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야 기도를 다녀오다 졸음운전으로 교통사고가 났다. 도반 한 분이 돌아가셨다가 살아나셨다. 내겐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외상이 없었지만 어느 날부터 온몸이 돌처럼 굳어왔다. 마음도 굳은 몸에 갇혀 버렸다. 온 세상이 뿌옇게 흐려졌다. 가슴과 머리가 터질 듯이 조여오며 통증이 이어졌다. 눈은 새빨간 토끼눈에 얼굴은 홍당무, 온몸이 바위처럼 무거웠다.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며, 두려움과 초조 불안으로 마음이 피폐해져 갔다. 정상적인 생활이 힘들어졌다.돌처럼 굳는 사고 후유증살기 위해서 절하기 시작숨길 트였지만 절은 엉망새로운 삶을 위해
요즘은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등을 배접하는 운력에 동참하고 있다. 등을 만드는 일도 누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니라 자발적으로 동참할 수 있어서 기쁘다. 그리고 그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도반들이 있어서 더 고마운 시간이다.이렇게 거의 매일 절에 가는 나를 보고 남편은 “절에 너무 빠져 있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처음 그 말을 들을 때는 ‘남편이 이 공부를 같이 한다면 좋을 텐데’라는 서운함이 앞섰다. 하지만 그 마음도 곧 내려놓게 됐다. 내가 밝아지면 주위가 모두 밝아진다는 말을 믿기 때문이다. 남편이 지적할 때마다 내가 더 잘해야 되
부모님은 장남으로 살아왔다. 나 역시 장녀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나에게는 항상 그림자처럼 책임감이 뒤따랐다. 장녀라는 책임감에 압박‘나’ 버리는 공부에 몰입상념·수마 극복이 관건매일 ‘천수경’ 후 좌선‘나’라는 단어는 늘 부담스러웠고 힘들다는 생각이 공존했다. 그런 무게감을 덜고 쉬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살았다. 그 쉼을 처음 경험한 곳은 외할머니의 49재였다. 결혼도 하기 전인 처녀시절이었다. 불교를 몰랐던 당시엔 사찰이 주는 고요함과 평온함에 이끌려 절에 다니게 됐다. 나름 기도하며 소원도 빌었다. 결혼 후에도 꾸준히 절에
2013년 음력 4월15일부터 2016년 음력 1월15일까지 매일매일 사경을 이어가면서 ‘법화경’ 전 7권, ‘화엄경’ 전 7권(우리말 화엄경 게송) 그리고 ‘금강경’은 7번 사경했다. ‘금강경’ 7번 가운데 절반은 한문으로 했지만 나머지 절반은 한글로 사경을 했다. ‘금강경’을 사경할 때 한글 사경을 하면서 그 뜻을 새기는 감동이 크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때부터 가능하면 한글로 의미를 새기며 사경을 하게 되었다. 조급한 마음에 쓴 글씨가 이상했던 사경 초기의 경전 1권은 마지막에 한 번 더 다시 썼다.군인 남편 덕분에 아침 일찍
불교와 인연이 된 것은 대구에서 살 때였다. 영천 은해사에서 무비 스님으로부터 계를 받고 불자의 삶을 출발했다. 남편의 직업이 군인이었던 터라 이사가 잦았기에 한 사찰을 오랫동안 다니기는 힘들었다. 가까운 절을 찾아 가는 것에 대해 당연하게 생각했고 2002년 부산 해운대로 이사 오면서 지금의 대광명사 주지 목종 스님이 주지로 계셨던 반야원을 다니게 되었다. 당시만 해도 다른 많은 주부들처럼 아들의 입시를 위한, 가족을 위한 기도가 내 신행생활의 전부였다. 2005년 5월27일 쓰러지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친정아버지는 심장이 좋지
“제 잘난 멋에 살다보니/ 열심히 착실하게 제 몫의 삶/ 잘 살았노라 자부하며/ 현실을 살펴보니/ 모든 것이 미진하네/ 분하고 억울해서/ 누구의 탓인가?/ 무엇 때문인가?/ 범인을 잡기만 하면/ 멱살이라도 잡고 흔들면서/ 분풀이 할 요량으로/ 덕양선원 찾아와서/ 자성불수행 이틀만에/ 그 범인 생포했네/ 그 범인 잡고 보니/ 멀쩡한 얼굴로 사기치는/ 그 (아)줌마 일세/ 사형을 받아도 마땅할/ 그 범인/ 어떻게 처벌할까/ 피해자 의견 수렴하여/ 대비주수행 종신형!”수행을 마치고 쓴 게송이다. 이렇게 대비주수행이 시작되어 2013년 7
경북 안동의 가부장적이고 완고한 가정에서 태어나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면 큰일 나는 줄 알고 자랐다. 27세 때 고모님의 소개로 사윗감을 만난 자리에서 아버지는 당사자인 나의 의견도 묻지 않으시고 혼인을 결정하셨다. 양반 집안이라는 이유 하나였다.그 자리에 있던 또 한사람의 당사자인 남편감도 놀라서 “교직의 신여성인데 어떻게 얼굴도 보지 않고 아버지께서 결정하실 수 있으십니까?”하고 물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우리 애는 한 번도 내 말을 거스른 적이 없네”하고 다음날 내가 있던 대구로 신랑감을 데리고 오셨다. 마지못해 약속장소에 나가
두 번째 3000배 뒤 며칠 안 가서 술과 고기를 즐겼다.물론 세 번째 3000배는 동참 못했다. 겨우 정신 차린다는 게 미안함을 느낀 것이다. 절에 가서 사시예불 후 1000배를 하고 집에 오니 미안함이 조금 누그러졌다. 위안 삼아 한 절이었다.결국 백련암에 다시 올랐다. 일찍 도착했는데 절 저축을 할까 망설였다. 그러나 저축 없이 하는 게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력의 힘으로 처지지 않고 시간 안에 원만회향에 도전해보자고 다짐했다. 그래서인지 2500배까지는 무리없이 여여하게 했다.그런데 2500배부터 약간 머리가 아프고
술을 좋아했다. 살이 찌면서 아내와 관계도 소원해졌다. 몇 년 전 아내에게 차 한 대 사주려고 멋도 모르고 손댄 주식으로 몇 년째 정신적 고통을 받았다. ‘내 삶이 왜 이럴까….’ 좌절감과 무기력을 느끼며 생활했다. 그래도 다니는 절에 끈을 놓지 않았던 불연이 내 삶을 3000배로 이끌었다.사실 3000배는 딴 나라 이야기였다. 좀 솔직해지자면 시절인연이 도래했지만 모른 척 회피하기 일쑤였다. 2011년 한국불교대학 대관음사 연화봉사단에 가입해 주말마다 봉사했다. 이때 만난 도반이 아비라카페 회원이었는데 사진과 동영상을
뜻 깊은 봉사라 너무 뿌듯하고 보람찬 하루였다. 도반들은 부족한 솜씨로 이것저것 음식을 해서 대접해 올렸다. “오늘 음식 참 맛있었어요.” 우리가 준비한 음식을 먹고 나온 어린 친구의 말 한마디는 가슴에 아련함을 남겼다. 고아원에서 지낸 어린 친구들의 ‘엄마손맛’에 대한 그리움이 느껴졌기 때문이다.이번엔 1000일 기도였다. 첫 100일 기도 회향의 흥분이 가시지 않았는데…. 김경숙 청소년연구소장님은 100일 기도 10번을 제안했다. 모두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싫지 않은 얼굴이었고, 심지어 웃고 있었다. 자연
아미타부처님과 인연은 우연이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필연이었다.부산 홍법사와 깊은 인연의 시작은 우리 딸이 3살 되던 2011년 어느 날이었다. 아이가 없을 땐 수목원처럼 편안해 그냥 산책하러 자주 찾았던 사찰이었다. 날씨가 좋으면 좋은 대로 시간이 남으면 남는다고 찾았다. 휴식이 필요하고 자연이 그리우면 한 번씩 들렀다. 아이가 생기고 커가면서 내 관심은 아이가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움직이고 있었다. 어쩌면 그래서였다. 홍법사가 어린이법회와 문화관 수업을 한다는 소식은 참으로 반갑고 기쁜 소식이었다. 비록 아이가 너무 어려 법
둘째 날, 다시 약사여래불 앞에서 일생 돌아보기를 하던 중 한 경계를 보게 되었다. 내 뒤쪽에서 함께 수행하고 있던 남편이 가부좌를 한 자세에서 빛의 속도로 상단 부처님 자리에 척 하고 가서 앉는 것이 아닌가. 동시에 법당에는 향내가 진동했다. 깜짝 놀라 눈을 뜨고 주변을 돌아보니 거사는 그대로 있고 불단 어디에도 향이 피워진 곳이 없었다. ‘네 남편이 부처인데 어디에서 부처를 찾느냐!’하는 부처님의 준엄한 가르침으로 느껴졌다.이 상서로운 체험은 지금도 나의 신심을 고무시킨다. 남편에게 불평하는 맘이 일어날 때 나는 그 순간을 생각
2013년 5월13일, 초파일을 앞둔 일요일이었다.다니던 재적사찰에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부처님오신날 사찰을 방문하는 불자들에게 보시할 차량용 연등 울력을 하기 위해서였다. 거실로 나오다가 마침 켜놓은 TV에 눈길이 갔다. 한 스님이 하는 법문에 이끌렸다. 법문이 얼마나 마음에 와 닿았던지 이런 마음의 소리가 들렸다. ‘저 스님이 선지식이야. 저 스님 지도를 받으며 수행 한 번 해 보았으면….’ 법문을 마치니 대비주 독송 소리가 흘러나왔는데 천상의 소리 같았다. 한량없이 편안하고 환희로웠다. 자막으로 안내되는 사찰
부끄러운 자신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좀 더 정확하고 부드럽게 다라니 독송을 하겠다는 발원이 생겼고 그날 이후로 집에서 틈틈이 츰부다라니 기도수행을 했다. 그리고 일요일 저녁에는 대광명사에서 진행되는 츰부다라니 기도에 한 번씩 동참하게 되었다.그렇게 출발한 수행 인연은 삶에 깊게 뿌리내렸다. 츰부다라니는 하안거, 백중 49재, 동안거로 이어졌다. 지장재일 합동천도재에서도 시간 날 때마다 참석해 츰부다라니를 독송했다. 사실 6년 전부터 츰부다라니를 했지만 여름과 겨울 안거 기간에만 수행했다. 그런데 3년 전 부산 대광명사에서 재가안거
충북 제천에서 태어난 나의 어린 시절 불교를 떠올려본다. 자주 절에 가진 않더라도 부처님오신날이면 항상 아버지의 손을 잡고 절에 올라 바람에 한들거리는 오색 연등을 한참 바라보던 기억이 있다.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나를 불교로 이끌어 주신 분은 아버지였다. 그렇게 아버지의 손을 잡고 절에 올랐기에 절에 가는 것을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여겼던 것 같다.그래서일까. 알게 모르게 몸과 마음에 밴 불연은 세월 흐르니 시절인연을 만나 꽃 피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손을 잡지 않고도 혼자서 사찰을 찾는 일이 잦아졌다. 군복무를 마치고 성인이
눈물이 흘렀다. 주책없이 콧물도 흘렀다. 7년 전 즈음이었다. 직장에서 기장 장안사를 찾았을 때, 이유도 알지 못한 채 울었다. 처음 해 본 108배, 그 느낌을 잊을 수 없었다. 그래서일까. 그날 이후 직장에서 업무를 마치고 나면 사찰을 찾아 108배를 했다. 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나 아이들이 아플 때 그리고 속상할 때나 우울할 때 언제든 절을 찾아 부처님 앞에 108번 엎드렸다. 돌이켜보면 법당 문지방 닳도록 오가며 오직 부처님에게 참회했던 것 같다. 야간에 법당을 개방하는 절을 찾아가서 108배를 할 정도로 간절한 마음이었
6~7년 전, 깊은 나락으로 떨어져 무기력하게 지낼 때 대비주를 처음 만났다. 어머니께서 안타까워하시며 ‘천수경’을 읽어주시곤 하셨는데, 유독 천상의 노래소리처럼 들리는 구절이 있었다. ‘신묘장구대다라니’라고 하셨다.인터넷을 검색했다. 어느 스님의 독경소리를 듣는데 마음 깊은 곳에서 눈물이 마구 솟았다. 아련하기도 그립기도 슬프기도 반갑기도 한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여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독송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듬더듬 7독 그리고 21독, 108독으로 늘려갔다.출근 전 108독, 퇴근 후엔 900독씩 독송했다. 직
생각해보면 10년 동안의 절수행은 ‘생각의 소음에서 벗어나기’였다. 걱정거리와 거리두기, 사람과 적절한 간격유지, 열정의 강도조절이 절수행을 통해 이뤄졌다. 그렇게 생각의 소음에서 벗어나면서 나는 육신의 건강과 정신의 평화를 얻어냈다.3000배를 처음 시작할 즈음 나는 아토피와 우울증으로 심신이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져 있었다. 온 몸이 가려워 견딜 수가 없었고 가려운 곳을 긁으면 진물이 났다. 피부마사지샵을 운영하고 있던 나는 엄청난 스트레스로 머리가 돌아버릴 지경에 놓여있었다. 몸이 망가지는 것도 그렇지만 비즈니스에도 상당한 문제
소극적인 불교신자였다. 이른 바 이전의 내 모습이 그랬다. 부산 대광명사와 인연을 맺었지만 내 모습은 별로 달라진 게 없었다. 대광명불교대학에 등록해 수업을 받고 있었지만 무엇 하나 나서서 하는 일은 없었다. 수행은 더더욱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 내가 자비도량참법을 만나고 달라지기 시작했다. 자비도량참법은 꿈으로 다가왔다. 생생하리만치 자비도량참법을 하라는 꿈을 꿨다. 그 꿈에 저절로 발이 이끌리다시피, 아니 마음이 대광명사 종무소로 향했다. 일단 책부터 구입했다. 하지만 책만 샀을 뿐이었다. 자비도량참법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지 못
나에게 기도는 생각만 할 뿐 쉽게 시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새벽마다 범어사 대웅보전에 불 밝히며 기도하는 14년 지기 언니가 부러웠다. 하지만 아직 인연이 아니었는지 절에 가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고등학교 재학시절 금정사에서 불교학생회 활동을 하며 교리토론은 했지만 경전 한 권 제대로 읽어보지 못했다. 막내 아이가 다니던 음악학원 선생님이 홍법사 일요어린이법회와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 참여를 넌지시 권했다. 오가며 보던 아미타대불이 있는 곳이 홍법사라는 사실을 새삼 알았다. 막내는 일요법회를 마치고 리듬체조, 댄스, 합창 등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