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더럽고 지저분한 화장실 보면서금세 속이 뒤집어지고 구역질까지 나와 ▲수미런던 법사가 2010년 7월3일 부산 대광명사에서 금정중학교 청소년들과 불자들을 대상으로 일상에서의 명상에 관해 강의하고 있다. “명상 수행을 하는 일주일 동안 당신의 소임은 합숙소의 여자 화장실 청소입니다.” 명상센터의 직원이 친절하게도 수행 과정에 관한 지침서에 표시해 주었다. 나는 ‘화장실 청소 소임’ 자체에 대해 흥분했다. 내가 맡게 된 일이 ‘나의 마음’을 나에게 새롭게 가르쳐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어떻게 화장실 청소를 수행하는가에 대해 나는 집중하고 주의를 기울일 것이라고 다짐했다. 다음 날 새벽 5시 45분, 명상 수행을 한 뒤
이기적인 사고·중독성은 경계해야 할 대상수행위한 공간으로 활용하는 건 각자의 몫 ▲요즘 아이들은 페이스북이나 블로그, 스마트폰 등을 통한 사이버 공간에서의 활동에 중독돼 있다. 아이들은 참선이나 명상 수행을 통해 자신을 깊이 관찰하면서 정신적으로 편안해질 수 있다. 몇 해 전 페이스북에서 꽤 이름난 불교 법사와 친구의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녀는 백인혈통의 60대 미국인이었고 그녀가 쓴 책과 가르침은 영어권 불교계에 엄청난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물론 그녀는 내가 누군지 알지 못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친구’라고 할 수도 없었지만 그녀에 관한 새로운 뉴스는 나에게 전달되는 매우 긴 뉴스 리스트에 포함되어 있었다. 종종 그녀의
학업에만 열중하다 보니 대부분 아이들 애정 결핍 ▲싱가포르 아이들이 등을 바닥에 대고 누운 뒤 긴장을 완화하는 명상에 집중하고 있다. 명상을 시작한지 20분도 되지 않아 모든 아이들이 깊에 잠에 빠졌다. 싱가포르 아이들을 위한 캠프 기간 중 한 번은 명상 수련을 하면서 미각에 집중하게 했다. 우리는 학생들에게 한 종류의 건포도를 주었다. 채스가 지시했다. “입안에서의 모든 감각과 맛에 깨어있으면서 가능한 천천히 건포도를 씹어라. 최소 1분간은 씹을 수 있는지 알아보자꾸나.” 채스가 5분이란 시간을 확인한 후 어린이들을 관찰해 보니 대부분이 아주 열심히 씹고 있었다. 우리는 빙그레 웃었다. “자, 이제 삼켜도 된단다. 그래
싱가포르에선 기독교인 되는 게세련되고 현대적인 변화로 생각서양인 불교 선망한다는 설명에 싱가포르 아이들 매우 놀라워 해 미국의 젊은 불자에 관한 나의 책인 ‘청바지를 입은 부처’를 출간한지 몇 해 후, 싱가포르에 살고 있는 불자로부터 한 통의 메일을 받았다. 은퇴한 엔지니어인 그는 아주 독실한 불자였다. 사흘간 열리는 캠프에서 어린이들에게 불교를 가르쳐 줄 수 있는지 의향을 물어왔다. 나 스스로 적임자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하겠다는 사람이 없다고 해서 “좋다”고 답했다. 명상수련센터(Insight Meditation Society)에서 법사 과정을 수련하고 있던 친구인 ‘채스’를 설득해 함께 싱가포르에 가서 캠프를 지도하기로 했다. 캠프가 진
화가 나면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라이 상황을 다르게 볼 수는 없을까?관심의 대상 바꾸면 화는 사라진다 ▲무언가를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화를 내려 놓을 수 있다. 아이가 화를 낼 때 다른 것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배려하라, 그러면 화는 아이에게서 떠날 것이다. 첫 아이를 낳은 직후 ‘얀’ 이라는 이름을 가진 보모를 고용했는데 그녀는 은퇴했지만 참으로 멋있는 사람이었다. 종종 퇴근 후 집에 돌아오면 보모가 나를 위해 부엌의 찬장을 깨끗하게 닦았고 물건들을 다시 정리해 놓은 것을 보곤 했다. 얼마 후 나는 그녀의 청소를 집의 청결 상태에 대한 그녀의 불만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그러한 마음이 일어서인지 그녀의 청소에 대해 나는 모욕
동양은 법당서 염불 정진아이는 뒤뜰서 게임만 열중49재-염불에 치중한 결과 # 베트남 불교 사원의 지나친 염불 의식 집중 사진 속의 아이가 읽고 있는 책은 무엇일까. 이 아이는 책의 내용을 알고 있는 것일까? 한 베트남 사원에서 가족들이 망자를 위해 49재에 집중하고 있다. 미국 애리조나주 투손시에 있는 베트남 사원의 뒤편에 서서 “이런 상황은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라고 자문하면서 생각에 잠겼다. 수다스러운 11세의 베트남 소년 ‘앤서니’는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서 머리를 앞으로 숙인 채 비디오게임에 빠져 있었다. 문 안쪽에서는 세 명의 베트남 비구니 스님이 사원 불자들의 조상을 위해 경전을 염송하면서 종을 울리고 있었다. 그들은 지난 49일 동안 죽은 사람이 비록 없
화 나면 가족간 대화 단절침묵은 ‘잘못된 현실’ 입증침묵의 시간 길어지면서각자의 잘못 관찰하게 돼 수미런던 법사는 차 안에 있을 때도 자신의 아이들에게 ‘침묵’에 익숙해지도록 한다. 아이들이 침묵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법에 익숙해지다 보면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차에 탄 수미런던 법사와 자녀들. 나의 두 자녀를 자동차에 태우고 공원으로 가던 중 정지 신호를 보고 차를 멈추었다. 바로 그 순간, 우리 세 사람이 그 얼마나 조용히 침묵하고 있었는가를 깨달을 수 있었다. 두 아이들이 생각에 잠겨 창밖을 보고 있는 모습을 뒷거울을 통해 확인했다. 순간 내가 좋지 못한, 혹은 게으른 엄마이지 않았나 하는 걱정이 앞섰다. 교육
탐욕, 성냄 등 부정적 습관들명상 통해 효과적 대응 가능깨어 있기 반복하면 몸에 배 명상센터의 스태프와 수미런던 법사. 그녀는 명상을 통해 산행이나 청소, 요리 등 일상이 진부해지지 않을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이 글은 영적인 삶에 대해서 관심이 많은 젊은이들을 위한 것이다. 이 세상에는 선택할 수 있는 수많은 종류의 종교가 있다. 저마다 자신의 메시아가가 제시하는 길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상황에서 ‘왜 불교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던져 본다. 평생 동안 신봉하고 헌신해야 할 ‘종교’를 선택하는데 있어서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사항은 어떤 것이 있을까?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다음 두 가지의 길을 제시하고자 한다. Part1. 무감각에
수미런던 법사와 싱가포르 불교대학의 학생들, 한 여학생에게 “왜 불자가 되었나요”라고 묻자, “부모님들과 친구들이 불자라서”라고 부끄러운 듯이 답했다. ▷영적이지만 종교적이지 않은 경우 종교와 성직에 관한 하버드대학 석사 과정의 입학사정관으로서 나는 갓 성년이 된 지원자들의 신앙 편력에 대한 에세이를 해마다 200편 이상 읽곤 한다. 각 글마다 특유의 맛이 있어 다르기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공통된 점이 있다. “나는 영적이기는 하지만 종교적이지는 못한 것 같다.”글을 읽으면서 본 문구인데 주목을 끄는 대목이다. 젊은 친구들의 이 문구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려고 노력했었다. ‘종교적’이라는 것은 무얼까. 불자들에게는 조상
수미런던 법사와 듀크대학 학생들의 마음 나누기. 20대 후반, 나는 메사추세츠주 보스턴시 외곽에 위치한 조그마한 마을의 언덕에 자리 잡은 이름난 명상센터에서 일하게 되었다. 당시 그 센터에서는 여러 명의 새로운 직원들을 선발했었는데 우연히도 그들 모두가 기존의 직원들보다 나이가 매우 어렸다. 그들은 내 나이 또래였다. 점심을 먹으러 식당에 갔을 때 나는 일부러 나이 든 직원들 틈에 앉았다. 그들 대부분은 10대 때 내가 그 센터에 머물렀던 수년 전부터 나의 좋은 친구이자 스승이었다. 나는 처음에는 젊은 직원들에 대해 관심이 전혀 없는 척 했다. 속마음은 그와는 반대였기에 현미와 두부로 식사를 하던 중 그들이 함께 모여 있는 테이블을 힐끔힐끔 쳐
명상 수행 중인 수미런던 법사. 몇 달 전 내가 일하고 있는 대학교에서 한 심리학자가 대학교 교목들과의 만남을 가진 적이 있다. 나는 불교 담당 교목이었다. 술에 취한 상태에서 위험한 일을 저질렀거나 성(性) 적인 고통(섹스)을 강요당하거나, 억압당하거나, 근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거나, 완전히 스트레스에 짓눌려 있는 등 여러 가지 위기 상황에 처한 학생들을 어떻게 도울 것인가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토론이 끝날 무렵 곱슬머리에 안경을 낀 그 심리학자에게 오랜 기간 동안 학생들과 상담하고 그들을 관찰한 결과에 대해 질문했다. 종교적인 환경에서 성장한 학생들과 그렇지 않은 경우 어떤 차이가 있었는가에 관한 것이었다. 나는 미리 예상했었다.
부모의 마음 간직하면자녀 양육은 완벽하게수행의 한 과정이 될 것 내가 자녀를 갖기 몇 해 전, 하버드대학 불교학과의 한 교수님이 개인적인 경험을 학생들에게 들려주었다. 그는 자신의 어린 딸과 같이 놀이터에 갔었는데 딸이 콧물을 흘리고 있었다고 한다. 닦아 줄 도구가 없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손으로 콧물을 훔쳤다. 그 순간 다른 사람의 콧물 같았으면 느꼈을 역겨움을 딸의 콧물에서는 전혀 느끼지 못했고 그러한 자신을 발견한 그는 스스로도 매우 놀랐다. ‘나’라는 것에 대한 집착이 사라졌기 때문에 자타(自他)는 구별되지 않는다는 불교의 가르침을 통찰하게 된 것이다. ‘수미’라는 인간은 독립된 개체가 아니라 습관, 물질적 요소, 인간관계 등 여러 요소의 집합체로서 존재한다
자녀가 있다면 부모로서의 길과 불자로서의 길이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세속의 집착을 내려놓고 출가를 해야 한다. 아이들을 돌보고 집안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을 때는 명상을 할 수 없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불자이면서 부모인 대다수의 사람들은 불자로서 짧은 시간이라도 수행하려고 끝없이 많은 일거리를 처리하느라 몸부림치는 것처럼 보인다. 어느 한국인 할머니가 나에게 한 말이 있는데 그 말씀이 매우 옳다고 생각한다. ‘엄마가 되는 것은 보살이 되는 것이야’(아빠에게도 똑 같이 적용된다)라고 그 할머니가 말한 적이 있다. 이 말씀은 불자로서 수행을 하면서 성취하는 많은 덕목들을 자녀를 양육하는 과정에서도 체득할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내가 태어났을 때 부모님은 선(禪) 수행공동체에서 살고 있었다. 일반적인 가정생활을 유지하면서 20대 초반의 도반 20여명과 함께 ‘완전한 깨달음’을 위해 금욕적인 계율에 따라 수행에만 집중하는 공동체를 지향했다. 가정생활과 수도자적인 삶의 방식을 결합하는 이러한 시도들과 경험들은 나의 어렸을 적 인성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고 그 영향을 기억하는 나에게 ‘자녀를 어떻게 불자로 자라게 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을 불러일으켰다. 일곱 살이 되었을 때 명상 수행실의 한편에 나만의 수행공간을 제공해 주었던 것을 나는 또렷하게 기억한다. 나는 매일 새벽 5시 30분 일어나 이미 30분 동안 명상에 집중하고 있는 어른들과 함께 나머지 30분 동안 명상을 해야만 했다. 터무니없이 이른 새벽에 졸린 눈을 비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