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슈미르 간다라 답사여행을 시작한 이래 절(승원) 같은 절, 탑(스투파) 같은 탑을 처음 본 것은 탁실라에서였다. 스리나가르 인근 파리하스포라나 하르완, 바라물라에도 불교승원과 스투파의 유적이 있었지만, 그곳이 절이고 탑이라 하니 그런 줄 알았지 불교건축 문외한의 눈으로 거기서 절과 탑의 모습을 상상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기단만이 남은 파리하스포라의 스투파는 비록 크기에 차이가 있을지라도 아반티포라 힌두사원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게다가 거기서는 불적임을 바로 알 수 있는 불상이나 보살상과 같은 존상도 전혀 남아있지 않
탁실라의 옛 이름 ‘탁샤쉬라’는 ‘자른 돌’ ‘쪼갠 돌’(takṣa-śilā)이라는 뜻에서 유래하며 그래서 세석(細石) 혹은 석실(石室)로 한역하기도 하지만, ‘잘려진 머리’(takṣa-śiras) 즉 절두(截頭)의 뜻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절두’는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본생담)에서 유래한 것이다. 혹은 어느 시기 불교도들이 ‘절두’라는 뜻의 탁샤쉬라를 부처님 본생담의 무대로 생각하였는지도 모르겠다.탁실라의 옛 이름 탁샤쉬라는‘자른 돌’ ‘쪼갠 돌’ 뜻에서 유래‘잘려진 머리’ 뜻한
불타께서 마가다국으로 유행하다 라자그라하에 이르러 박가바라는 도공의 집에 머물게 되었다. 도공의 집에는 이미 푹쿠사티(Pukkusāti, 弗迦羅娑利)라는 비구가 먼저 와 머물고 있었다.카니쉬카 왕이 간다라 수도를푸루샤푸르로 옮기고 가람과대탑조성·성전결집 적극 후원간다라 미술은 카니쉬카에서후비쉬카 이르는 시기 최고조힌두문화·헬레니즘 문화 융합된간다라 미술이 발전했던 지역발굴된 불상들에서 잘 나타나오늘날엔 겨우 인구 15만 정도라왈핀디 7개 구 중 하나일 뿐세존께서 말하였다.“비구여! 만약 그대가 불편하지 않다면 나도 이 공방
세친은 ‘구사론’의 부록 격인 제9장 ‘유아론 비판(破我品)’에서 “자아가 다만 5온에 근거하여 가설된 개념일 뿐이라면 어째서 불타는 ‘자아는 바로 육신(色) 등’이라 말하지 않은 것인가”라는 독자부의 물음에 대해 ‘밀린다팡하’(한역은 ‘나선비구경’)에서의 밀린다 왕과 나가세나 장로(나선 비구) 사이의 문답을 인용한다.오늘날 파키스탄 시알코트가박트리아 왕국의 수도 샤카라밀린다팡하, 즉 나선비구경 속밀린다왕과 나가세나 장로가‘자아’ 등 문답 나눴던 장소불교 자취 없고, 20㎞ 변방서본 대양이 경전 속 해변 추정“대덕이시여! 묻고 싶은
불사 혹은 감로(amrit)의 도시, 암리차르. 오늘 날 이곳 암리차르는 황금사원으로 유명한 시크교 최대 성지이기도 하고, 가까이는 1919년 4월 영국군에 의해 10여 분 동안 1500여 명이 살상된 비극의 땅이기도 하다.(그곳에 추모공원 잘리안왈라바그가 있다.) 터번에 수염을 기르고 칼을 찬 모습으로 표상되는 시크교는 구루(스승) 나나크(Nānak, 1469∼1539)를 개조로 하는, 말하자면 유일신교적 힌두교라고 할 수 있다.(‘시크’는 제자의 뜻) 그들에게 있어 최고의 진실은 인간의 해탈이 아니라 유일 절대의
계획된 일정이 있으니 아쉬움이 있어도 이제 카슈미르를 떠나야 한다. 우라샤(오늘날 파키스탄 동부 하자르 지방)에서 피르판잘 산맥을 넘는 서쪽 관문(바라물라)을 통해 카슈미르에 들어온 현장법사의 다음 행선지는 탁카국의 샤카라(오늘날 파키스탄의 시알코트)로, 그는 파르노차(푼치)와 라자오리(라자푸라)를 거쳐 그곳에 이르고 있다.아크누르 암바란 불교유적지는영국미술사학자에 의해 알려져1999∼2001년 사이 두 차례 발굴쿠샨 이전부터 굽타 이후 시대에걸친 네 시기의 유물과 유구 확인중현이 세친과 대론 펼치기 위해가는 길에 머물렀을
세친의 ‘구사론’을 비판하고 유부의 정의(正義)를 밝힌 중현(Saṃghabhadra)에 대한 평가는 전승마다 다르다. 티베트의 불교사에서는 세친에게 유부 비바사를 비롯한 18부파의 삼장과 6파의 외도서와 인명 등을 가르친 스승이라 하였고, 진제(眞諦)는 세친에게 논파당한 바라문 문법학자의 청에 따라 아요디아에서 ‘순정리론’을 저술하였다고 전한 반면, 현장(玄奘) 계통에서는 아마도 세친 문도들에 의해 생산되었을 매우 악의적인 전설을 전하고 있다.‘순정리론’ 지은 곳 아반티포라불적 없이 비쉬누·시바 사원만박물관조
파리하스포라는 스리나가르에서 바라물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다. 바라물라는 적어도 1947년 10월26일 카슈미르의 마하라자(왕)에 의해 인도연방에 편입되기 전까지 오랫동안 라왈핀디-머리-무자파라바티에서 카슈미르 계곡으로 들어오는 서쪽 관문이었다. ‘서역기’에 의하면 카니시카 왕은 불교성전의 결집을 마치고 간다라로 돌아가면서 이 서쪽 관문에서 동쪽(카슈미르)을 향해 꿇어앉아 이 나라를 승도(僧徒)들에게 보시하였다.왕의 외숙이 찾아와서 영접후쉬카라 승원서 첫 밤 묵고스리나가르서 왕 환대 받아70 노령의 승칭 법사에게서오전 ‘구사론’,
무슨 이유 때문이었는지 10여년 전 택시를 대절하여 타고 갔음에도 파리하스포라의 불교승원 유적지까지 3시간 넘게 걸렸었다. 가는 길에 점심도 먹어야 했다. 이제 생각하면 점심을 먹은 곳이 파탄이었으니, 스리나가르에서 굴마르그를 거쳐 파탄으로 돌아 온 것이었다. 왜 돌아서 왔는지, 당시 수없이 검문을 받았는데, 이곳으로 바로 오는 도로가 폐쇄되었기 때문인지, 혹은 안내인에게 속은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그러나 시간에 관계없이 하루치 요금을 지불하기로 하였으니 길을 속일 이유는 없었다.)스리나가르서 25㎞ 떨어진그곳에 현재까지 남아 있
하르완을 찾아가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았다. 카슈미르에 도착한 당일 바로 투어리스트 센터로 가 스리나가르 관광지도를 얻고 오토릭샤를 타고 하르완 불교유적지에 가자고 하는 것으로 해결되었다.하르완 불교 승원터는 1923년판디트 람 찬드라 카크가 발굴용수도 머물렀던 곳으로 추정카니시카왕이 편찬된 성전을적동판에 새기고 석함에 넣어스투파 안치, 약차신 지키게 해이 결집은 비바사사에 의해서확립된 불교학의 새로운 출발그런데 지도 뒷면의 카슈미르 관광명소 안내 중 하르완의 설명에서는 10여년 전에 보았던 것과 달리 제4 결집지라는 말이 없었다.
카슈미르…. 과거에는 카시미론 담요로, 십여 년 전에는 캐시미어 스웨터나 숄로 그 이름을 알린 카슈미르, 혹은 영국의 록밴드 레드 제플린이 “태양이 내 얼굴에 부딪히고 별들이 내 꿈을 채우는 곳, 샹그릴라와 같은 그곳으로 당신을 데려가게 해 달라”고 노래 불렀던 그 ‘카슈미르’. 인도·파키스탄 사이에 몇 차례의 전쟁이 일어났고 지금도 여전히 긴장이 팽팽한 국제 분쟁지역 중의 한 곳인 카슈미르.해발 2000미터 고원에 위치어디서든 3000미터 이상 고개넘어야 비로소 갈 수 있는 곳첫 개교 때 500가람 있었고현장법사 방문
불타는 북천축(웃디야나)의 아파랄라 용왕을 교화하고 중천축으로 돌아가던 중 녹색의 숲으로 빛나는 카슈미르에 이르러 예언하였다. “저곳은 비파샤나를 따르는 자들의 제일가는 처소로, 내가 열반에 들고 백년이 지난 뒤 한 비구제자가 저 땅에 정법을 전하게 될 것이다.”(‘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카슈미르는 선정 제일처제4차 결집 이루어진 곳동아시아 불교의 고향간다라는 무착·세친 등 배출불교 논사들의 고향으로 칭명구법승들의 여행기 길잡이로불적과 논사들 발자취 순례예언의 비구제자는 마드얀티카(Madhyantika, 末田地)였다. 아난다는 그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