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대 말까지만 해도부처님오신날을 성탄절로 통용이러다간 ‘예배-장로’뿐 아니라‘자비’도 타종교 용어될 판 연말이면 ‘성탄절’을 기리는 행사와 장식이 온 나라를 뒤덮습니다. 성탄절이란, 우리나라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기념일을 말합니다. 올해도 예외는 아니어서 서울의 거리는 성탄절 분위기로 가득합니다. 시청과 청계천을 중심으로 한 도심은 성탄절과 연말연시를 기리는 장식들로 마치 유럽의 기독교 국가에 와있는 착각을 들게 합니다. 성탄절, 이 단어는 언젠가부터 우리나라에선 크리스마스 지칭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성탄절이란 말이 크리스마스의 우리식 표현이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닙니다. 60년대 후반만 해도 불교계에서 부처님오신날을 성탄절로 지칭했었으니까요. 일례를 들자면 1967년 5월 25일 서
恕는 상대방 입장에 서서진심으로 이해하려는 것恕로서 노-사 한마음 되어현대불교 창간정신 되살리길 ‘그 마음을 같게 한다(心+如’)는 의미를 가진 서(恕)자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는 글자입니다. 보통 용서라는 단어에서 볼 수 있는 한자인데, 그 의미가 매우 심장합니다. 용서란 사실 용서하는 사람과 용서 받는 사람의 마음이 같아질 때 가능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같아지지 않은 상태에서 이뤄진 용서는 진정한 용서일 수 없지요. 상대의 입장이 되어 그 처지를 십분 마음으로 이해했을 때, 용서는 이뤄질 수 있는 것입니다. 마음을 상대방과 같게 한다는 것, 이것은 쉬운 일 같지만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이 세상에 내 마음 같은 이가 어디 흔하겠습니까. 그러므로 내 마음과 같은 이를 찾기보다는 내가 상대의 마음과
인간의 욕심 채우기 위해대규모 가축사업 갈수록 확산조류독감으로 가축들만 희생종교, 무분별한 육식문화에 침묵 중국 제(齊)나라 때의 이야기입니다. 제나라 신하 장포(莊暴)에게 ‘국왕으로부터 음악을 좋아한다는 말을 들었지만 무엇인가 그것에 대해 대답할 바가 없었다’는 하소연을 들은 맹자(孟子)가 다른 날 국왕을 만나 이와 관련된 대화를 나눈 일이 있습니다. 맹자는 ‘국왕이 음악을 좋아하면 제나라는 (발전을)기대할 수 있을 것’이라며 ‘다만 홀로 음악을 즐기지 말고 여러 사람들(백성)과 더불어 즐기라’고 권했습니다. 백성들과 즐거움을 함께 하지 않으면 다들 머리 아파하고 콧등을 찌푸리게 될 것이지만, 함께 한다면 백성들이 왕이 타악기 소리와 취주악기 소리를 듣고는 기꺼이 반가운 빛을 띠면서 왕을 칭송하게 될 것
노교수 해석에 학생 문제 제기실수 인정한 노교수에 박수갈채잘못된 佛紀 인정은 참된 용기경계해야 할 것은 후대의 조롱 대학 2학년 교양영어 시간 때의 일입니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당시 영어 과목을 담당했던 한 교수님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갈색 버버리를 걸치고 반백의 고수머리를 한 50대 후반의 중후한 모습은 요즘처럼 스산한 초겨울에 잘 어울리는 것이었지요. 바리톤 음성의 영어발음은 또 얼마나 좋았는지, 지금은 이름조차 잊어버렸지만 참 멋진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그 교수님을 지금까지 기억하는 것은 그런 멋들어진 외양 때문만은 아닙니다. 열린 사고와 닫힌 생각, 또 권위와 고집이 어떻게 다른 것인지를 보여준 철학과 용기가 그분을 잊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 해 가을의 어느 날, 영어수업 시간이
“초원에서 뛰어놀다 소에게 얼굴을 차인 후로 시력을 잃어가고 있어요. 환한 세상을 다시 보고싶어요.” 시간이 흐를수록 세상의 빛을 잃어가던 몽골 소년이 전국병원불자연합회(회장 이원철, 이하 병불련)의 도움으로 희망을 되찾을 수 있게 됐다. 미담의 주인공은 애르댕 사이한(Erdene Saihan). 병불련은 몽골 해외의료봉사를 지원해주고 있는 금강선원과 김안과 병원의 도움을 받아 사이한에게 밝은 세상의 빛을 돌려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다. 사이한의 눈은 실명상태에 가깝다. 오른쪽 눈은 거의 보이지 않으며, 왼쪽 눈도 점차 시력을 상실해가고 있다. 눈가에 남아있는 깊은 흉터는 1년 전 사이한의 상처가 얼마나 깊었는지를 짐작하게 해준다. 1년 전의 사고 이후로 사이한은 웃음을 잃었다. 11월 27일
종단 일 위해 나섰던 스님들따지고 보면 모두 고마운 분들종단의 중책 맡은 스님들은악순환 구조 선순환으로 바꿔야 최근 조계종에서 치러진 제14대 중앙종회의원 선거를 주의 깊게 지켜보았습니다. 세간에 회자된 것과 같이 말도 많고 문제도 많았던 선거였습니다. 승가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믿겨지지 않을 장면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정한 종헌종법을 가벼이 여기는 조짐이 나타났고, 그런 조짐들이 돈과 힘이라는 지극히 세속적 이해관계로 현실화하는 광경들을 보면서 자칫 승가가 붕괴될 수도 있겠다는 염려를 갖지 않을 수 없었지요. 다 알다시피 조계종의 질서를 지탱해주는 구속의 틀은 오직 종헌종법입니다. 종단을 유지·발전시키기 위해 스스로 정한 종헌종법과, 이를 종단의 구성원으로서 지키겠다는 양심에 기초한 자기절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