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적인 생각은 그 어떤 어려운 일도 능히 이룰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떻게 행동으로 옮기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인생이 달라진다. 그 좋은 예가 여기에 있다. 1950년대에 있었던 일이다. 영국의 컨테이너 운반선 한 척이 화물을 내리기위해 스코틀랜드의 한 항구에 닻을 내렸다. 포르투갈 산(産) 마디라 포도주를 운반하는 배였다. 한 선원이 모든 짐이 다 내려졌는지 확인하려고 냉동컨테이너 안으로 들어갔는데 그때 그가 안에 있는 것을 모르는 다른 선원이 밖에서 냉동실 문을 닫아 버렸다. 선원은 있는 힘을 다해 벽을 두드렸지만 아무도 그 소리를 듣지 못했고 배는 포르투갈을 향해 떠나고 말았다. 냉동실 안에는 식량이 충분히 남아 있었다. 그러나 선원은 자기가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의식하는 마음’과 ‘창조하는 마음’은 상호 깊은 관계에 놓여 있다. 회사로 치자면 ‘의식하는 마음’은 공장에 관련된 모든 일을 기획하고 제품을 생산하는 것에 관련된 비용과 그 운반 및 판매 등에 대하여 계획 지시하는 사장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창조하는 마음’은 사장이 지시하는 일을 심사숙고하여 직접적으로 제품을 만드는 공장장이나 이를 판매하는 영업부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의식하는 마음’이 어떤 생각을 지니게 되면, 그 의식의 지시를 받아 행동으로 옮겨 실현가능하도록 처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의식하는 마음이 ‘기분이 좋지 않다든가 나이를 너무 먹어버렸다든가 업무에 대한 지시를 제대로 내리지 못한다든가 소극적인 자세를 지닌다든가’ 해서는 ‘창조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이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세상은 사계처럼 무상하게 변화한다. 만약 자연의 순환이 없었다면, 온전히 한 생을 다 보낼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조금만 추워도 춥다고 하고, 조금만 더워도 덥다고 투덜거린다. 이와 같이 우리는 일상의 작은 변화에도 어쩔 줄을 모른다. 이는 바로 중생심(衆生心)탓인데 고통이 있으면서도 그 고통이 들어오는 문을 제대로 모르기 때문이다. 고통의 문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바로 우리의 주인공인 ‘마음’에 있다. 누구나 제대로 이 마음의 문을 열고 닫는다면 일일시호일(一日是好日)이 되어 행복의 지름길로 갈 수 있지만 정신없이 바쁜 세상을 살다 보면, 자신이 가진 마음의 문을 제대로 열고 닫을 수가 없게 된다. 일찍이 원효 스님은 중생의 마음을 두고 ‘미혹의 세계도 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