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8월 31일 주지후보 선출을 위한 산중총회를 앞두고 있는 조계종 제25교구본사 봉선사가 최근 각종 의혹이 제기되면서 몸살을 앓고 있다. 특히 말사주지 품신대가로 금품수수, 사패산 보상금 전횡, 각종 불사금 횡령 등의 의혹이 불거져 나오면서 교구본사로서의 위상마저 흔들리고 있다. 이런 가운데 각종 의혹의 당사자로 지목되고 있는 봉선사 주지 철안 스님이 8월 14일 종무소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갖고 이번 사안과 관련한 답답한 심경을 털어놨다. 철안 스님은 “이번 사안은 말사주지품신에 불만을 품은 일부 스님들이 봉선사를 흔들어보려는 정치적 음모로 볼 수밖에 없다”며 “현재까지 제기된 각종 의혹은 전혀 사실과 다르다”고 해명했다. 스님은 이어 “각종 음해성 의혹이 제기돼 현재 이와 관련된 반박 자료를 봉선
경전 강의 외에도경제학·세계사 등다양한 과목 신설 학인대회 개최 후조선불교학인연맹결성 및 활동 총독부의 불신임1933년 기점으로활동 현격히 침체 조선불교학인대회를 주도하였던 청담 스님. 일제시대 불교계 인재 양성은 근대 사회의 시대적인 분위기에 맞는 포교사를 양성하기 위해서 시급한 과제였다. 그런 까닭에 불교계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인재 양성을 위하여 적지 않은 예산을 투입하여 강원·보통학교·중앙학림·지방학림과 같은 교육기관을 운영하여 왔다. 교계의 개혁을 주장하는 진보세력은 서구의 학문을 수용하여 신식학교를 세우고, 새로운 교과과정을 편성하여 변화된 세상에 불법을 포교할 수 있는 포교사를 양성하는 데 주력하였다. 반면에 전통 수호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금강산 유점사 거쳐 중국행창일당 가입하며 본격 활동 봉선사에 머물던 김봉환, 김규하, 김정완, 윤종목, 차응준 등 다섯 명의 다른 스님들과 함께 길을 나선 성숙은 금강산으로 향했다. 해제철을 맞아 만행을 나선 것으로 위장했으니, 다른 절을 찾아가는 것처럼 해야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금강산에 무슨 연고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호형호제하며 지내던 운허가 금강산 유점사에서 공부했던 인연이 있어서 그쪽을 거쳐가기로 했던 것이다. 여름과 가을 사이를 오가는 날씨가 조금 덥기는 했어도 힘이 들 정도는 아니었다. 일행은 산길을 돌고 돌아 3일만에 유점사에 닿았다. 유점사에는 공부하는 스님들이 생각보다 많았고, 운허에게 듣기는 했어도 공부하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그리고 유점사에는 학승
가족에 하직…속가에서 하룻밤안거 끝난 시기 만행 위장 출발 성숙은 1923년 4월 8일 비구계를 받고 정식으로 스님이 되었으나, 이때부터는 경전공부보다 중국 유학 준비에 바빴다. 사실 말이 유학이지 독립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위한 돌파구였고, 일본 경찰의 감시에서 벗어나려는 망명이기도 했다. 운허와 성호를 차례로 만나 중국행을 알리고 난 성숙은 얼마 후 속가의 가족들이 살고 있는 경기도 고양시를 찾았다. 성숙의 가족들이 살고 있는 이 집도 일본 경찰의 감시 대상이었기 때문에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특히 그들을 따돌리고 유학길에 오르기 전에 마지막으로 찾은 터라 가족들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앞서기도 했다. 집안에 들어서자 마당에서 놀고 있던 딸 숙녀가 먼저 인사를 했다. 성숙은 딸을 가만히 안아 주었다
화상이 “중도 잃지 마라” 당부운허·성호에게 북경유학 알려 운암 김성숙은 1923년 경기도 양주군 소요산 자재암에서 비구계를 수지했다. 사진은 당시 받았던 계첩. 월초 화상은 성숙의 계획을 알고 있었다는 듯,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 둘 사이에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의 고요함이 이어졌다. 짧은 시간의 침묵을 깬 이는 월초 화상이었다. “그렇다면 네 가슴속에서 그토록 용솟음치고 있는 그 뜨거운 용암을 한 번 원 없이 분출해 보거라. 하지만 성숙아 네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승려라는 점은 잊지 마라. 언제 어디서나 중도의 도리에 어긋나지 않도록 하고, 항상 백성의 편에서 민족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화상의 눈가에는 비칠 듯 말 듯한 물기가 고였
강원에서 중도 도리 배우고유학 준비하면서 주변 정리 성호에게 출가를 권하고 봉선사로 돌아온 성숙은 공부에 매진했다. 해외로 나가 독립운동에 투신할 마음을 굳히면서 어떻게든 지금 하고 있는 불교공부를 마쳐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때부터 밤잠을 줄여가며 경전을 보기 시작했다. 보통 강원의 교육과정이 사집과는 2년, 사교과는 4년에 걸쳐 이수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성숙은 이미 사미과를 공부할 때도 남들보다 월등한 능력을 보이며 2년 과정을 6개월 여만에 마친 전력이 있었다. 그리고 남들보다 짧은 시간에 『서장』『도서』『선요』 등 사집과 과정을 이수하고 사교과 공부를 하고 있었기에 그 과정만은 마치고 싶었던 것이다. 한문에 통달했다고 할 정도의 능력을 갖고 있었던 성숙은 공부하는 속도나 경전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부처님 가르침 배우고 익혀전하는 것처럼 좋은 일 없다” 성숙이 야심한 밤에 운허를 만난 곳은 광릉천변 3·1만세운동을 주도했던 당시 ‘조선독립단 임시사무소’명의의 격문을 등사하기 위해 일행과 함께 등사기를 짊어지고 왔던 봉선사 뒷산 약수터였다. 운허와 단둘이 마주한 성숙은 “월초 화상께 독립운동을 하다가 출가인연을 맺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저 역시 독립운동의 꿈을 갖고 집을 나섰다가 이렇게 출가하여 절에 있으나, 아직 그 꿈을 접지 못했기에 잠시 뵙자고 했습니다”며 운허를 찾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성숙과 특별하게 가까이 지내던 사이가 아니었기에 잔뜩 긴장했던 운허는 그때서야 경계심을 풀고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나도 아직은 쫓기는 몸이라 이렇게 스님의 모습으로 살고 있으나, 언젠가 때가 되면 다시 독
표절시비 땐 ‘포교 목적’ 핑계대며 정당화전법-공덕 수준 넘은 명백한 위법 행위 표절의 대표적인 사례들 원본 표절본 운허 스님 역 화엄경 입법계품 9장그때 선재동자는 큰 지혜의 광명이 비치어 마음이 열리며 생각하고 관찰하여 법의 성품을 보고, 모든 음성을 아는 다라니문을 얻었으며,…(하략) M스님 역 화엄경 입법계품 9장그때 선재동자는 큰 지혜의 광명이 비치어 마음이 열리며 생각하고 관찰하여 법의 성품을 보고, 모든 음성을 다는 다라니문을 얻었으며,…(하략) 조계종출판사 불교입문 p. 361) 사찰의 의미사찰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불도佛道를 닦는 수행도량이자 불법佛法을 널리 펴서 중생을 제도하는… B불교대학 ‘불교의 첫걸음’ p. 371) 사찰의 의미사
짜깁기 한 교양대 교재찬불가집 복사 제본 사용대장경 발췌 경전 편집도29일 시행 후 처벌 강화 2006년 학계와 출판계를 뒤흔들었던 표절 논란이 불교계에도 본격화할 조짐이다. 지난 4월 교계의 한 신문은 2006년 1월부터 12월까지 연재한 S스님의 ‘육조단경 강의’가 광덕 스님의 저술을 무단 인용했음을 인정하는 사과문을 게재해 불교계 표절논란에 불씨를 지폈다. 집필자인 S스님은 “연재 첫 회에 광덕 스님의 『역주 육조단경』(불광출판부 간)을 저본으로 한다고 밝혔으므로 저작권법에 하등 문제가 없다”며 B신문과 다른 입장을 밝혔지만, 집필자·출판사·신문사 간에 아직까지 이 문제가 말끔히 정리되지 않은 상태다. 찬불가집을 출간해 판매하고 있는 삼보불교음악협회도 최근 자사의 찬불가집을 부분 발췌한
운허의 출가-봉선사 인연성숙의 지난 행적과 흡사 1921년 가을부터 이듬해인 1922년 4월까지 국내에서는 서울청년회, 조선청년회연합회 등의 단체를 중심으로 사회주의사상이 빠르게 전파되고 있었으나, 그 안에서 얽혀 있던 사회주의자, 민족주의자, 공산주의자들은 서로 다른 이념의 간극을 좁히지 못한 채 다툼을 벌이는 등 아직은 혼란한 면이 많았던 시기였다. 성숙은 봉선사 강원에서 사집 과정을 마치고 이제 막 사교 과정에 들어가 공부를 시작했으면서도, 밖으로의 활동 폭을 넓히기 위해 1922년 1월에 결성된 무산자동맹회에 가담하면서 사회주의 운동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다. 성숙은 이 시절 또 다른 한사람과의 운명적인 만남을 갖는다. 그는 다름 아닌 훗날 대강백이 되어 봉선사는 물론 한국불교발전에 지대한 공헌
광동학원이 지난 60년 간 참사람 교육 발자취를 담았다. 학교법인 광동학원(이사장 일면)은 6월 12일 남양주 광동중·고등학교 운악관에서 『광동 60년사』발간 기념법회를 봉행했다. 광동학원의 ‘60년사’ 발간은 한자경전을 한글화한 운허 스님의 후학에 대한 원력부터 해방 후 교계 사립학교의 역사를 살펴보는 계기와 인재양성에 힘써온 노력을 한 눈에 볼 수 있다는 데 의미가 있다. 광동학원 이사장 일면 스님은 “대한민국 수립보다 2년 앞서 출발한 학원은 한국전쟁으로 학교가 전소되는 등 많은 어려움을 극복해오며 그동안 3만 2천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며 “중생을 자비로 구제하고 교육문화를 발전시키려던 운허 큰스님의 원력이 광동의 역사 60년을 기록에 담아 감회가 새롭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제주불자연합은 6월 7일 제주도민의 방에서 조계종 총무부장 현문 스님의 기자회견을 반박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총무부장 현문 스님 기자회견의 허구성을 밝힌다’라는 내용으로 제주불자연합 관계자 5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열린 이날 기자회견에서 “총무부장 현문스님은 인사담당 주무부장으로서 금번 관음사 사태 발생의 장본인 중 한분”이라며 “관음사 교권침탈의 장본인인 총무부장 스님이 제주불자들과 도민들 앞에 나타나서 관음사 종무 정상화를 운운하는 그 무책임과 무지, 허구, 치졸함에 실소를 금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제주불자연합은 또 “우리 제주불교 교권수호와 청정승가 외호를 위한 제주불자연합은 조상대대로 지켜온 관음사(제23교구본사)를 제주도민과 30만 불자들이 온몸을 다하여 지켜나갈 것”이라며 “관음사 성
중앙승가대학교 총장 종범 스님이 5월 9일 오전 11시 서울 안암동 보타사 대웅전에서 전강식을 갖고 선지(대구 통천사 주지), 법인(실상사 화엄학림 강사), 승원(중앙승가대학교 비구수행관 관장) 스님 등 세 명의 제자에게 전강했다. 설유 처명, 한영 정호, 운허 용하, 운조 홍법 스님으로부터 강맥을 이어받은 종범 스님은 이날 전강제자들에게 강맥을 전함으로써 새로운 세대의 강맥이 다시 이어지게 됐다. 이날 전강식에서 종범 스님은 전강의 증표로 제자들에게 게송을 적어 주어 눈길을 끌었다. 『화엄경』 등 경전에서 가려 뽑은 각각의 게송을 적어 제자들에게 전한 스님은 “강사로써 살아가는 동안 항상 마음에 세기는 글귀가 되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종범 스님은 전강 법어에서 “육조 혜능 스님이 오조 홍인
중앙승가대학교 총장 종범 스님의 전강식이 5월 9일 오전 11시 서울 안암동 보타사 대웅전에서 열린다. 종범 스님은 이날 선지(대구 통천사 주지), 법인(실상사 화엄학림 강사), 승원(중앙승가대학교 비구수행관 관장) 스님 등 세 명의 제자에 대한 전강식을 갖고 설유 처명, 한영 정호, 운허 용하, 운조 홍법 스님으로부터 이어받은 강맥을 전한다. 종범 스님은 한국을 대표하는 대강백으로 2000년 11월에 중앙승가대학교 제3대 총장에 취임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남수연 기자
“스님의 정신과 행동 그리고 그 사상이 세상 사람들의 생활화로 이어지고 있으니, 지금의 평화는 더욱 오래 갈 것입니다. 그러하니 이제 뒷일에 대한 걱정을 놓으시고 부디 왕생극락하소서.” 항일독립운동에 투신해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하며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냈던 태허 스님(운암 김성숙)의 제38주기 추모제가 4월 12일 오전 11시 국립현충원 현충관에서 봉행됐다. 태허 스님의 극단을 거부한 중도사상과 민족주의 정신을 선양하기 위해 지난해 3월 발족한 운암 김성숙(태허 스님) 기념사업회 주최로 열린 추모제에는 태허 스님의 출가 본찰인 봉선사 조실 월운 스님을 비롯해 국가보훈처 남부보훈지청장, 광복회, 각급 애국선열단체 등에서 150여 명이 참석해 태허 스님의 사상과 숭고한 민족주의 정신을 기렸다.
출가재일과 열반재일을 맞아 부산 지역의 2000여 사부대중이 3000배 참회 정진기도를 봉행한다. 부산 감로사(주지 혜총)는 3월 28일부터 4월 1일까지 삼천불 삼천배 참회기도회관 임시법당에서 제56회 삼천불 삼천배 참회기도를 봉행한다. 올해로 56회를 맞이하는 감로사의 삼천불 삼천배 참회기도에는 참여 대중 모두가 삼천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며 매일 600배 씩 4박 5일간 3000배를 올린다. 또 기도 기간 중에는 철저하게 오후 불식을 실천하며 하루 두 차례 초청 법문도 실시한다. 올해의 감로사 3000배 참회기도 유나는 영산율원장 철우 스님이 맡았으며 조계종 총무원장이자, 감로사 조실인 지관 스님을 비롯해 동국대 명예교수 인환, 영주암 회주 정관, 범어사 주지 대성, 통도사 주지직무대행 산옹, 감로사
월초화상 지시로 가족 이주철산 떠나 경기 고양에 정착부인에 “미안하오” 한 마디월초화상을 만나고 용문사로 돌아온 성숙은 풍곡 스님을 찾았다. “스님, 본사로 가서 공부를 계속 하겠습니다.” 성숙이 하려는 말을 이미 알고 있었던 풍곡 스님은 그저 반가울 뿐이었다. 제자를 떠나보내면서도 오히려 “봉선사로 가거든 큰스님을 네 스승으로 삼아 공부를 하거라. 큰스님이 네게 큰 가르침을 주고 앞길을 열어 주실 것이다”하고는 봉선사로의 발길을 재촉하도록 독려했다. 성숙은 다음날로 짐을 챙겨 봉선사로 향했다. 지금은 조계종에서 스님이 되려면 반드시 강원교육을 받아야 하지만, 당시의 강원은 아무나 가고 싶다고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모든 것이 수익자 부담이었기 때문에 강원에서 공부하는 학인들도 배우는 만큼의 돈을 내
무지한 백성 일깨우는 것도일제를 상대하는 독립운동봉선사 강원에서 공부 지시 성숙은 본사인 봉선사로 가지 않고 용문사에서 더 공부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풍곡 스님이 왜 자신을 봉선사로 보내려고 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스스로도 언젠가는 독립운동에 뛰어들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 시점을 용문사에서 공부를 마치고 봉선사로 가야만 하는 시기로 계획하고 있었다. 풍곡 스님은 봉선사로 가기를 꺼려하는 성숙을 보며 한참을 말없이 있다가는 “네 생각이 그렇다면 그렇게 하거라”하고는 헛기침을 했다. 그 후로도 용문사에서 사미승이 배워야 할 외전을 공부하던 성숙은 이듬해인 1918년 여름 봉선사 월초 화상의 부름을 받았다. “이제 올 것이 왔구나”하는 생각으로 바랑을 짊어지고 봉선사를 찾은 성숙은 월초 화상과
와! 저기도 거북이 아이가!? 어디? 그렀네! 안채로 드는 이곳 쪽문에도 금어선원 문과 같은 거북빗장이 있었다더니, 거기도 그려져 있네. 집 옆벽 위쪽에, 그것도 비바람막이防風널에 가려 잘 안보이는데 용케 봤구만^^ 그런데, 이 거북은 뭔가 좀 다른 그림 같애. 자네 눈에도 그런가? 이른바 민화에 보이는 거북그림 같지? 더 맞게는 궁궐그림 곧, 10장생十長生 그림에 보이는 거북꼴이지. 그렇군! 헌데, 여기 왜 이게 그려진 거지? 절 마당 왼쪽에서, 마당으로 서있는 이 심검당尋劍堂은 칼 찾는 집이란 뜻이니 선방禪房이구만. 그려, 이젠 아니지만 본듸 참선집이야. 바로 어리석음을 베는, 날린 터럭 닿여도 잘리는 날 선 칼-취모검吹毛劍을 찾고, 그 시퍼런 날을 가는 곳이란 뜻이지. 이 벼리를 달리 취모리吹毛利
“한국불교의 발전을 위해서 ‘전법도생(伝法度生)’이라는 승가의 임무를 끝까지 완수하고 달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강백 중 한분인 부산 화엄사 회주 각성 스님의 강맥을 전수하는 전강식이 김해 은하사에서 봉행됐다. 3월 1일 경남 김해 은하사(주지 화랑 스님) 보제루에서 봉행된 전강식에서는 선찰대본산 범어사 주지 대성 스님, 범어사 강주 지오 스님, 은하사 주지 화랑 스님이 각성 스님의 전강 제자로서 강맥을 전수받았다. 각성 스님은 전강 법어를 통해 “이 세분의 경계로 본다면 다른 곳에서 전강도 받고 공부도 많이 했으며 현재 여러 사부대중을 이끄는 인재로, 새삼 이 자리에서 전강을 받지 않아도 되지만 문벌, 학연, 지연을 따지지 않고 더욱 여래의 정법을 수행하고 정진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