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조국사 지눌은 매우 어려운 시기에 살았다. 정치·군사적으로 나라는 혼란했고, 요승·권승은 수행보다 권력과 금력, 심지어는 세속적인 쾌락에 더 많은 흥미를 느껴 날뛰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일반신도는 아는 것도 없이 덮어 놓고 절에 가 엎드려 절이나 하고, 염불하면 복을 받고 극락에 가는 줄 아는 실정이었다. 도대체 사람이 자기 마음과 행실을 바르게 하지 않고도 일이 잘되고 살림이 좋아지는 법이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자기 마음 바르지 않고행실이 올곧지 못 한데살림 좋아지는 법 없어불교가 국교나 다름없는 시대
호국불교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가 있음을 반성하고 비판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선, 호국이라 할 때 ‘국’이 지칭하는 대상은 ‘국왕’도 포함되고, ‘국토’나 ‘국민’도 포함될 수 있다. 광범위하게는 ‘국가’도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런데 한국불교의 호국이 구체적으로 어느 것을 지칭했는지 분명치 않다. 국왕·국토·국민·국가 등 전부를 포함한다고 하는 학설도 있으나 신라, 고려, 조선조의 불교사를 훑어보면 호국이 주로 호왕으로 치우친 경향이 짙다.45년간 중생 교화한 부처님수행과 더불어 포교 강조해인류 위해 힘써야 하는 이유그런데
오늘을 사는 종교라면 오늘의 시간을 호흡하며 오늘을 생각해야한다. 그리고 오늘을 사는 인류의 문제와 대결해야하는 것이 오늘의 종교다. 그런데 오늘의 불교는 어쩐지 오늘의 문제보다는 어제의 문제, 더 거슬러 올라가서는 지난 과거의 문제에 더 깊은 관심을 쏟고 있는 것 같다. 어제의 문제에 더 깊은 관심을 쏟고 있다면 그 종교는 오늘의 시간에 사는 것 같이 보이지만, 실은 어제의 시간에 사는 유물적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원시교단서도 계율로써 규제불교가 정치권력과 밀착 땐교단도 함께 부패될 수 있어어제를 사는 불교는 어제의 사회와 인간
1910년 불교계 최초의 잡지인 ‘원종’이 발간된 이후 수많은 불교 잡지와 신문이 있었다. 여기에는 지금 읽어도 손색이 없는 명문장 명칼럼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법보신문에서는 선지식들의 주옥같은 글들을 선별해 매주 연재한다. ‘불교계에 바란다’는 서경수 전 동국대 교수가 1980년 5월 ‘법륜’에 수록된 글로 3회에 걸쳐 소개한다. 편집자오늘의 시간을 살아가면서과거 영화에만 집착하는 건스스로의 가치 훼손하는 것집착을 악덕으로 규정하고, 집착으로부터의 해방을 주장하는 불교의 교리적 입장은 어떠한 이론도 받아들일 아량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