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법사 소임을 맡다보면 늘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많은 일들을 벌이게 된다. 새벽부터 저녁 늦도록 병원에서 분주하게 지내다보니 간혹 뜻밖의 질문도 받게 된다. “이런 복잡한 일에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선방에서 수행에만 전념하고 싶은 때가 없느냐?”는 것이다. 그럴 때면 “병원생활이 즐겁다”고 간단히 말하거나 때로는 가벼운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하고는 한다. 사실 일반인들도 주말이면 도시를 등지고 떠나는데 하물며 고요한 곳을 싫어하는 출가자가 어디 있을까. 그러나 ‘발심한 그곳이 도량’이라는 옛 어른들의 말씀처럼 병원은 그 어느 곳 못지않은 여법한 수행도량처럼 여겨질 때가 많다. 일 속에서 그리고 사람들과의 만남 속에서 끊임없이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고 ‘정말 중노릇 잘해야
불교계가 운영하는 병원이 적다보니 많은 스님들이 우리 동대 병원을 찾는다. 서울이나 경기지역에서 오시기도 하지만 멀리 지방에서 아픈 몸을 이끌고 올라오는 스님들도 적지 않다. 병이 스님이라고 비켜갈 리는 없다. 부처님께서도 만년에 병으로 고생하셨다고 하지 않던가. 그럼에도 아직 많은 스님들이 병원이라는 공간에 익숙하지 않은 게 현실이다. 열심히 기도하고 계율 지키며 살았는데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내심 부끄러워하는 것이다. 또 자신의 병으로 인해 행여 일반 불자들이 신심을 다치지 않을까 걱정하는 스님들도 의외로 많다. 그런 속내를 잘 알다보니 병원 로비에서 스님을 만날 때면 법당으로 모셔와 차를 대접하고 병원직원 분들에게 부탁해 입원수속을 돕도록 하고는 한다. 간혹 무거운 걸망을 짊어지고 손에 바리바
병원은 생로병사가 응축된 곳이다. 이곳엔 늘 태어나고 늙고 아프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병원을 찾는 사람들도 다양하다. 아픈 사람, 치료하고 간호하는 사람, 행정을 맡은 사람, 병문안 오는 사람 등등. 여기에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또 있다. 바로 자원봉사자다. 이들 봉사자들은 병원 안내에서부터 차트 전달, 병실 청소, 시트 교환 여러 일들을 담당한다. 우리 병원도 마찬가지다. 150여명의 자원봉사자들은 병원 곳곳에서 생기를 불어넣고 있다. 이 분들이 안 계시면 당장 병원 업무에 큰 차질을 빚을 정도로 역할이 막중하다. 우리 법당에서는 이 분들을 위해 매월 생일법회, 산행, 명상법회를 정기적으로 실시하고 있다. 그 분들이 금쪽같은 시간을 내주는 만큼 우리도 그 분들께 무언가 전해드리고 싶은 마음에서
내가 암이라는 진단결과를 통고 받은 것은 2007년 6월이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도 처음엔 선뜻 믿겨지지 않았다. 내가 암이라니…. 허나 그리 오래지 않아 체념하듯 받아들일 수 있었다. 어쩌면 평소 허약했던 나의 몸 상태와 무관하지는 않을 듯싶다. 암에 걸렸다는 사실 못지않게 정작 나를 놀라게 한 것은 노스님 때문이었다. 내가 중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노스님이 충격으로 쓰러지셨으며, 눈물도 많이 흘리셨다는 것이다. 처음엔 믿기지 않았다. 설마 우리 노스님께서…. 사람들에게 노스님은 다가서기 어려운 존재였다. 평생 흐트러진 모습 한 번 보이신 적이 없고,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말씀도 거의 없으셨다. 팔순 가까운 연세에도 새벽예불이나 참선을 거르는 일조차 없었다. 신도들이나 다른 스님들에겐 늘
내가 이상적인 수행자로 존경하는 노스님. 그 분 말씀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거스른 사건은 강원을 졸업한 그해 추석 무렵 일어났다. 사찰 불사가 어느 정도 마무리됐을 때였다. 나는 노스님께 당분간 미얀마로 위빠사나 수행을 다녀오겠다고 조심스럽게 말씀드렸다. 초기불교와 위빠사나에 대한 이해가 선행된다면 대승불교는 물론 선수행에도 크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신념에서였다. 그러나 노스님께서는 완강히 반대하셨다. 화두 하나에 모든 게 담겨 있으니 밖에서 찾지 말고 선방에 가라는 말씀이셨다. 허나 나는 노스님 말씀을 선뜻 받아들일 수 없었다. 화두 수행에 대한 확신과 간절함이 없는 상태에서 남이 장에 간다니까 나도 따라가 주섬주섬 줍는 식의 삶을 선택하기는 싫었다. 나는 뜻을 꺾지 않았고 끝내 종아리까지 맞았다. 나
오는 2월18일은 우리 노스님의 79번째 생신이다. 지난해 6월말 내가 병원법당 소임을 맡은 뒤 이래저래 바쁘다는 이유로 그동안 한 번도 찾아뵙지 못했다. 그러나 어찌 하루라도 우리 노스님을 잊은 날이 있었으랴. 새로운 일들과 맞닥뜨릴 때 난 늘 노스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떠올렸고, 하루하루 노스님께 부끄럽지 않은 손상좌가 되려고 애썼다. 심지어 암수술을 받는 순간까지 나는 “언제나 수행자다워야 한다”는 노스님의 당부를 잊지 않으려 애썼다. 그만큼 우리 노스님은 출가자로서 나의 이상이었다. 내가 노스님을 처음 뵌 것은 지난 1991년 12월4일이다. 대학 2학년 때 출가를 결심했지만 당시 눈물로 막아서는 부모님을 뿌리칠 수는 없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다가 뒤늦게 출가할 수 있게 된 나는
미소불을 처음 봤을 때 느낌은 놀라움이었다. 지그시 감은 눈과 부드러운 미소. 깊은 선정에 든 듯하면서도 한 없이 자비로운 표정. 간단한 선 몇 개로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의 특징을 어쩜 저리 잘 표현했을까. 나도 저 부처님의 미소를 닮고 싶었다. 화려하지도 눈에 잘 띄지 않지만 누군가에게 위안을 줄 수 있는 존재. 어쩌면 수행이란 저 미소를 닮아가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라고 여겨졌다. 병원에 미소불 봉안 불사를 해야겠다고 결심한 것은 지난해 7월초였다. 지도법사 소임을 처음 맡자마자 3일간 특실에서 장례식장까지 병실 전체를 꼼꼼히 돌아보았다. 첨단 의료기기에 깔끔한 시설. 흠 잡을 데 없었지만 아쉬움도 없지 않았다. 여기는 분명 불교병원인데 불교적인 요소를 거의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570여명의 의사와
H스님은 40대 초반으로 늦깎이 비구 스님이었다. 건강상태가 좋지 않아 병원을 찾았던 스님은 자신이 간암에 걸렸음을 알았고 수술을 위해 지난해 초 일산 동국대병원에 입원했다. 그러나 H스님은 얼마 후 대구병원으로 옮겨야 했다. 문중의 한 어른 스님이 대구로 내려와야 수술비를 주겠다고 했단다. H스님은 우연히 알게 돼 찾아온 가족들에게도 자신은 절집문중 사람이니까 병원비 걱정도 문병도 오지 말라고 했더란다. 하지만 대구에서 암수술을 받은 스님은 간병인도 없이 오랫동안 병실에 방치됐다. 설상가상으로 그 어른 스님은 갑자기 병원비마저 낼 수 없다고 했다고 한다. 그 내막이야 알 수 없지만 그로 인해 H스님이 감당해야 했던 깊은 절망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수술 후 쉬기는커녕 수술비 마련을 위해 다시 부전이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