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수(楊修)는 ‘삼국지’의 주인공으로 오늘날의 총리인 승상 자리에 있던 조조 아래에서 주부(主簿)로 일했다. 어느 때 조조가 아랫사람에게 화원을 만들게 한 일이 있었다. 화원이 완성되자 조조는 현장으로 시찰을 나갔지만 아무런 말을 하지 않은 채 화원의 문에 활(活)이라는 글자를 써놓고 떠났다.잔뜩 긴장하여 상관의 평가를 기다리던 관리는 적잖이 당황했다. 그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쩔쩔매는 것을 본 양수가 웃으며 말했다.“승상께서는 문이 너무 넓다고 하시는 거요.”“어째서 그렇습니까?”“문(門) 자에 활(活) 자를 써 넣으셨으니, 그게
대부분의 아프리카 국가들이 그러하듯이 남아프리카 또한 백인들이 이주해 오면서 근대화가 시작되었다. 아프리카에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는 금과 다이아몬드를 채굴하기 위해 이주해온 백인들은 흑인을 노예로 부렸다. 시간이 흘러 노예 제도는 없어졌지만, 백인이 흑인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면에서는 달라진 것이 없었다. 남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은 같은 일을 하고도 백인에 비해 4분의 1밖에 안 되는 적은 임금을 받았다.1945년부터 남아프리카 백인 정부는 인종 분리정책을 시행했다. 그 정책은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라는 이름의 법으로써 정당화
1979년, ‘이완반응’을 분석하고 있던 미국 학자 허버트 벤슨이 달라이라마에게 자신의 연구에 협조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달라이라마가 이를 수용함으로써 티베트 명상인들에 대한 생리학적 조사가 시행된 뒤 ‘네이처’를 비롯한 학술지에 발표되었다.벤슨 박사는 정교한 장비를 갖고 티베트 승려들이 탄트라 요가를 수련하는 상태를 측정했는데, 그 결과는 놀라웠다. 실험 대상자인 승려가 깊은 명상상태에 들어갔을 때, 직장온도계로 측정한 내부 온도와 피부온도계로 측정한 외부 온도가 섭씨 10도가량 상승하였고, 따라서 그들은 온도가 영하로 내려간 상
1956년 여름, 캄과 암도 지역의 티베트 자유투사연맹은 중국을 공격하였고, 이에 대응하여 중국군은 4만명을 증강하였다. 중국군은 저항군에 가담한 티베트인들의 아내와 자식들을 무자비하게 고문하고 처형했는데, 특히 가혹한 것은 그 고문을 승려들을 시켜서 한 점이었다. 달라이라마는 지안 장군에게 항의했지만 그는 “당신의 비난은 티베트 국민들을 보호하고 도우려는 ‘조국’에 대한 모욕”이라는 답변을 들었다.그해 봄, 달라이라마는 라싸를 방문한 시킴 왕국의 쿠마르 왕자를 만났는데, 그는 아시아 불교도들을 대표하는 ‘마하보디협회’ 의장이었다.
중국을 대표하여 파견된 지앙 장군을 만난 후 달라이라마는 피난처인 트로모에서 수도인 라싸로 돌아왔다. 처음에는 그 나름 정중했던 중국군의 태도가 1951년 10월 갑자기 변했다. 참도에서 티베트군을 진압했던 중국군 3000명이 라싸로 진입해온 것이다. 그들은 중국군에 협력하는 티베트인의 인도를 받고 있었다. 얼마 후 중국군의 규모는 2만 명으로 증강되었다.그 무렵 중국군은 자신들이 티베트와 맺은 ‘17개 조항’을 지키는 듯했다. 그 협정에 따르면 인민해방군은 정당한 매매행위를 통해 물품을 구해야 했다. 하지만 그 무렵부터 중국군은
제14대 달라이라마는 1935년에 티베트 북동부 변방인 암도에 있는, 스무 가구가 사는 작은 마을 탁최에서 소작농인 아버지와 그가 ‘세상에서 가장 친절한 분’으로 기억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모두 열여섯 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그중 일곱이 살아남았다. 어렸을 때 그의 이름은 라모 툰둡이었으며 나중에 달라이라마가 되면서 텐진 갸초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 그가 세 살이 되어가던 때, 제13대 달라이라마가 서거한 후 정치를 맡고 있던 섭정 정부는 서거한 달라이라마의 환생을 찾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어떤 아이가 전대의
달라이라마(Dalai Lama) 14세는 불교 역사상 불멸 후 이백여 년 후의 아소카대왕(?~BC 238) 이래로 가장 위대한 전법자이다. 불교의 교세 확장은 부처님께서 직접 행하신 45년간의 전법, 아소카 대왕에 의한 인도 전역으로의 확장 및 스리랑카로의 전파, 대승불교의 흥륭, 대승불교의 북동아시아 지역으로 확산 등 단계를 거치면서 이루어져 왔다. 그리고 현대에 이르러 여러 불교인들에 의해 유럽과 미국 등은 물론 전세계적으로 불교가 확산되고 있는데, 그중 가장 주목할 만한 전법자는 달라이라마이다.가장 먼저 부처님 당시의 전법은
한 아름다운 처녀가 있었다. 경전에 그녀의 이름이 전해져 오지 않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녀의 이름을 지어 수다나라고 부르기로 하자. 그녀는 라자가하에 사는 한 부자의 딸이었다. 결혼할 나이가 되자 그녀의 부모는 그녀로 하여금 함부로 외출을 할 수 없도록 높은 집을 지어 그 꼭대기층에 머물도록 했다. 어느날 저녁, 수다나는 창가에서 밖을 내려다보다가 사냥한 사슴들을 팔려고 성안으로 들어가는 한 청년을 보았는데, 그의 이름은 꾹꾸따밋따였다. 수다나는 꾹꾸따밋따에 대한 사랑의 염을 느꼈다. 그녀는 하녀를 시켜 청년이 언제 성에서 나오는
1979년 봄, 미치 앨봄은 매사추세츠 월섬시에 있는 브랜다이스대학을 졸업했다. 그에게는 모리 슈워츠라는 은사가 있었다. 슈워츠는 청록색 눈동자를 가진 교수로, 귀가 크고, 코는 삼각형이며, 청록색 눈동자가 숱이 많은 잿빛 눈썹 아래에서 빛나는 은발의 노신사였다.“계속 연락할 텐가?”하고 모리 교수가 물었고 “물론이지요”하고 미치가 말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오랫동안 미치는 모리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삶은 한가로운 게 아니다. 대학을 졸업한다는 것은 그 한가롭지 않은 삶의 한복판에 뛰어든다는 것이고, 그곳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동안
춘추시대, 우(虞)나라는 강대국인 진(晉)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약소국이었다. 언제 진나라가 쳐들어올지 몰라 전전긍긍하던 우공은 그 역시 약소국인 괵(虢)나라와 화친을 맺고 만일의 경우 서로 구원하기로 맹약하였다.괵공은 성정이 교만하고 싸우기를 좋아했다. 그가 자신보다 약한 주변 지역을 약탈하자 침략당한 지역 사람들이 진나라에 가서 괵국을 토벌할 것을 청했다. 진헌공(晉獻公)이 순식(荀息)에게 대책을 묻자 순식이 말했다.“우국과 괵국이 서로 화친을 맺고 있는 상태에서 괵을 칠 수는 없습니다. 먼저 괵국의 힘을 약화시켜야 합니다.
키케로(Cicero, BC. 106~43)는 로마 공화정 말기의 정치가이자 철학자요, 연설가이자 저술가이다. 하지만 그는 정치가로서는 당대의 카이사르나 폼페이우스에 미치지 못하고, 철학자로서는 전대의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연설가이자 저술가로서, 그는 위대한 서양인을 말할 때 빠뜨릴 수 없는 큰 업적을 남겼다.원로원 계급 다음을 차지하는 기사 계급 신분으로 태어난 키케로는 법정에서의 변론으로 이름을 떨쳤다. 또한 그는 로마 역사상 가장 뛰어난 연설가이기도 했다. 그리스·로마 시대에 이름을 떨친 웅변가는
초기불교에서 부처님은 세가지 위격으로 분별된다. 첫번째 부처님은 무상정등각자, 두번째 부처님은 벽지불, 세번째 부처님은 아라한이다. 세 부처님은 똑같은 내용의 깨달음을 성취하지만 법을 펴실 때의 범주와 기간이 다르다. 그것은 그분들이 지은 전생 공덕에 따라 결정된다.무상정등각자로서의 부처님은 까마득한 과거 전생부터 어마어마한 공덕을 지으신 분이기 때문에 그분의 가르침은 오랜 시간에 걸쳐 전인류에게 전파된다. 그러나 벽지불의 가르침은 짧은 기간 동안 작은 지역에서만 전파되는데, 스승의 가르침을 받지 않고 스스로 사성제와 연기법을 깨달
책을 낸 작가라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가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김동식씨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적어도 처음에는 그랬다. 김동식씨는 20년 전 중학교 1학년을 마지막으로 학교에서 무언가를 배운 적이 없는 작가다.집안 형편이 어려워서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학교가 싫어서 공부를 그만뒀다. 학교 공부를 별로 잘하지 못했다. 공부를 잘하지 못하면 선생님들은 학생을 야단친다. 그게 싫었다. 아무도 나를 야단치지 않는 PC방에서 게임을 하며 나만의 세계에 빠져들었다.살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고 그래서 닥치는
신라의 김춘추(金春秋·604~661)는 진골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왕위에 올라 태종무열왕이 되었고, 매제이자 사위이기도 한 장군 김유신(金庾信·595~673)과 함께 백제를 멸망시킴으로써 삼국통일의 기초를 다진 인물이다.신라 선덕왕 11년에 백제가 대량주를 공격했는데, 그 전투에서 그곳을 지키던 김춘추의 사위 품석이 아내와 함께 죽었다. 김춘추는 이 일을 통탄하여 백제를 치고자 하였으나 신라의 역량은 부족했다. 그래서 그는 고구려를 설득하여 함께 백제를 치려는 계획을 세웠다.고구려로 떠나기에 앞서 김춘추는 김유신에게 만일의 사태가 생
살라딘(Saladin)은 이슬람권 술탄(왕)들 가운데 다른 문화권에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1137년에, 제2차 십자군 전쟁 때 다마스쿠스 방어군 사령관으로서 유럽군을 패퇴시킴으로써 그 지역 총독이 된 아이유브의 아들로 태어났다. 얼마 후, 그 일대의 통치자였던 누레딘은 수도를 다마스쿠스로 옮겼고, 어린 살라딘은 누레딘의 사랑을 받았다.당시 이집트는 300년 전에 성립한 파티마 왕조가 지배하고 있었는데, 이 왕조는 시리아, 수단, 아라비아반도까지 진출했다. 왕조의 칼리프는 알 아디드였는데, 심신이 허약한 인물이었다. 그에
비구 말룬캬풋타는 편안하고 고요한 곳에서 명상을 수행하던 중에 마음속으로 이런 생각을 일으켰다.‘세존께서는 수많은 주제에 대해 설법하시지만 이런 주제에 대해서는 설하시지 않는다. 그것은, 세상은 항상됨이 있는가 없는가, 세계는 한정이 있는가 없는가, 목숨은 곧 몸인가 목숨과 몸은 다른가, 여래에게는 마침이 있는가 없는가, 여래에게는 마침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가, 여래에게는 마침이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은가 등이다.’그는 이어서 생각했다. ‘나는 이것이 궁금하다. 그런데도 세존께서는 이것들에 대해 설하시지 않는데, 나는 그것을 참
스콧 니어링(Scott Nearing, 1883~1983)은 고등학교 때 알렉산더, 카이사르, 나폴레옹, 한니발 등을 찬양하는 글을 썼다. 그런 그를 그의 부모는 육군사관학교에 보내려 했지만 우연한 일로 눈에 장애가 생기는 바람에 펜실베이니아대학 경제학부에 진학하게 된다. 대학을 졸업한 뒤, 스콧은 시간당 11센트를 받으며 채굴된 석탄에서 점판암 부스러기를 골라내는 아동들을 보게 되었다. 큰 충격을 받았지만 그가 아이들을 위해 해줄 일이 별로 없었다. 경제적 분배 문제에 대해 대학에서 강의하고 있었던 그는 시간강사에서 조교수로, 조
공자에 의해 완성된 유가사상이 한(漢)왕조에 의해 통치법으로 받아들여진 이후로 동북아시아 역사는 공자의 절대적인 영향 하에 전개되었다. 그 과정에서 유가사상은 훌륭한 업적을 남기기도 했고, 많은 병폐를 낳기도 했다. 그 업적과 병폐의 기반에는 내면적인 덕을 바탕으로 정치를 이끌어야 한다는 덕치주의(德治主義)가 있다.덕치주의는 얼핏 보면 좋기만 한 사상인 듯하지만 실제로는 거의 실현되기 어렵다. 그 때문에 덕치주의는 자칫 덕을 명분으로만 내세우면서 실제로는 부덕한 정치를 하는 허위허례로 전락되어버리곤 했다. 정치의 본질이 ‘이익의 조
로마 일천 년을 대표하는 인물로 카이사르가 거론되는 것은 사람의 마음이 정(正)보다는 기(奇)에 먼저 관심이 쏠리기 때문일 것이다. 카이사르의 삶은 극단적으로 기(奇)하기 때문에 우리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 그리고 그 반대인 정(正)의 영역에 5현제(五賢帝)의 삶이 있다.5현제는 로마를 번영과 융성으로 이끌었던 다섯 황제를 묶어서 지칭하는 말인데, 그들은 각각 네르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그리고 아우렐리우스이다.5현제들은 모두가 다 문무를 겸비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군인 출신이었거나, 출신은 그렇
전라남도 기념물 제93호인 완사천(浣紗泉)은 고려 태조 왕건(王建)과 그의 둘째 부인인 장화왕후(莊和王后)가 처음 만난 장소로 알려져 있다. 왕건은 903년부터 914년까지 태봉국의 창건자인 궁예(弓裔)의 휘하 장수였다. 그가 나주로 출전하여 후백제의 견훤(甄萱)과 싸우던 중 산 아래로 오색 기운이 서려 있어 그곳으로 가보니 샘이 하나 있고 거기에서 어여쁜 처녀가 빨래를 하고 있었다.왕건이 목이 마르니 물을 한 잔 달라고 청하자 처녀는 표주박에 물을 뜬 다음 그 위에 버들잎을 한 장 띄워 젊은 장수에게 공손하게 건네주었다. 물을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