니다. 신천지는 개신교
연일 코로나19가 사람들을 불안하게 하고 있다. 서울 시내의 모든 복지관이 잠정 휴관을 하고 있다. 우리 복지관도 예외는 아니어서 비록 어르신들은 안 나오시지만 직원들은 출근해 일을 하고 있다. 매일 소독을 하고 마스크 착용을 하고는 있으나 마스크 구입에 어려움을 겪는 것은 마찬가지다. 어르신들께 드리는 것도 넉넉하지가 않아 걱정이다. 더불어 사회활동지원사업에 참여하시는 어르신들도 걱정이 된다. 한 달에 30시간을 일하고 받는 보수가 있는데 코로나19로 일을 못하게 되니 받으실 보수도 없게 되었다. 누군가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을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