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연재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선은 스승과 제자 사이의 묵계에 의해 전수되었다. 영취산에서 세존이 설법하면서 연꽃 한 송이를 들어보이자 가섭만이 미소로 화답했듯이 보리달마의 선법은 언어의 길이 아니라 언어 밖의 길을 통해 이어졌다.불립문자 전통 무색할만큼엄청난 양의 문헌 쏟아내게송 단독으로 유통되면서중국의 송찬 창작에 영향당에서 송대에 이르기까지문인들 선시 창작에 매진은유와 역설 담긴 선시는선의 정신을 언어로 관통그런데 보리달마로부터 4조 도신에 이르기까지 소규모의 신흥종교집단에 지나지 않았던 선종이 5조 홍인에 이르면 제법 규모가
선종은 ‘이심전심(以心傳心)’, 즉 스승과 제자가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는 묵계(黙契)의 종교이다. 이른바 ‘불립문자’라는 선종의 모토는 선의 목적이 문자를 벗어나 언어로서 표현할 수 없는 청정한 자성을 깨우치는 데 있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선적인 깨달음은 사람들이 각자 자증자오(自證自悟)를 통해 얻는 것이기 때문에 스승은 일깨워줄 수만 있지 가르쳐줄 수는 없다. 그러므로 스승과 제자는 묵계에 의지해야 하지 언설에 의지할 수 없다.선종 언어 일반적 언어와 달라언어 벗어난 이치 언어로 설명모순되고 불합리한 언어 사용고함
나무 둥지에 웅크리고 앉은 선사와 그 앞에 관복을 입고 합장하고 있는 벼슬아치를 그린 이 장면은 한국 사찰벽화에서도 자주 만날 수 있는 그림으로, 남송대 화가 양해(梁楷)가 그린 ‘백거이가 합장하며 여쭙자 조과 선사가 말씀하시다(白居易拱謁, 鳥窠指說)’이다.위험한 나무 위 정좌한 선사공손히 머리 숙인 고관 모습당 말기 지식인의 삶 드러내유가적 정치개혁 꿈과 기개투쟁·모함 난무 정치에 꺾여스님들 교류하며 함께 결사스스로를 ‘향산거사’라 불러밖으로는 유가로 몸을 닦고안으로 불교로 마음 다스려양해는 그 특유의 감필법으로 나무
두보는 왕유보다 11살 어렸지만 그들이 살았던 시대는 무척 달랐다. 왕유가 활동하던 시기는 당나라가 가장 번성했던 시기로, 그 역시 안사의 난을 겪었지만 태평성세의 관료로서 풍족하고 안정적인 삶을 유지했다. 반면, 두보가 활동을 시작한 시기는 안사의 난으로 나라 전체가 극심한 혼란에 빠진 때였다. 곤궁한 시대의 시인은 백성들의 고통을 그 누구보다 민감하게 느끼며 나라의 장래를 걱정했다.평생동안 벼슬 구했으나뜻한 바를 이루지 못하고평생 동안 곤궁하게 살아신심 깊은 고모 영향으로불교에 상당한 조예 보여시에 원각경·능엄경 등장유가적 인물
왕유의 시는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무엇보다 그의 산수시이다. 자연경물은 수많은 시의 소재지만 앞서 설명한 것처럼 중국에서 시는 도덕적 교화를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자연경물도 일종의 우의(寓意, 다른 사물에 빗대어 비유적인 뜻을 나타내거나 풍자함)로 사용되었다. 사슴의 무리가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장면을 묘사한 ‘시경’의 저 유명한 시구, “유유녹명(呦呦鹿鳴)”은 신하에게 어진 임금이 연회를 베푸는 것을 비유하듯이 자연은 인간이 본받아야 할 도덕적 가르침을 우회적으로 표
중국문화에서 시(詩)는 삼경(三經) 또는 오경(五經)의 하나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시는 중국문명의 근본을 제시하는 동시에 독서인이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소양이며, 나아가 ‘다스림’, 곧 왕의 교화(敎化)를 실현하는 가장 탁월한 수단으로서 간주되어 왔다. 공자 역시 뜰을 거닐다가 만난 아들에게 시를 읽지 않으면 담장을 마주하고 있는 것 같다고 꾸지람을 할 정도로 시를 소중하게 여겼다. 시에 대한 이런 태도는 다른 문명권에서 찾아볼 수 없는 중국문화의 독특한 특징 중 하나로서, 예술이 인간의 삶과 사고에 미치는 영향력을 일
왕유(王維, 699~759)는 이백(李白, 701~762), 두보(杜補, 712~770)와 어깨를 견줄 만한 당시(唐詩)의 대가로, 독실한 불교신자인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시불(詩佛)”이라고 불렸다. 잘 알려진 것처럼 그의 호, “마힐(摩詰)”은 ‘유마경’의 주인공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불교, 특히 선종이 그의 삶과 예술세계에 끼친 영향은 매우 깊다. 불심 깊은 어머니의 영향어려서 시불(詩佛)로 통해쇠락한 명문귀족의 후예로뛰어난 재능에도 주변배회말년까지 관료생활 했지만고향에 원림 짓고 구도행귀족원림, 오락유희 공간사대부원림
천안문 광장에 가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수많은 군중 속에서 자신의 존재가 한없이 작아지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그럴수록 자신의 존재를 느끼고자 하는 열망이 강해짐도. 상고시대부터 관계와 치수를 위해 대규모 인력을 동원했던 중국에서 사람은 가장 중요한 자원이자 동시에 지천으로 넘쳐나는 자원이었다. 하지만 다른 고대문명이 대규모의 인력을 동원하여 죽음 이후의 세계나 초월적 신을 위한 전당을 만드는데 전력을 쏟았을 때, 중국인들은 현실에서 살아가는 문제에 천착했다. 유가의 “경세치용”은 물론이고 “무위자연”을 꿈꾸는 노장사상마저도 중국
‘계산행려도’는 세로 2m, 가로 1m에 달하는 거대한 그림으로, 이처럼 거대한 크기의 그림을 “대관산수화”라고 한다. 이 장르에 탁월한 작품을 남긴 화가로 범관을 비롯하여 이성, 곽희 등 북송 초기 화가들이 있다. ‘계산행려도’라는 이름은 명대 유명한 서화가이자 감식가인 동기창이 붙인 이름으로 그림 위쪽 배접 부분에 그가 쓴 글을 통해 알 수 있다.범관, 바른 산의 덕을 그려내윤리적·실천적 주관성 밝혀인간 없는 산수화 존재 안해마음이 체득한 경지의 표현산수 오르는 것은 구도 과정삶의 현실이며 일상의 경계같은 산의 길을 함께 걸어도
안사의 난 이후, 당 왕조 몰락의 징후를 예민하게 느꼈던 지식인들이 있었다. 한유(韓愈, 768~824)도 그들 중 한 사람이다. 그는 그것을 한 왕조의 몰락이 아니라 중국문명의 위기로 이해했으며, 그 근본적인 원인이 ‘요순 등 선왕의 도가 소실된 것’에 있다고 진단했다. 한유는 선왕이 하늘과 땅의 이치를 본받아 인간세계에 구현했다는 기존의 관념을 믿지 않았으며 하늘과 땅이 조화롭지 못하다고 불평했다.사대부, 지방으로 좌천되면그 지역 대표 지식인이었던고승대덕과 담론과 시 나눠승려 중 왕족·권문세족 많아존숭하는 사회분위기도 영향당대
‘명황행촉도(明皇幸蜀圖)’라고 불리는 이 그림은 당대 화가 이소도(李昭道)의 작품을 모사한 것으로 북송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짐작된다. 이소도는 아버지 이사훈(李思訓)과 더불어 산수화의 효시를 연 인물이다. 중국 산수화는 수묵산수가 널리 알려져 있지만 원래 채색화였다. 이장군 부자가 창안한 ‘금벽(金碧)산수’는 광물질 안료 석록과 석청, 주사로 그림을 그리고 그 위에 부분적으로 금니를 덧발라 화려하면서도 맑은 느낌을 준다. 동양종교는 서양종교와 달라절대자나 인격신 존재 안해유교는 현실적인 삶에 초점불교·노장, 초월적 세계 관심불교에서
미학은 18세기에 비로소 성립된 학문으로, 감성과 예술작품, 그리고 미적 가치를 탐구하는 철학의 한 분과이다. 미학이 이처럼 뒤늦게 학문으로서 출발했다는 사실은 감성이 근대 이전에는 진지한 학문의 대상으로 취급받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사실 감성은 서양뿐 아니라 동양에서도 진리 추구와 무관하거나 심지어 방해가 되는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격외도리(格外道理)”를 주장하는 선종의 감성적 성격을 규명하려는 시도들 역시 애당초 선(禪)과 어울리지 않는, 아니 그 본질에서 한참 벗어난 것이 아닐 수 없다.미학은 18세기 성립된 학문격외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