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에 가보면 크고 작은 다양한 불상을 수없이 접할 수 있다. 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극히 작은 불상으로부터 수 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불상에 이르기까지 불상은 실로 매우 다양한 크기로 만들어졌다. 이 상들의 크기는 만들어질 당시에 어떻게 정해졌을까? 물론 예술작품을 창작하는 경우라면 예술가 마음이겠고, 주문생산인 경우라면 주문자의 경제적 형편에 따라 크게도, 혹은 작게도 만들어졌을 것이다.황복사지 탑서 발견한 불상 중입상은 14.4㎝, 좌상은 12.2㎝전통적 단위 척 30㎝-치 3㎝를기준할 때 발원문의 6치와 달라주나라 1척 20
지난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개최되었던 ‘불상, 간다라에서 서라벌까지’ 특별전에서 유독 관람객의 관심을 받았던 작품을 꼽으라고 한다면 아마도 경북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거대한 석조반가사유상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국보 78호와 83호 반가상이 나란히 함께 전시된 것도 화제였지만, 이들 두 국보 반가상은 원래부터 유명한 것이었다. 이에 반해 석조반가상은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 않았었는데 상반신이 없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그 크기, 그리고 돌을 마치 흙을 빚어낸 듯 부드럽고 섬세하게 조각해낸 뛰어난 기량에 많은 분들이 감동을 받았다.
불상이 가사를 걸치는 방법에는 크게 통견식과 편단우견식의 두 형식이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통견은 양쪽 어깨가 모두 가사로 덮여 있기에 나온 말이고, 편단우견이란 가사를 왼쪽 어깨에만 걸치고 오른쪽 어깨는 노출시킨다는 의미이다. 편단우견의 대표적인 불상은 석굴암 본존불상인데, 특히 항마촉지인을 결한 불상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황룡사지·영주 숙수사지 비롯해단석산 신선사의 마애부조까지경주 중심 신라 영토였던 곳서편단우견 불상 집중적으로 발견삼국 중 신라는 바닷길을 통해인도 아쇼카왕 세우려던 장육상조성 계획 이어 받아 황룡사
분황사는 수학여행의 상징이다. 불국사, 석굴암과 더불어 수학여행지로 널리 알려져 있기에 많은 사람들에게 친숙한 공간이다. 오히려 접근성에 있어서는 불국사, 석굴암보다 뛰어나지만 실은 그만한 무게로 다가오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그들처럼 다양한 볼거리가 마련되어 있지 않기에 당연한 결과이기도 하다. 하지만 과거 신라인들에게 있어 분황사가 차지하는 비중은 남쪽으로 길 건너 바로 있는 황룡사와 함께 과거불의 일곱 설법처 중의 하나로서 막중한 것이었다.돌을 벽돌모양으로 깎아 세운모전탑은 신라 최초 석탑 추정현재 3층만 남아 있을 뿐이
국립경주박물관의 대표 유물 중 하나인 삼화령 미륵삼존불은 특히 협시보살이 귀엽고 예쁘기로 유명하다. 한국을 대표하는 해외전시에 협시보살상 중 한분만 별도로 모셔다 단골로 출품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만큼 신라, 나아가 우리나라 불심의 얼굴을 대표하는 상이라 할만하다. 이들 보살상이 귀여워 보이는 이유는 흔히 동형(童形) 비례, 즉 어린 아이와 같은 비례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어린 아이들의 비례가 인체에 비해 머리가 큰 것에 빗대어 설명한 것이다.본존불은 경주 남산 장창곡의고분석실처럼 생긴 곳서 출토보살상은 산 아래 마을서
고구려의 거장 담징이라는 이름은 우리에게 매우 친숙하다. 특히 1955년 발표된 정한숙의 소설 ‘금당벽화’를 교과서에서 읽은 세대에게는 더더욱 익숙한 이름이다. 이 이름은 또한 우리나라가 고대 일본문화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에 대한 상징과도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지난 글에서 살펴본 도리불사나 혹은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양지 스님보다도 훨씬 대중적인 아이콘이 바로 담징이다. 그가 호류지 금당의 벽화를 그렸다는 사실은 우리에겐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런데 뜻밖에도 도리불사나 양지는 문헌상으로나 유물로나 어느 정도 분명한
일본 나라(奈良)의 고찰 중에서 호류지(法隆寺)는 특히 우리에게 친숙한 사찰이다. 아무래도 백제장인으로 전해지는 도리불사(止利佛師)의 불상과 고구려 화가 담징(曇徵)이 그렸다는 벽화, 그리고 ‘구다라관음’이라 불리는 백제관음상이 있기 때문에 더더욱 관심이 갈 수 밖에 없다. 그 중에서 지난 회에 다룬 아스카데라의 거대한 장육불상을 제작한 구라츠쿠리노도리, 즉 도리불사가 제작한 금동석가삼존상은 일본 학계에서도 복잡한 의문이 뒤엉킨 대표적인 문제작 중 하나이다.670년 화재로 전소된 사찰에623년 조성 석가삼존상 존재호류지 옆 제3절터
일본 아스카의 안고인(安居院)은 ‘아스카데라’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데, 이 절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로서 원래는 호코지(法興寺)라는 이름으로 596년에 창건되었다. 이 절을 세운 사람은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라는 당시의 대신으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쇼토쿠 태자(聖德太子)를 도와 친백제 정책 및 불교 중흥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실제 호코지의 창건에도 백제의 기술이 깊숙이 관여하였음을 ‘일본서기’를 통해 알 수 있다. 이에 의하면 588년 백제의 위덕왕은 불사리(佛舍利)와 함께 혜총(慧聰)을 비롯한 여섯 명의 승려
단석산은 경주시 건천읍 송선리에 위치하며 경주 중심지에서 보자면 서남쪽에 위치한다. 흔히 경주의 오악이라고 하면 북쪽은 소금강산, 동쪽은 토함산, 남쪽은 남산, 서쪽은 가까이로는 선도산, 멀리로는 이 단석산을 가리킨다.명문에 ‘미륵석상 1구 두 보살’미륵불과 협시보살 개념 조성지장·관음보살이 일반적 시각명문 속 ‘두 보살’ 놓고 해석 분분절벽에 새긴 4구 중 둘이란 견해절벽 하단 새겨진 두 공양자 지칭대불 주변의 마애존상을 보살로보는 해석까지 다양한 주장 제기단석, 즉 “돌을 자르다”라는 이름은 이 산 정상부에 반으로 갈라진 바위가
서산 마애불은 충남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인근에는 보원사지라고 하는 거대한 규모의 절터가 있어 유명하다. 서산마애불은 이 보원사지를 발굴하던 연구자들의 주변 탐방 끝에 1958년 발견되어 학계에 소개된 이력을 지니고 있다. 보원사지는 백제시대에 창건되어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운영된 사찰로 추정되며, 통일신라~고려시대에 선종, 혹은 화엄종 계통의 사찰로 전성기를 누렸다. 특히 국립중앙박물관 불교조각실에 전시중인 두 구의 고려시대 대형 철불좌상 중 한 구가 일제강점기에 이곳에서 옮겨온 것으로 전하고 있어, 매우 중요
충남 서산군 태안면 동문리 백화산 기슭에 자리잡은 태안마애삼존불은 백제의 화려했던 불교문화를 대변하는 조각임과 동시에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도상을 하고 있어 많은 주목을 받아왔다. 흔히 문화적으로는 삼국 중에 백제가 가장 우수했었다고 이야기되지만, 망한 나라인 백제의 흔적은 철저히 파괴되어 이를 두 눈으로 확인하기란 매우 어렵다. 그런 가운데 예산 화전리의 사면불상, 서산군 운산면의 마애삼존불상, 그리고 이 태안마애삼존불상은 돌을 깎아 만들었기 때문에 그러한 망국의 재난을 당하지 않고 살아남은 귀중한 작품들이다.가
학문에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이다. 국내의 박물관 전시는 대부분 관람객들에게 어떤 답을 보여주고 싶어 하지만, 해외 전시를 보면 종종 답보다는 궁금증을 유발시키는 것도 훌륭한 목표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집트 파라오의 미라나 스톤헨지의 건설 목적, 진시황 병마용의 비밀 같은 것은 단순한 이야기 거리를 넘어 호기심을 유발시키고, 상상력을 자극하며 사람들의 관심을 촉발시킨다. 어쩌면 잘 정리된 답을 제공해주는 한국미술사 관련 전시는 관람객들에게 한국미술이란 그저 그렇고 그런 뻔한 이야기로 인식될 뿐인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