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4월15일 오전 세간의 눈과 귀가 다시 조계사로 향했다. 의현 총무원장의 3선을 결의했던 중앙종회가 제113차 임시회를 열기로 한 날이었다. 이미 4월10일 승려대회를 통해 종단의 입법과 사법, 행정의 권한을 갖는 조계종 개혁회의를 출범시키기로 결의했지만, 그에 따른 법적 절차가 필요했다. 승려대회는 종헌종법의 틀을 넘어선 초법적 권한행사였기 때문이다. 중앙종회가 승려대회의 결의를 부정한다면 법적 논란을 피할 수 없었다. 승려대회에 따라 종권 이양의현 원장·서암 종정 불신임종헌개정·개혁회의법 등 결의해산 앞두고 종회의원들
1994년 4월13일 아침 의현 총무원장의 사퇴 소식은 빠르게 전파됐다. 이날 새벽 경찰철수에 이어 의현 총무원장의 사퇴소식이 전해지면서 서울 조계사에 모인 스님과 신도들은 “마침내 개혁의 물꼬가 트였다”고 환호했다. 의현 원장 사퇴 알려지자조계사 축제분위기로 가득스님·신도 1만명 대회동참 종도 힘모아 개혁완수 다짐개혁회의로 종권이양 결의정부 사과·최형우 해임요구 서암 종정 마지막 교시발표“법 무시한 개혁, 동의 못해”개혁세력 외면…사퇴수순 밟아 전날까지 폭력이 난무했던 조계사 경내는 조금씩 안정을 찾아갔다. 총무원 청
1994년 4월12일 밤 10시30분경 서울 조계사는 술렁였다. 4월10일 승려대회 이후 개혁회의 측과 긴 대치국면을 이어가던 경찰내부에서 이상 기후가 감지됐다. 개혁회의 측에 ‘경찰이 곧 철수하기로 했다’는 소식이 흘러들었다. 밤 11시15분경 이기태 서울지방경찰청장이 조계사를 찾았다. 이 청장은 청사에 있던 총무원과 개혁회의 측 스님들을 잇따라 만났다. 그는 청사를 나서며 개혁회의 측에 “경찰병력을 철수할 것”이라는 입장을 전달했다. 4월13일 새벽 0시30분 경찰의 보호를 받으며 총무원 청사에 남아 있던 스님들이 조계사를 빠져
“폭력과 같은 법질서 유린이나 합법적 절차를 무시하는 행동은 어떤 이름으로도 국민적 동의를 얻을 수 없다. 조속히 난국을 수습하고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 불교의 사명을 다해주기를 기대한다.”(1994년 4월10일 문화체육부 종무실장 호소문) 승려대회 후 총무원 진입시도총무원·범종추 스님 폭력사태폭력사태 확산되자 경찰진입청사입구서 스님·재가자 해산경찰·개혁세력 몸싸움도 벌여개혁회의, 경찰 경내 진입규탄혜암스님, 종단 비상사태 선포비대위 구성…불교도대회 예고정치권도 공권력투입 규탄동참여론에 밀리자 13일 새벽 철수 1994
“이제 더 이상 숨길 것이 없을 만큼 불교교단의 치부가 낱낱이 드러났다. 혹한을 이겨낸 씨앗만이 꽃을 피우듯 한풍의 이 혼란과 격동이야말로 개혁의 희망이다. 반야의 검을 높이 치켜들고 장엄하게 불교개혁의 대열로 나서야 한다. 불교개혁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대적 과제이며, 보살의 길로 나서는 일임을 선언하노니 금강역사의 힘으로 불교개혁을 위해 고난의 길을 떠나자.”(1994년 4월10일 전국승려대회 개혁선언문)대중 3500명 조계사 운집승려대회 사상 최대 규모의현 총무원장 체제 종식원력 모아 종단개혁 다짐 의현 총무원장 퇴진 결
1994년 4월10일 전국승려대회를 하루 앞두고 발표된 서암 스님의 종정 교시는 적지 않은 파장을 몰고 왔다. 언론은 일제히 조계종의 분열을 예고했다. 종정과 원로회의의 서로 다른 행보에 초점을 맞췄다. 종권의 향배에 이목이 쏠렸다. 범승가종단개혁추진위(범종추)도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범종추는 승려대회 봉행위원회를 꾸리면서 서암 스님을 증명법사로 추대한 상태였다. 승려대회를 통해 의현 총무원장 체제에 종지부를 찍으려 했던 계획도 차질을 빚게 됐다. 그러나 범종추는 4월10일 승려대회를 강행하기로 했다. 이미 전국 사찰에 동원령
“오늘의 사태는 첫째 졸정(拙正)의 부덕이라, 삼보 전에 참회의 눈물로 밤을 지새웠습니다. 오늘 당장 물러나야 옳을 줄 아오나 이런 와중에 물러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종단이 어느 정도 개혁의 궤도에 올랐을 때 책임지고 떠날 것을 밝힙니다. 종도 여러분들께 흉금(胸襟) 깊이 참회 드리며, 불타(佛陀)의 유훈에 따라 종단을 여법하게 개혁하는데 동참해 주실 것을 또한 호소합니다.” (종정 서암 스님이 1994년 4월7일 발표한 읍소문)4월5일 원로회의 결의에종단여론 범종추로 기울어혼란을 예상한 서암 스님읍소문 발표하며 화합당부혜암
1994년 4월5일 열린 원로회의는 조계종 개혁의 성패를 가르는 중요한 분수령이었다. 원로회의가 범승가종단개혁추진위(범종추)를 지지한다면 개혁세력들은 뚜렷한 명분을 얻을 수 있었다. 반면 의현 총무원장을 돕는다면 종단개혁은 한낱 구호에 그칠 수 있었다. 위계질서를 중시하는 승가풍토에서 원로들의 입김은 종단 여론을 좌우하는 중요한 변수 가운데 하나였다. 범종추가 3월23일 출범과 동시에 원로들에게 공을 들였던 것도 이런 연유에서였다.4월2일 중앙승가대에서 종단개혁 의지를 재차 결집한 범종추는 원로 설득 작업에 나섰다. 전국승가대학학인
“오늘날 한국불교의 모습은 너무나 남루합니다. 왜 자부와 긍지로 살아야 할 출가수행자들이 수치와 수모를 감수하며 지내야 하는지 답답합니다. 종단 상황이 절박한데 원로 중진스님들께서 끝까지 침묵하고 방관한다면 우리는 가슴 깊이 존경하고 따를 수 없습니다. 종단개혁에 적극 나서줄 것을 거듭 호소합니다.”(도법 스님이 1994년 3월30일 밤 경찰에 연행됐다 풀려난 직후 중앙승가대 정진관에서 쓴 글, 선우도량 6호)1994년 3월31일 서울 안암동 중앙승가대 정진관에 스님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서울 조계사구종법회에 참여했다 경찰에 연행됐
1994년 3월30일 서울 조계종 총무원 청사는 폐허로 변했다. 폭격을 맞은 듯 청사 유리창은 산산조각 부서졌다. 바닥에는 유리파편과 돌들이 나뒹굴었다. 전화와 팩스, 책상 등 사무실 집기류들이 널브러져 전날의 참혹했던 상황을 웅변했다. 범승가종단개혁추진위(범종추) 소속 스님들이 강제 연행된 자리를 경찰이 대신했다. 경찰은 총무원 청사를 빼곡히 둘러싸고 삼엄한 경계태세를 유지했다. 조계사 안팎도 차단해 외부인의 출입을 철저히 봉쇄했다.의현 총무원장, 3월30일폭력 얼룩진 총무원청사서3선 위한 중앙종회 강행규정부 동원해 반대파 차단설
1994년 3월26일 오전 조계종 총무원 청사가 위치한 서울 조계사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범승가종단개혁추진위(범종추)는 이날 의현 총무원장의 3선을 저지하기 위해 구종법회를 열기로 했다. 의현 총무원장도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의현 총무원장은 범종추의 청사 진입을 막기 위해 정문에 두꺼운 철문을 설치했다. 창문마다 쇠창살을 달아 철옹성을 구축했다. 출입구는 건장한 규정부 스님들을 배치해 외부인들의 출입을 엄격히 차단했다. 오후 들어 조계사에 젊은 학인 스님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중앙승가대와 동국대, 전국승가대연합(전승련) 소속 스님
‘상무대 의혹’ 비판여론 확산궁지몰린 의현원장 3선 강행승가단체 종단개혁논의 ‘봇물’94년 1월 8개 단체 연대결의개혁방식 두고 단체간 이견출범날짜 못 잡고 ‘지지부진’중앙승가대, 검찰청 항의계기범종추 출범 확정…조직구성단식·비폭력 전제로 개혁추진“조계종 종단개혁의 주체는 범승가종단개혁추진위(범종추)였다. 이들 단체는 주로 대학교육을 받은 젊은 층들로 구성됐다. 당면 과제로 김영삼 정부의 정치자금 문제해결과 의현 총무원장의 3선 반대를, 장기적인 목표로 불교의 체질개선을 내세웠다.”(유승무, ‘현대 한국불교 개혁운동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