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천암에 소장된 신미 스님 진영. 1450년 1월26일, 깊은 병세에서 다소 기운을 회복한 세종(1397~1450)은 내관을 시켜 신미 스님을 조용히 궁에 들게 했다. 삶의 마지막 회향을 앞두고 자신을 위해 헌신해 준 것에 대한 감사의 뜻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신미 스님이 침전에 들자, 세종은 신하로서가 아니라 큰 스승을 대하듯 스님을 극진히 모셨다. 감로수와 같은 스님의 법문을 청해 들은 세종은 스님이 주석하던 속리산 복천암을 중창할 수 있도록 불사(佛事)를 돕고 싶다고 했다. 그래도 부족하다고 여겼던지 얼마 뒤 세종은 스님에 대해 ‘선교도총섭 밀전정법 비지쌍운 우국이세 원융무애 혜각존자’라는 긴 법호를 친히 내렸다. 그러
75년 1월14일 국무회의서교계 30년 숙원 결국 해결용태영 변호사 의지 작용기독교계 여론도 움직여 ▲부처님오신날 공휴일 제정을 알린 ‘대한불교’(1975년 1월9일자) 기사. 1975년 1월14일 늦은 밤, 박정희 대통령은 다급하게 국무회의를 소집했다. ‘부처님오신날 공휴일 제정’을 결정하기 위해서였다. 긴 논의 끝에 정부는 부처님오신날을 공휴일로 제정했다. 해방 이후 30년만에 불교계의 숙원이 해결된 셈이다. 불교계가 부처님오신날 공휴일 제정을 처음 공식 제기한 것은 1963년. 통합종단 조계종이 당시 주무부처인 문교부에 부처님오신날 공휴일 제정 건의문을 내면서부터다. 이미 정부가 기독교의 예수탄신일을 1945년부터 공
1471년 12월5일 성종 결정 세조 때 불경 발간위해 설립 11년간 10여종 불경 한역 국어학·불교사 연구의 토대 ▲간경도감이 설치된 뒤 처음 국역된 ‘능엄경 언해’. 1471년 12월5일 조선 성종(1457~ 1494)은 끝내 간경도감을 폐지했다. 할아버지 세조(1417~1468)가 각별한 관심을 두고 운영해 왔던 사업이었지만 성종은 거듭된 사간원 관리들의 반대 상소에 결국 폐지를 결정했다. 세조가 죽은 지 3년만의 일이다. 간경도감은 1461년 6월 세조가 국가차원에서 불경 간행을 진행하겠다며 왕명으로 설립한 기관이었다. 간경도감의 설치는 당시로선 파격에 가까웠다. 숭유억불을 국시로 내세운 조선조에서 불교경전을
1954년 12월4일 비구측종헌개정에 강하게 반발“보조 종조 내세우는 건환부역조”…종정직 사퇴 ▲만암 스님 비구·대처승 간의 갈등의 골이 깊어지던 1954년 12월4일. 백양사에 주석하던 조계종 초대종정 만암 스님은 대노했다. 비구측이 승려대회를 열어 종조를 바꾸는 종헌개정을 결의하고, 경무대를 방문해 불교정화를 촉구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만암 스님은 즉각 “비구 승려대회는 불법”이라고 강하게 이의를 제기했지만 이미 강경론을 내세운 비구측의 발길을 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만암 스님은 깊은 탄식을 쏟아냈다. 이미 먹구름이 짙게 깔리고 있는 한국불교의 현실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음을 한탄했다. 만암 스님은 정화의 필요성에
1936년 11월11일 선암사서한국 근대불교의 화엄 종주학식·수행 높아 생불로 추앙임제종 설립해 일제에 저항 ▲경운 스님(1858~1936). 경운 원기(1858~1936) 스님. 일제시대 만해 스님 등과 더불어 임제종을 설립해 한국불교의 정통성을 지켜냈을 뿐 아니라 당대 최고의 강백이자 근대한국불교의 화엄 종주로 추앙받던 스님이었다. 그럼에도 스님은 근대한국불교사에서 크게 조명 받지 못했다. 스님은 1950~60년대 비구·대처간 갈등 끝에 사실상 태고종이 차지한 선암사 문중이었기 때문이다. 조계종으로선 선암사 문중이었던 경운 스님을 주목할 이유가 없었고 태고종 선암사 역시 스님을 조명할 여력이 되지 못했다. 자연 경운 스님은
보조硏, 1987년 11월15일성철 스님 돈점논쟁이 계기월례발표로 토론문화 선도사찰지원 학술단체 ‘롤모델’ ▲보조국사 지눌 스님 진영. 보조사상연구원이 1987년 11월15일 창간한 학술지 ‘보조사상’은 당시 불교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보조사상연구원의 초대 원장인 ‘무소유’ 법정 스님이 창간호에서 당시 종정이었던 성철 스님의 ‘돈오돈수’ 주장을 반박하며 보조 스님의 ‘돈오점수’를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전까지 일부 학자들이 반론을 제기한 적은 있지만 조계종에 소속된 스님이 직접 종정 스님을 비판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따라서 보조사상연구원의 ‘보조사상’ 발간은 본격적인 돈점논쟁의 서막이었다. 현대 한국불
1993년 11월4일 입적‘증도가’ 읽고 출가 결심1947년 봉암사결사 주도지계 등 수행자본분 강조 ▲성철 스님 최근 조계종 원로 스님들이 종단 정치에 깊숙이 개입하는가 하면 원로의장직을 두고 심각하게 대립하는 일들이 발생하면서 종단 안팎에서 우려가 크다. 종단 원로 스님에 대한 존경은 고사하고 ‘이젠 후학들이 원로 스님까지 걱정해야 할 판’이라는 자조 섞인 말까지 나오고 있다. 그런가 하면 법의 상징이 돼야 할 총림 방장 스님의 권위가 흔들리고 있는 것도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새삼 1993년 11월4일 입적한 조계종 전 종정 퇴옹당 성철 스님의 사자후가 그리워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부처님 법대로
1966년 10월13일 석가탑서현존인쇄물 중 最古 문화재중국 “당나라 때 제작”주장중수기 통해 신라제작 확인 ▲불국사 석탑에서 발견된 ‘무구정광경’. 1966년 10월13일 세계인들의 이목이 경주에 집중됐다. 도굴범에 의해 훼손된 불국사 석가탑을 보수하는 과정에서 현존 세계최고(最古)의 인쇄물로 추정되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하 무구정광경)’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당시 석가탑 보수정비를 담당했던 학자들은 “무구정광경은 751년 신라 경덕왕 때 김대성이 석가탑을 건립하면서 봉안했던 경전”이라고 밝혔다. 이는 그 동안 가장 오래된 인쇄물로 알려져 왔던 일본 호류사의 ‘백만탑다라니’(770년)보다 최소 20여년 앞서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우리나
1918년 10월7일 무력항쟁법정사 김연일 스님이 주도스님·농민 등 700여명 동참'사교도 선동운동’왜곡되기도 ▲법정사 항일운동을 형상화한 제주 항일기념관의 디오라마. 1918년 10월7일 새벽4시. 제주 서귀포 법정사에는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몰려든 스님과 불자, 농민들로 가득했다. 이들은 한 손에 태극기를, 다른 한 손에는 농기구를 들었다. 또 곤봉과 총을 든 사람도 적지 않았다. 법정사 주지 김연일 스님은 출정에 앞서 대웅전 앞마당에 깃발을 세워두고 거사가 반드시 성공하기를 발원하며 기원제를 올렸다. 그리곤 대중 앞에 나서 “일본 제국주의가 우리 동포를 학대하고 있다. 우리가 나서 그들을 이 섬에서 추방하지 않으면 안
1981년 9월15일 84세 입적독일서 국내 첫 불교학 박사내무부장관·동대 총장 역임‘금강경’ 독송 수행모임 견인 ▲백성욱 박사 독립운동가. 수행자, 정치인, 교육자로서의 삶을 살았던 백성욱 박사가 1981년 9월15일(음력 8월19일) 84세로 입적했다. 그는 우리나라 불교학자로는 처음으로 유럽 유학을 떠나 불교학 1호 박사가 됐고, 해방 이후 내무부 장관을 거쳐 정치인으로도 활약했으며 동국대 총장, 동국학원 이사장 등을 맡아 교육행정가로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 인물이었다. 1897년 서울에서 태어난 백성욱 박사는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1910년 7월 정릉 봉국사에서 최하옹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1911년부터 불교전문강원에서 불교경전을 배웠던
1918년 9월1일 만해스님 발간시·소설 수록 근대 종합 교양지3호 발간 뒤 일제에 의해 폐간80년후 만해정신계승 위해 복간 ▲1918년 발간된 불교잡지 ‘유심’첫호. 1918년 9월1일 불교계에 새로운 잡지가 등장했다. ‘조선불교유신론’을 펴내고 일제의 종교침략에 맞서 임제종 운동을 주도했던 만해 한용운 스님이 직접 편집과 발행인을 맡은 ‘유심’이었다. 1910년대 불교계에 잡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조선시대 이후 쇠락의 길을 걷고 있는 불교 근대화와 개혁을 위해서는 일반대중을 계몽할 수 있는 매체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권상로, 박한영, 이능화 등 당시 불교선각자들은 불교적 가치를 대중들에게 알리는 불교잡지를 속속 발간했다
1873년 8월26·28일 스리랑카서불교와 기독교간의 교리적 논쟁불교 비판한 목사·전도사에 맞서구나난다 스님 불교 탁월함 역설 ▲논쟁이 벌어진 곳에 세워진 랑콧트 사원. 19세기 아시아는 제국주의를 앞세운 서구 열강에 의해 무참하게 무너졌다. 총칼을 앞세운 제국주의 열강은 경제적 침탈 뿐 아니라 식민 지배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민족성 말살 등 문화적 침탈도 함께 진행했다. 대신 단절된 그 자리에 배타성이 강한 기독교를 강제 수혈했다. 19세기 스리랑카도 이런 제국주의의 침탈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1815년 스리랑카를 식민지화한 영국은 기독교를 앞세워 스리랑카의 전통종교였던 불교를 탄압했다. 스님들의 탁발을 금
1924년 8월18일 동아일보 보도주지 이회광의 무리한 사업으로해인사 포교소 집기류 경매처분90여년 뒤 해인사도 ‘불상압류’ ▲1924년 8월18일 동아일보 기사 일부. 1924년 8월18일 불교계는 큰 충격에 휩싸였다. 이날 배달된 동아일보에 해인사 주지 이회광(1862~1933) 스님이 무리한 사업을 추진하다 서울 정동에 있던 해인사 서울중앙포교소의 재산이 압류당해 경매에 넘어갔다는 내용이 보도됐기 때문이다.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해인사의 주지로 인해 사찰 재산이 압류됐다는 소식은 불교계로서는 치욕스런 사건이었다. 동아일보는 이날 ‘해인사의 대치욕’이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서울 정동에 있는
1979년 7월 스리랑카서 수계나치 탄압 피해 난민으로 생활불법 만나 출가수행자 삶 발원샤카디타 창립…여성권익 앞장 ▲아야 케마 스님 1979년 7월 어느 날, 스리랑카 수도 콜롬보의 한 작은 마을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이날은 유럽 출신 한 여성의 출가의식이 있는 날이었다. 이미 오래전 비구니 승단의 맥이 끊긴 남방불교권에서 여성출가자 수계의식은 진귀한 일이었다. 계사인 나라다 스님은 삭발염의한 파란 눈의 여행자에게 출가수행자로서 지켜야 할 사미니 10계를 설했고, 그는 묵묵히 계를 지킬 것을 다짐했다. 서양인 최초의 비구니이자 여성들의 권익을 위해 헌신했던 아야 케마(Ayya Khema) 스님의 출가수행자로서 삶은 그렇게 시작됐다.
▲장경호 거사 “내가 소유한 모든 것이 내 것이란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잠시 나에게 맡겨진 것을 관리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모두의 관계 속에서 이뤄진 공동의 것이다.” 동국제강의 창업주이자 현대판 유마거사로 불린 대원 장경호(1899~1975) 거사가 모든 사재를 기부하게 된 주된 이유다. 그는 1975년 7월10일 세연이 다했음을 직감하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평생 모은 사재 30억원을 불교중흥을 위해 써달라며 기부했다. 일제시대와 한국전쟁을 거치는 동안 낙후된 국가경제를 일으키기 위해 철강 산업에 뛰어든 뒤 피땀으로 일군 재산이었지만 그는 아낌없이 내려놓았다. 장 거사의 이 같은 보시행은 일제강점기 암울했던 유년시절을 보내면서 만난 불교의 가르침에서
1919년 7월10일 서울 서대문 형무소 취조실. 3·1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수감된 만해 한용운(1879~1944) 스님은 일본 검사장을 마주하고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4개월째 밤낮으로 계속된 고문과 협박으로 두려움에 떨 법도 했건만 스님의 매운 눈초리는 더욱 빛을 냈다. 그리곤 말없이 ‘조선독립의 서’라고 적힌 종이뭉치를 검사장에게 건넸다. 만해 스님은 ‘조선독립의 서’에서 “자유와 평화는 인류와 조선민족이 지향해야 할 근본가치”라고 천명했다. 또 “조선민족이 이미 실력을 갖췄고, 군국주의를 내세운 독일의 1차 세계대전 패망과 민족자결주의를 앞세운 세계정세를 살펴보면 조선민족이 독립을 선언할 수 있는 충분한 명분을 갖췄다”고 갈파했다. 더구나
▲중국 산동성 태안시 태산 기슭에 위치한 보조사를 중창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져 있는 만공선사탑비. 1417년 7월4일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공조판서 신개의 급보에 조선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신개의 보고에 따르면 우리나라 승려 11명이 몰래 북경에 들어가 명 황제를 알현했고, 성조(영락제, 1360~1424)는 이들을 남경의 사찰로 보내 머물게 했다는 것이다. 이 소식에 태종(1367~1422)은 물론 조정대신들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치밀한 폐불 정책으로 승려와 사찰 수를 대폭 줄였고, 승려들의 중국 구법 순례도 국법으로 엄격히 금지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조선의 승려가 중국으로 건너갔고, 또 이들이 명의 황제를 만날 때