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말까지 사찰은 왕실과 상호보험적 관계를 지혜롭게 유지하면서 억불숭유의 힘든 세월을 견뎌내었다. 조선 말기에는 봉산을 자임하면서 양반 권세가나 토호의 탐욕에서 사찰 숲을 지켜내었다. 미약하게나마 긍정적으로 작용하던 조선왕실의 보호막마저 사라진 일제강점기에 사찰 숲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사찰숲 기록이 많지 않지만‘조선임업사’에 일부내용 담겨국권침탈 다음해 사찰령반포사찰재산·승려활동 모두규제일제 수탈로 사찰재정 열악이에 따른 사찰림 남벌 우려 사찰 숲의 유래와 관리에 관한 조선시대의 기록을 쉬 찾을 수 없듯이, 일제강점기의 사찰
찰은 ‘사원이 관리하는 임야’를 조선말까지도 소유하고 있었다. 주권을 잃은 병탄 이후에 사원이 관리하는 임야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 답은 일제강점기에 진행된 산림 소유권의 형성 과정에서 찾을 수 있다.삼림법과 임적조사 통해산림소유자 대략적 파악‘조선임야조사령’ 마련해연고제시하면 소유 인정숲 소유권 확보위한 노력송광사의 ‘산림부’서 확인산림 소유권의 형성과정을 살펴보는 일은 우리나라 최초로 제정된 ‘삼림법’(1908년)에서 시작하는 것이 옳은 순서다. 통감부 통치시기에 제정된 삼림법은 산림을 제실림(帝室林), 국유림, 공유림,
조선시대 말기(1910년)의 사찰 숲은 어떤 상황이었을까? 아쉽게도 각 지방의 사찰들이 어떤 숲을 얼마나 소유하고 있었는지 알 수 없다. ‘조계산송광사사고 산림부’와 같은 기록들이 여타 사찰에서도 전해졌으면 그 당시의 상황을 조금이라도 유추할 수 있겠지만, 현재까지 그와 유사한 자료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조선 말기 1,300여 개소의 사찰이 관리(또는 소유)했던 숲의 상황을 확인할 방법은 없다.1912년 일제총독부 남긴‘조선임야분포도’서 확인사찰숲 위치와 영역 표기사찰의 산림 소유권 확인황폐해진 사원 소유 산림유림이 사찰숲
조선시대 사찰의 산림 소유는 크게 3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국가(왕실)가 사찰에 하사한 땔감숲, 왕실의 태실과 능침수호를 위해 사찰(원당)이 수호한 봉산, 왕실 의례용 임산물의 생산을 위해 사찰(원당)이 직접 관리한 율목봉산과 향탄봉산이 그 유형이라 할 수 있다.조선, 산지소유 불인정무수한 산림소송 남발매매문서·송사 기록에서사찰, 산림소유 확인가능순천 송광사·선암사 분쟁산림소유분쟁 중요한 기록조선 조정(왕실)은 형성 유래가 각기 다른 이들 산림을 사찰 소유로 인정했을까? 사찰은 국가가 하사한 이들 사패지(시지와 봉산)를 사유
조선 조정의 산림시책은 주로 소나무재와 땔감의 원활한 조달에 초점을 맞추었다. 건축재와 조선재로 쓸 소나무 조달용 산림시책은 송목금벌(松木禁伐)로 통칭되는 소나무 행정[松政]이었다. 연료조달 시책은 조정의 각 관사에 쓸 관용 땔감은 관용시장(官用柴場)에서, 각 능원용 땔감은 향탄산에서 조달되게끔 분리하여 시행했다.왕실능원 땔감 조달 위해사찰숲 향탄봉산으로 지정경기 일원 몰려 있다가 조선후기 남부지방 집중사찰이 지정을 요청하고산림관리까지 직접 맡아산림황폐의 비극상황에서양반 수탈 피할 유일 대안조선 조정은 능원의 향탄산을 대부분 경기
조선시대의 사찰은 국가의 산림을 다양한 방식으로 관리했다. 사찰이 조선 왕조의 능역과 태실 주변의 산림을 직접 수호한 사례(법보신문 1288호 참조)는 보호 중심의 산림관리였다. 반면 사찰이 왕실의 의례용 임산물을 직접 공급한 사례는 생산 중심의 산림관리였다. 왕실의 의례용 임산물은 황장(黃腸)과 국용주재(國用主材)와 향탄(香炭)을 말한다. 황장은 왕족의 관곽재(棺槨材)로 이용된 몸통 속이 누른 소나무이며, 국용주재란 국가와 공신과 재신(宰臣), 향교의 위판(位版)에 사용된 밤나무재(材)이고, 향탄은 각 능(陵)·원(園)·묘(墓)의
1300년 전 진여원의 땔감숲(32ha)은 어떻게 오늘날의 월정사 사찰림(5782ha)으로 확대되었을까? 월정사 사찰림에 얽힌 이런 저런 이야기들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지만, 그 정확한 유래를 밝힌 기록은 없다. ‘자객으로부터 세조를 구한 고양이를 위해 사방 80리의 토지를 상원사에 하사했다’는 유래 또한 분명한 기록이 없기는 마찬가지다.사찰에 땔감 숲 제공 전통신라에서 조선까지 이어져조선, 억불정책에도 불구원찰을 늘리고 산림도 제공임진왜란 후 산림 파괴되자왕실, 사찰숲 봉산지정 보호사찰림과 달리 사원전에 대한 기록은 다수 존재한다
건봉사(乾鳳寺) 재금강산남(在金剛山南), 해인사 재가야산(在伽倻山), 전등사 재길상산(在吉祥山), 조선 초(15세기 후반)에 간행된 ‘동국여지승람’의 지역별 불우(佛宇: 사찰)항목에는 하나 같이 사찰의 소재지를 ‘在OO山’과 같이 산을 중심으로 밝히고 있다. 신라 최초의 가람 흥륜사는 도읍의 숲(천경림)에서 시작되었는데, 어떻게 가람이 산중으로 갔을까?산지가람이 본격 도입된나말여초에 사찰림 시작선종 도입·풍수지리설도사찰림 형성에 큰 영향삼국유사에 진여원 기록국가 내린 사패지서 비롯학계에서는 시대에 따라 사찰의 창건 장소가 도읍(삼국
이 땅에 사찰 숲은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사찰림의 기원에 얽힌 해답의 실마리는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천경림(天鏡林)과 신유림(神遊林)으로 풀 수 있다. ‘삼국유사’ 권3 흥법3 아도기라(阿道基羅)에는 천경림과 신유림을 경주에 있던 전불(前佛)시대 7곳의 가람터(七處伽藍之虛) 중 첫 번째와 여섯 번째 절터로 언급하고 있다. 바로 ‘숲이 사찰’이었음을 나타내는 대목이다.신라에 불교가 전래되면서아란야 용어 이땅에 도입삼국유사 천경림·신유림을전불시대의 가람터로 언급불교의 원활한 정착 도우려는종교적 목적으로 해석 가능신유림에 건립된
룸비니 동산, ‘금강경’의 무대 기원정사(祇園精舍, 일명 제타와나·Jetavana), 최초의 정사인 죽림정사(竹林精舍, 일명 에누와나·Venuvana), 최초로 설법한 녹야원(鹿野園). 공통점은 무엇일까? 불자들이야 망설임 없이 불교성지라고 답하겠지만, 이들 성지의 공통점은 숲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들 성지의 지명을 동산(園), 림(林), 원(園)이 들어가게끔 의역한 이유는 이들 성지가 숲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교는 숲의 종교’라는 명제를 얻었다. 대장경과 ‘본생경’을 비롯한 여러 경전에는 석가모니의 생애와 함께 한 60여
사찰하면 곧 숲이다. 불교를 숲의 종교라 일컫는 이유도 숲이 없는 사찰을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숲이 조계종 1년 예산의 22.5배나 되는 1조800억원의 가치를 매년 창출하고 있음을 아는 이가 얼마나 될까? 평생 1~2억원의 목돈조차 쉽게 손에 쥘 수 없는 세태에, 1조원이라는 거액의 크기를 가늠하기란 쉽지 않다. 조계종의 1년 예산이 480억원이고, 올해 확정된 나라의 예산이 376조원임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조계종 총무원 1년 예산 22.5배59곳 사찰이 100만평 숲 보유산림청, 20년 전부터 가치주목수백억 들여 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