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승부락 다리서 일경 대치시위군중 시간 갈수록 증가 봉선사를 중심으로 한 3·1만세시위운동의 거사 일을 3월 30일로 정하고 동민들에게 뿌릴 ‘조선독립단 임시사무소’명의의 격문 내용까지 완성한 성숙 일행이 29일 야밤에 봉선사 서기실에 있던 등사기를 짊어지고 간 곳은 산 속 약수터였다. 성숙을 비롯해 이순재, 김석로, 강완수 등 4명은 빼앗긴 나라를 다시 찾는데 기여할 것을 다시 한번 다짐하며 이 약수터에서 격문 300여 장을 인쇄했다. 그리고 보다 구체적인 계획을 다시 세웠다. 당시 봉선사 농지를 관리하며 진접면 일대에서 100여 석의 곡식을 거둬들이고 충청도에 있는 토지까지 관리하는 농감 역할을 하던 이순재는 각 동리의 주요 인물들에 대한 성품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 주요 인물들을 중심으로
군중 속에서 대중 염원 읽고만세운동 이어갈 방법 모색 3·1독립운동을 하루 앞두고 비장한 각오로 청년학생들을 한 자리에 불러모은 만해 스님은 독립운동의 준비과정을 비롯해 불교계의 참여와 역할 등을 자세히 설명하고, 인쇄된 독립선언서 3만 매를 각 교단에서 1만 매씩 배포하기로 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리고 청년학생들에게 선언서를 나누어주며 각각 경성과 지방에서 배포하도록 했다. 만해 스님은 또 “각 종교단체의 지도자들은 조국의 광복을 위해 결연히 나섰으나 아무런 득도 없고 회한도 없다”며 “청년학생들도 이러한 뜻을 동포제위에게 널리 알려 독립완성에 매진하고, 특히 서산·사명의 법손임을 기억하여 불교청년의 역량을 잘 발휘하라”고 독려했다. 청년학생들은 만해 스님의 지시를 받아 각자 선언서를 갖고 서울과
만해백일장 역대 수상작 모음집 3월이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일이 삼일절일 게다. 빼앗긴 국권을 되찾고자 삼천리 방방곡곡의 민중들이 함께 외쳤던 `대한독립만세'의 함성. 그 함성의 원동력이 되었던 민족대표 33인의 대표자 만해 스님. 이 책은 지난 '79년 만해 스님의 자주 독립 정신과 고결한 문학정신을 기리고 잇기 위해 대한불교청년회가 매년 3월 1일 열리는 만해백일장의 17회('96년)까지 역대 수상작을 모았다. 1회에서 8회까지의 수상작 일부가 조계종 개혁의 와중에서 소실되어 실리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14회를 제외한 수상작 중 우수상 이상의 작품 총 1백28편이 실려있다. 이 수상작품집을 펴낸 대한불교청년회는 이 책의 발간을 계기로 "전국 유일의 권위있는 전국만해백일장의 기틀을 세
조계종 기틀 다진 淨化佛事 주도 하룻밤 破戒로 10년을 맨발 참회 “갈증이 심했나 보군. 그러나 마음이 타는 것은 물로 식힐 수는 없는 법.” 뜨거운 여름날, 진주 서장대(書藏臺) 기슭에 앉아 흘러가는 남강을 바라보던 한청년이 목마름을 달래기 위해 호국사에 들러 물 한 바가지를 벌컥벌컥 마시자 이를 지켜보던 한 노승이 중얼거리듯 한 마디 내던졌다. '타는 마음은 물로 달랠 수 없는 것이라 … .' 전율처럼 다가온 노승의 말에 청년의 등줄기가 시원해짐을 느꼈다. “ 스님, 그러면 이 마음이 괴로울 때 편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까?” “그 마음을 이리 내어 보게. 그러면 내가 고쳐 줄테니.” 뒷날 한국 현대불교사에 큰 족적을 남긴 청년 찬호(청담의 속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전 민족의 염원을 담아 행해졌던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의 물결이 2백여명의 어린이들에 의해 재현, 전국에 울려 퍼졌다. 월간 동쪽나라(발행인 김형균)가 주최해 지난 1일 탑골공원에서 개최된 '어린이 3.1만세운동'이 그것. 이 행사는 정오 12시 2백여명의 어린이들이 당시를 재현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민족대표 33인으로 분장한 극단 동쪽나라 단원 33인이 나와 일제침략과정을 설명하고 만세삼창을 외쳤다. 이윽고 일본경찰을 상징하는 대형인형이 등장, 우리 민족을 탄압하는 장면이 재현됐다. 이때 몰래 태극기를 나눠주는 어린이들.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조선이 독립국임을 선포하자 2백여명의 어린이들과 탑골공원을 메운 1천여명의 시민들의 입에서
3.1절을 맞이하여 불교계를 비롯 종교계가 다채로운 행사를 마련했다. 종교계는 각기 개별기념행사를 갖을 뿐만 아니라 종교의 사회참여를 강조해온 수행, 성직자들이 함께 행사를 가질 예정이다. 또한 불교계에서는 어린이들이 3.1독립운동을 재현하는 특별행사도 열 계획이다. 불교 실천불교전국승가회(대표 청화스님), 기독교 전국 목회자 정의평화실천협의회(대표 유원규 목사), 정의구현사제단(김승훈신부 등 공동대표 4명) 원불교 사회개벽교무단(대표 신명국 교무)은 3월1일 오후3시 공동으로`통일선언문'을 발표할 예정이다. 각계 종교인들이 주축이 됐던 기미독립운동의 정신을 되살려 범종교적 통일운동을 추진하자는 것이 중요 내용이다. 이 행사에는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공연이 뒤따른
64년 3월 14일 사망 “대한독립만세” 1919년 3월 1일. 범어사에 모인 1만여 불자들은 참고 참았던 울분을 이 한마디로 토해냈다. 그리고 이들의 행렬 선두에 그가 있었다. 억눌려 있던 그의 가슴은 결의에 찬 용기로 뜨겁게 차올랐다. 일평생을 불교와 나라, 후학양성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은 김법린 선생은 승려일 때는 선지식, 이후 학자로는 동서양의 깊은 천리를 꿰뚫은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1899년 음력 8월 23일 경북 영천군에서 태어난 그는 13세에 영천 은해사로 출가했다. 양휘허(揚揮虛) 스님을 은사로 득도 한 이래 1917년 범어사 강원에서 사교과(四敎科)를 수료하고, 20세가 되던 기미년에 불교계 만세운동을 지도하다 체포당할 위기에 처하자 국경으로 도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