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짓날잉께 낮에사 훈훈했것지만 한밤중에는 을매나 썬득했것냐. 근디 느그 아부지가 딸이라는 것을 알고는 탯줄만 잘라 놓고 윗목으로 밀쳐 버리더라. 애기도 씻기고 산모한테 미역국도 끓여주고 그래야 헐 거 아니냐. 미역국은커녕 애가 죽든 말든 상관없다는 듯 팩 토라져서 등 돌리고 눕더니 꿈쩍도 안하더란 말이다. 나는 딸 낳은 죄로 아무 소리도 못했제...그때는 전기도 안 들어오던 때였다. 호롱불이라 잘 뵈지도 않는디 차가운 윗목에서 핏덩어리가 울도 않고 꼬무락거리고 놀고 있드라. 느그 아부지 몰래 내 옷을 덮어주었다.” 어머니는 종종 내가 태어나던 때를 얘기하셨다. 아들 형제를 낳은 후 아들 하나를 더 낳으려다 딸만 내리 다섯을 낳았는데 또 딸이었다. 산파도 없이 아버지 혼자 한밤중까지 기다리다 받은 딸이
나는 8남매 막내다. 한 어미 자식도 아롱이 다롱이라는 속담처럼 8남매 모두가 성격이 제각각이다. 참 신기하다. 분명히 같은 부모한테 태어났는데 우리 8남매는 모두 전혀 다른 개성을 가졌다. 지난 호에 호명보살의 예를 들면서 부모가 자식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자식이 부모를 선택해서 온다고 했다. 태어날 아이가 자신의 업에 맞는 부모를 찾아서 온다는 뜻이다. 그런데 부모라는 같은 조건에서 태어난 우리 8남매는 그 법칙이 전혀 적용되지 않는다. 우리는 돌연변이일까? 아니면 자식이 부모를 선택해서 온다는 진리가 틀린 것일까. 아니다. 부모라는 조건은 맞는데 그 조건이 변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 십 번 마음이 변한다. 너그러울 때는 온 세상의 희노애락을 다 받아들이지만 옹졸할 때는 바늘 하나 꽂을 틈이 없다.
▲이경윤, ‘낚시꾼’ 10폭화첩 중, 비단에 먹, 31.1×24.8cm, 고려대박물관. 남편이 은퇴했다. 대한민국 보통 직장인이 그러하듯 갑작스런 은퇴였다. 말이 좋아 은퇴지, 일방적인 해고였다. 아무런 준비 없이 해고당한 남편은 몹시 당황한 것 같았다. 지금까지 당연하게 생각했던 새벽 출근이 없어짐과 동시에 할 일도 없어졌다. 정해진 틀 안에서 정해진 자리에 앉아 정해진 일만 하던 생활이 갑자기 사라졌다. 대신 모든 일을 혼자 만들어서 혼자 해야 하는 전혀 새로운 삶 속에 내던져졌다. 완전히 다른 형식의 삶이었다. 넘치는 시간을 감당하기가 벅차보였다. 며칠 동안 이곳저곳 새로운 직장을 알아보더니 급하게 출근을 서둘렀다.
내 나이 오십. 노후를 걱정한다. 작년에 한 번 된통 아픈 뒤로는 더더욱 미래가 불안하다. 걱정은 은근하면서도 집요하다. 하나를 차단했는가하면 또 다른 걱정이 뒤를 잇는다. 불안의 요인은 수두룩하다. 백세를 바라본다는데 모아 둔 돈이 없으니 늘어난 수명 자체가 재앙이다. 빈곤한 미래. 자신 없는 건강. 아직 어린 두 아들...등 꼬리에 꼬리를 무는 걱정의 침략은 하루도 쉬지 않고 들이닥친다. 걱정에 대한 걱정으로 숨이 턱 막혀 걱정이 도착하기도 전에 쓰러질 것 같다. 워낙 닳고 닳은 물건이라 세월이 지나면 손에 익숙해질 줄 알았다. 그러나 걱정은 아무리 시간이 많이 자나도 결코 고물이 되는 법이 없다. 언제나 싱싱하게 전열을 갖추고 지치지 않는 전투력으로 나를 공격한다. 끝없이 밀려드는 걱정에 치여 기진
부처님의 가르침은 불자에게만 해당되는가. 불교를 모르거나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한정적인 진리’인가. 이런 의문은 불교의 기본 교리인 ‘연기법’만 봐도 곧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다’는 연기법은 불자나 불자가 아닌 사람이나 짐승이나 지옥의 중생까지도 적용되는 우주의 진리다. 불교는 그 진리를 가르쳐주는 종교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어떤 종교나 이념으로도 가둘 수 없고, 과거에나 미래에도 변하지 않는 만고의 진리다. 우주 속에 인드라망처럼 가득 찬 진리를 가르쳐주는 장대하고 거대한 종교다. 나같이 작은 그릇이 담을 수 있는 좁은 세계가 아니지만 무리해서 이런 연재를 감행한 것은 순전히 불법의 포용성을 믿기 때문이다. 서른 해가 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