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할라왕조의 위대한 대왕 둣타가마니의 아들 살리야는 왕좌를 이어받을 후계자였다. 둣타가마니는 타밀 왕 엘랄라를 물리치고 44년간 이어진 타밀족의 싱할라왕국 지배를 종식시킨 민족의 영웅이었다. 둣타가마니의 후계자인 살리야는 그러나 천한 집시 여인과 사랑에 빠져있었다. 우연히 길가에서 마주친 여인 아소카말라에게 단번에 마음을 뺏겨버렸기 때문이다. 대왕으로 불리는 둣타가마니였지만 자식의 일만큼은 뜻대로 할 수 없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다를 바 없나보다.마힌다 스님에게 봉헌된스리랑카 최초 사원이자312년 칼링가서 도래한치아사리의 첫 보
둣타가마니의 창이 엘랄라의 가슴에 꽂혔다. 검은 코끼리에 올라타고 있던 엘랄라는 땅으로 고꾸라져 둣타가마니를 태운 흰 코끼리의 발아래 나뒹굴었다. 싱할라왕국의 승리였다. 44년 타밀족의 지배를 끝내는 순간이었다. 타밀 왕 엘랄라를 물리치고 수도 아누라다푸라를 탈환한 둣타가마니를 후대인들은 ‘대왕(Great King)’이라 불렀다. 스리랑카 싱할라왕조사에 단 두 명뿐인 대왕, 그 가운데 한명 둣타가마니대왕(BC 161~137)이다.“정법을 지키기 위한 전쟁”창에 사리 넣고 참전 선언싱할라민족 단결 이끌지만“귀의 않은 적 짐승”이라며스
아누라다푸라가 싱할라왕조의 수도가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2400여년 전이다. 기원전 377년 판두카바야(BC 437~377)왕이 이곳을 수도로 정하면서다. 하지만 아누라다푸라가 왕국의 수도로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데바남피야팃샤왕에 이르러서다. 즉 불교가 전해진 이후다. 이후 1017년 남쪽에 위치한 폴론나루와로 수도를 이전하기까지 1400여년동안 아누라다푸라는 스리랑카 최대의 도시였으며 불교의 중심지였다. 아누라다푸라를 발판으로 삼아 불교는 미얀마, 태국, 캄보디아 등 동남아시아로 퍼져나갔다. 남방불교의 거대한 줄기가 스리랑카로부
미힌탈레는 그리 크지 않은 야트막한 산이다. 야쇼카왕의 아들이자 스리랑카에 불교를 전한 마힌다 스님이 이곳에 도착해 데바남피야팃샤왕과의 첫 만남이 이뤄진 이후 미힌탈레 주변에는 많은 사찰들이 세워졌다. 아누라다푸라가 스리랑카의 수도로 1400여년의 역사를 이어오는 동안 미힌탈레 역시 싱할라왕조와 함께 찬란한 불교사의 중심지로 영광을 누렸다.불교에 귀의한 데바남피야팃샤마힌다 스님에게 승원·석굴 보시미힌탈레 주변 거대한 사원으로공양간·목욕탕·병원 등 유적 산재공양간엔 거대한 돌확 유적사원 운영규정 기록한 석비도마힌다와 왕 첫 만남 기념
멀리 하얗게 빛나는 거탑이 보인다면 스리랑카 고대왕국 싱할라왕조의 첫 수도 아누라다푸라가 가까워졌다는 뜻이다. 인도로부터 스리랑카로 이주한 ‘사자의 후손’ 위자야가 싱할라왕조의 문을 연 후 그의 후손 판두카바야에 의해 기원전 4세기 수도로 정해진 아누라다푸라는 무려 1400여년 동안이나 싱할라왕조의 심장부였다. ‘불국기’를 남긴 5세기 중국의 법현 스님을 비롯해 수많은 옛 기록 속에 아누라다푸라는 아름답고 웅장한, 동시에 불법의 향기가 진하게 스며있는 신성도시로 기록돼 있다.인도 법왕 아쇼카왕 아들스리랑카 전법사로 파견국왕 귀의 후
‘천일야화(아라비안나이트)’에 등장하는 아랍 상인들은 예로부터 스리랑카를 ‘셀렌디브’라고 불렀다. 보석의 땅이라는 뜻이다. 지금도 스리랑카를 수식하는 많은 단어들 가운데 ‘인도양의 보석’이라는 표현은 빠지지 않는다. 보석처럼 생긴 섬, 스리랑카는 고대로부터 동서양 교역의 중심지로 이름을 떨쳤다. 그 이름은 일찍이 한반도에도 알려져 있었다. 7세기 중국 당나라의 고승 의정 스님이 구법승들의 행적을 정리한 ‘대당서역구법고승전’에는 고구려 출신 현유가 스승 승철선사를 따라 사자국, 즉 스리랑카에서 출가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작은 섬나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